[스크랩] 3월12일,[요한계시록16]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말씀
주일설교(2017/3/12)-요한계시록(16)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말씀
계2: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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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은 교회와 성도들을 파멸시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타협하며 사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재물과 능력과 쾌락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영혼도 서슴없이 팔아버립니다. 이렇게 이 세상은 타협하면서 사는 시대입니다.
-관심을 끌기 위해서,
-인기 있고 환영받기 위해서,
-자신의 직장을 확보하기 위해서,
-승진하기 위해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기 위해서,
-더 많은 권력을 얻기 위해서,,,,
이런 종류의 것들을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습니다. 요점은 분명합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스스로 옳다고 알고 있는 것까지도 버리고 타협해 버립니다. 이러한 모습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요,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타협하면서 살고, 그렇게 타협하면서 돈 벌어 놓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고,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바로 두아디라 교회 사람들도 이랬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개인적인 이익과 욕망들을 채우기 위해서 타협하면서 믿는 자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두아디라’는 버가모나 사데로 가기 위한 대로변에 있었기 때문에 교통이 편리했습니다. 대도시로 지나가는 길목에 있다가보니, 상업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이 도시에는 황제를 숭배하기 위한 신전도 없었고,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유명한 신전도 없었고, 행정 중심지도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특별하게 주목받는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두아디라 사람들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도 유명한 도시가 아니기 때문에, 그 돌파구로 잘 뻗어 있는 도로를 이용해서 상업을 발전시켜 부를 축적하는 길 뿐이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세울 때 만났던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가 바로 이 두아디라 사람이었습니다(행16:14). 자주색, 빨간색은 지금도 염색이 힘든 색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 당시 벌써 그런 염색 업이 발달했고 그에 따라 옷을 만드는 기술과 봉제업, 그리고 옷에 부착하는 가죽을 다루는 기술과 그런 것을 다루는 도구를 만드는 대장장이들의 제련 기술도 발달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상업이 발달한 곳에는 당연히 상업 조합이 생겼고, 그 조합마다 각자 섬기는 수호신들이 있었습니다. 그 조합들을 잘되게 하는 대표적인 신이 태양신 아폴로 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각각의 상업 조합에 가입하면 이런 신들에게 제사하고, 신들을 위한 축제에 참여하고, 그 축제에 제물을 바치고, 기부금을 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수호신을 섬기는 무당들, 제사장들, 여자 사제들이 많았던 도시였습니다. 두아디라에는 직업에 따라 다양한 조합이 생겼는데, 사람들이 자신의 상호 이익과 친목을 위해 모직 종사자, 피혁 종사자, 면포 종사자, 청동 종사자, 그리고 의복 제조업 종사자, 염색업 종사자, 그 외에도 도자기업 종사자, 제빵업 종사자, 노예 매매업 종사자 등 다양한 직업에 조합이 있었습니다. 이 조합에 가입하지 않는 것은 오늘날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는 것과 같아서 사업적으로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하고, 또 사업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도 이런 사업에 종사하지 않으면 먹고 살길이 막막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도 이런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조합에 가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조합에 가입하면 윤택하게 돈도 잘 벌이고,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조합에 가입하지 않으면 어느 장사라도 할 수도 없고, 늘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실한 기독교인들은 아무리 가난해지고, 먹고 살기 힘들어도, 장사를 할 수 없어도 조합에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왜 조합에 가입하지 않았느냐 하면, 첫째는, 그들은 공동 식사를 하는데, 신전에서 식사할 때가 많았습니다. 특히 회합이 있을 때는 그들의 신전에서 공식적인 제사로 시작하고 끝냈습니다. 그리고 먹는 고기는 이미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이었습니다. 둘째는 이들의 공동식사나 축제의 모임은 과음과 음란한 축제였습니다. 현란한 춤과 신전에서 일하는 여 사제들이 주도하는 음행을 행하는 축제였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아는 사도행전 15장 29절에서 예루살렘 사도회의를 열어서 이방인들에게는 무거운 율법을 지우지 말고,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고 정해 주었습니다. 이 후부터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율법을 안 지키는 대신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이 내용들은 사실은 모두 이방의 우상의 신전의 제사와 우상의 제물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들입니다. 이방인들은 짐승의 피를 그냥 먹었고, 우리나라도 옛날에는 그랬습니다. 짐승을 잡을 때도 목매어 죽였습니다. 음행도 신전에서 여 사제들과 제사의식으로 관계를 가진 겁니다. 모든 내용이 우상과 관련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인 된다는 것은 예루살렘 사도회의 결정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아디라에서는 그런 것을 지키다가는 조합에도 가입할 수 없고 돈도 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두아디라의 각 조합들이 벌이는 축제는 아주 유명했습니다. 조합마다 경쟁적으로 더 많은 기부금을 내고, 더 많이 축제에 참여하게 하여 더 큰 축제가 되게 경쟁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그러한 사회적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 안에 이교적 신앙의 모습이 많이 침투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 여자 선지자가 이 두아디라 교회에 왔습니다. 이 여자는 두아디라 교회를 사로잡았습니다. 누구인지 이름을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니골당의 영향을 받은 한 여선지자일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니골당은 지난 주일에 말씀 드린 것처럼, 영지주의 영향을 받아서 영은 귀한 것이고, 육은 천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 육신의 행위가 영에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은 무슨 짓을 해도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신은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괜찮고, 신전에서 여사제와 관계를 가져도 괜찮고, 세상에서 타협하면서 살아도 괜찮다. 특히 이방인들과 어울려서 사업도 해야 되는데, 조합에도 가입하고 해서 축제에도 참석하고, 회비도 내고, 신전에 제물도 바치고 해서, 그들과 어울려서 함께 장사하고 먹고 사는 데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것은 죄 짓는 게 아니다. 우리도 돈 많이 벌어서 선교도 하고, 선한 일, 좋은 일을 많이 해야 되지 않느냐. 고생하면서 가난하게 살 필요가 없다. ’ 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두아디라 교회의 교인들이 많이 넘어가 버렸습니다. ‘안 그래도 먹고 살기 힘든데, 한 푼이라도 더 버려야 자식들 공부시키고, 집도 사야 되고, 노후를 생각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 되는데, 교회에도 십일조 많이 하고 할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지....’ 하면서 그들은 타협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본문은 이것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20절을 보시면,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여기서 이 여선지자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 이라고 합니다. 우선은 예수님이 선지자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자기 스스로 선지자라고 하면서 돌아다니면서 이단의 교리를 퍼뜨리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지금 이런 자칭 목사, 자칭 선지자가 많습니다. 어디서 목사 안수 받았는지도 안 나와 있고, 신학교도 없고, 그냥 자칭 목사, 자칭 선지자예요.
이번에 우리 시찰 영내에 우리 총회 교단 마크를 사용하는 곳이 있다 해서 조사를 해서 찾아 내었습니다. 저 방촌동 한 쪽 구석에 우리 교단 마크를 크게 붙여 놓고, ‘21다문화세계축복선교회‘, 그리고 ’한미신학연구원‘ 이라는 간판을 걸어 놓았습니다. 문제는 우리 교단 마크가 앞에 크게 붙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시찰경내니까 강동시찰회 시찰장님이 전화를 해서 신분을 밝히고 왜 우리 총회 마크를 사용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무조건 욕부터 먼저하고, 그냥 막 쌍욕을 하고, 전화를 끊어버리더랍니다. 그래서 노회에 보고하고 다시 세밀하게 조사해서 법적 대응을 하기로 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것들이 사기꾼이예요. 거창하게 간판을 걸어 놓고, 우리 교단마크를 도용해서 모르고 가는 사람들을 걸려들게 하는 거예요. 이런 것들이 우리나라에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은 구약의 열왕기상16:31의 원조 이세벨을 빗대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진짜 이세벨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왕의 왕후였습니다. 이 여자는 시돈 왕 에드바알의 딸로 아합 왕의 부인이 되었습니다. 이 여자가 시돈에서 올 때 자기 나라의 신을 가지고 옵니다. 그래서 아합 왕도 바알과 아세라신을 섬기게 하고, 권력의 힘으로 온 북쪽 이스라엘을 다 바알과 아세라신을 섬기게 했습니다. 이때 활동했던 선지자가 엘리야 선지자입니다.
이때부터 그나마 남아 있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다 없어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잡아다가 많이 죽였습니다. 그래서 북쪽 이스라엘을 완전히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신과 아세라신을 섬기도록 만들어 버린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그 이세벨을 빗대어서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 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 여자가 교회에 들어 와서 옛날 구약의 이세벨처럼, 두아디라교회를 변질시키고, 신앙을 변질시켜서 축제에 참석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고, 신전에서 행음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두아디라 교회에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하면, 18절을 보십시다.
“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눈이 불꽃 같고,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납니다. 각 교회에 주시는 편지의 서두에 나오는 예수님이 나타나시는 모습은 그 교회의 형편과 신앙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두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 같다”고 하는 것은 심판과, 심판 속에서도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그리고 권세를 상징합니다. 불꽃 같은 눈으로 속속들이 들여다 보시고, 세밀하게 보시고, 다 아시는 분이시고, 빛난 주석과 같은 발로 짓밟아 버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두아디라 교회의 내용은 한 교회 안에 검은 색과 흰색 두 종류의 신앙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가는 자들은 구원에 이를 것이고 교회 안에서 사탄의 길을 따르는 자들은 반드시 심판할 것이라는 것을 천명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에는 이렇게 타협하면서 돈 벌고, 사업하고, 그 돈으로 교회에 헌금하면서 봉사하고, 선교하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소수의 무리이지만, 타협하지 않고, 힘들게 신앙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두아디라 교회의 주도권은 어떤 사람들이 잡고 있을까요? 여자 이세벨의 교훈을 따라 사는 자들이겠지요? 타협하지 않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자들은 가난하고, 헌금도 많이 못 하고, 왕따 당하고, 모임에도 끼워주지 않고, 융통성도 없고, 별스럽게 믿는 자들이라고 무시당했겠지요.
그런데 24절,25절을 읽어 보십시다.
“(24)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많지는 않지만, 몇몇 사람들, 이 사람들을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라고 말합니다. 숫자는 몇 명 안 되지만, 굳건하게 믿음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타협하지 않는 몇몇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진짜 교인은 너희들이다’ 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환경, 이런 시대의 흐름에 외골수로 정통 신앙을 지키며 남아 있는다는 것은 심히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몇 몇 사람들은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고,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손가락질 받고, 멸시를 받고, 따돌림을 받습니다. ‘별스럽게 믿는다는 둥, 너희만 의롭냐, 너희만 예수 믿는 자냐, 너희만 구원 받았냐, 적당하게 좀 해라, 너무 티내지 말고,,,’ 하면서 따돌림 당하고, 별별 소리들을 다 들으면서 신앙을 지킵니다.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 이라는 말은 저쪽에 타협하면서 자칭 여선지자 이세벨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이쪽에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비꼬면서 비판한 말입니다. 여자 이세벨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비판하면서 멸시하니까, 이쪽에 신앙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것은 사탄의 계략이다. 사탄에게 속는 것이다’ 라고 말했겠지요. 그러니까 저 사람들이 ‘우리는 사탄의 깊은 것 까지도 안다. 우리는 사탄에게 속지 않는다.’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너희가 사탄의 깊을 모른다’ 고 비판했을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여자 이세벨의 교훈 중에 하나가 ‘정말 훌륭한 신앙, 뛰어난 신앙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직접 들어가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사탄의 깊은 것을 알려면 사탄이 하는 깊은 것을 체험해 봐야 한다.’ ‘온갖 죄를 모조리 경험해 봐야 한다’ 라고 하면서, 향락에도 빠져 보고, 색욕에도 빠져 보고, 죄를 고의로 지어 보고, 특히 젊은 청년 때는 방탕한 생활에도 한 번 빠져 보면 죄가 무엇인지, 악의 깊은 데 까지 들어가 봐야 사탄의 깊은 것 까지 경험할 수 있다 라고 주장하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구원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벌써 우리는 구원 받았고, 이런 죄가 우리의 영혼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 영혼에 아주 좋은 훈련이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신앙은 깊은 향락에 들어가서도 그 한계를 지키며, 깊은 향락에 푹 빠지지 않는 것, 이 정도가 될 때 우리의 영혼의 훈련이 되고 아주 훌륭한 신앙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겠지요? 그들은 그것을 반대하는 자들을 향하여 멸시하며 비판하면서 ‘너희는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비꼰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 예수님이 어느 편을 들어 줍니까?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 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너희가 가지고 있는 그 신앙을 내가 올 때까지 굳건하게 지키라”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들의 편을 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소위”라는 말은 평가절하 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말이고, 사실 그런 교리는 없다.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가 맞다 라고 인정해 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너희가 가진 그 신앙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지켜라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더 놀라운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겉으로는 강건하고 번창하는 교회였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두아디라 교회에 처음 갔다고 가증했을 때, 겉으로는 이 두아디라 교회는 생기가 있고, 활기가 넘치고, 모든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좋은 열매를 맺는 그런 교회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과 타협하여 사업이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교인들 중에는 자기 사업체를 가지고 상당한 부를 축적한 사장님들이 많았을 겁니다. 이렇게 사업이 번창한 사람들은 바치는데 아끼지 아니했고, 자선 기금을 모으는데 너그러이 기부도 했을 겁니다. 이들은 참 기독교인으로 보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여자 이세벨을 참으로 훌륭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우리에게 사업을 번창하게 하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을 겁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 19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두아디라 교회는 선교도 많이 하고, 기부도 많이 하고, 온갖 다양한 사업도 많이 했습니다. 사랑과 봉사의 행위가 많았습니다. 믿음과 인내의 행위가 있었습니다. 강한 믿음과 인내가 있어야만 하는 사업과 봉사가 많습니다. 돈이나 인원을 동원해야 하는 봉사, 믿지 않는 자, 죄수, 부랑자,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돌아 보는 것, 시간이나 돈이 많이 들어 갑니다. 이러한 일들을 처음보다 나중 행위가 더 많았다 라고 합니다. 보통 힘들면 처음보다 나중이 지치고, 힘들어 축소시키고 줄어들게 되는데, 두아디라 교회는 갈수록 더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돈이 많으니까, 열심히 돈 벌어서 헌금도 많이 하고, 선교사업도 많이 하고, 섬김, 나눔, 이런 일들을 많이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좋은 교회로 평가를 받는 겁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타협하고, 믿지 않는 자들과 부딪칠 일이 생기지 않으니까, 세상 사람들과도 친하게 지내고, 행사도 같이 하고, 모임도 잘 가지고, 축제도 같이 즐기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일에도 같이 참여하고 하니까 부딪칠 일이 없습니다. 세상으로부터도 평판이 좋습니다.
그래서 두아디라 교회는 외부로부터 미움과 핍박이 없습니다.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도 없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유명한 제우스, 쥬피터, 헬라클레스 등등 이런 신전도 없습니다. 로마로부터 정치적인 압력도 없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의 미움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이단적인 거짓 교리로 무너져 가고, 썩어져 가고 있는 교회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경고가 있습니다.
교인이 많고, 힘이 있고, 돈이 많고, 사업을 많이 하는 교회, 반드시 그 교회가 참된 교회인가? 사람들은 많이 모입니다. 친교도 많이 합니다. 서로 서로 도와주면서 장사도 잘 됩니다. 그러면 참된 교회인가? 예수님이 인정하는 교회인가?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까, 구원을 이루고, 천국을 사모하고, 복음의 진리를 배우고, 예수님을 위해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신앙생활 보다, 죄와 지옥으로부터 구원 받은 것에 감사하는 삶보다, 친교를 나누고, 장사하여 돈 버는 일에 도움을 받고, 위로와 안위를 얻기 위해 교회를 출입하는 자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교회인가?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두아디라 교회는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 교회에도 이런 두아디라 교회 같은 교회가 많습니다. 설교는 교훈적인 설교, 권면적인 설교, 축복을 선포하는 설교 정도로 만족하고, 그래서 설교는 길게 하면 안 됩니다. 설교는 20분에서 25분로 끝내고, 전체 예배 시간도 40분에서 50분으로 끝내고, 친교를 나누고, 모임을 가지고, 다양한 팀을 만들어 자기가 선호하는 동호회 같은 성격의 그룹을 통해서 정보도 교환하고, 친교를 나누면서, 주일 하루를 보내는 것입니다. 여기는 성경공부 하자 하면 분위기가 사늘해집니다. 제일 싫은 게 성경공부입니다. 기도회 하자 하면 그만 사늘해집니다.
여기에는 복음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예수 믿는 진정한 목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예배는 축제요, 잔치입니다. 예배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감사와 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잔치는 나의 기쁨과 나의 즐거움을 위한 잔치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잔치입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가 내가 즐겁고 내가 기쁘고 내가 위로 받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기쁘고 내가 즐겁지 않으면 예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등록하지 않고, 다른 교회에 갑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나를 즐겁게 해줄 멋진 밴드도 있어야 하고 드라마도 있어야 하고 멋진 멀티미디어도 첨가되어야 하고 지루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교회는 회중들의 그러한 요구를 맞춰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예배는 여러분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여러분을 위로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때때로 여러분은 예배 시간을 통해 여러분의 죄가 드러나서 얼굴이 붉어지셔야 합니다. 때때로 여러분은 예배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통회 자복하는 눈물도 흘리셔야 합니다. 때로는 너무나 작은 우리가 드러나고, 너무나 부족한 우리가 드러나고, 아울러 하나님의 그 크심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서 그 하나님 앞에 압도되어야 합니다. ‘헉’하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경외감을 느끼셔야 합니다.
환갑잔치, 돌 잔치하는 것 하고는 전혀 다른 잔치입니다. 돌잔치에 가보면 정작 주인공인 아기는 방에서 울고 있고 놀러온 사람들이 주인공인 것처럼 그런 잔치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교인들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예배를 환갑잔치, 돌잔치처럼 이벤트화 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들의 모습 아닙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거짓 선지자 이세벨의 교훈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드럼을 칠 것인가, 말 것인가, 무슨 악기를 사용할 것인가, 신디를 사용할 것인가, 피아노를 사용할 것인가, 오르간을 사용할 것인가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왜 그것들을 사용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악기를 사용해서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함이라면 당장 다 갖다 버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찬송가를 부를 때, 내 마음에 안 더는 찬송이라고 안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찬송가가 내 마음에 덜고, 안 덜고가 어디 있습니까? 찬송을 통해서 내 영과 주님의 영이 만나는 거지요,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이세벨의 가르침이 오늘날 교회에 얼마나 많이 들어와 있습니까?두아디라 교회가 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이교적인 신앙에 빠지게 되었습니까? 그들의 신앙에 예수 그리스도가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없고, 예수님이 없는 것입니다. 죄와 타협하고, 세상의 문화와 타협하고, 우상과 타협하고, 미신과 타협하고, 세상의 즐거움과 타협하는 것은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생수에 먹물을 많이 넣은 것과 한 방울만 너희 것은 다르다 하면서 한 방울만 넣은 물을 생수라고 인정하고 마실 수 있습니까?
오늘날 한국 교회 교인들도 복음이 없고, 또 복음을 모르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들이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세상과 타협하고, 예수의 복음이 없고,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고, 세상과 물질을 좇아가기에 바쁜, 이런 교인이 되지 마십시오.
우리 노회에 저를 아는 목사님이 우리 교회 카페에 들어와서 제 설교를 듣고, ‘목사님 설교는 너무 보수적입니다. 요즘은 그렇게 하면 교인들이 싫어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제 은퇴할 때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고, 듣기 좋은 설교만 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전하고 싶어 하시는 말씀, 성경에 있는 대로 전하다가 은퇴할까 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그렇게 풍요로웠고, 돈도 많이 벌고, 돈이 있으므로 좋은 일도 많이 했지만, 예수님과 아무 상관없는, 천국과 아무 상관없는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끝이 안 좋았습니다. 그들은 예수 믿으면서 축복을 받았다고 자부 했지만, 끝이 다 망하고, 재앙 받고, 징계를 받았습니다.
22절, 23절을 읽으십시다.
“(22)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이 두아디라 교회의 거짓 선지자 이세벨과 그의 교훈을 따른 자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세 가지의 징벌을 내립니다. 그 앞 절 21절에 보면, 회개할 기회를 주었지만, 회개하지 안했다고 합니다. 첫째는 “침상에 던진다”고 합니다. 침상에 누워 살다가 죽는 겁니다. 이것은 불치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겁니다. 어떤 주석에 보면, 이것은 성병이라고도 하고,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간경화, 각종 성인병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큰 환난 가운데 던진다” 라고 합니다. 무엇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집안에 우환이 많다든가, 심한 고통, 모진 고생, 조여드는 압박감 등등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에 평강과 안식이 없습니다. 늘 불안, 초조, 두려움 일 수도 있습니다. 셋째는 “사망으로 자녀를 죽인다” 고 합니다. 자식들이 병으로 일찍 죽는 것을 말할 수 도 있고, 자식 대에 가서 모든 사업들이 망하는 것을 말할 수 도 있고, 자녀들이 예수를 바로 안 믿어서 – 부모들이 타협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신앙을 바로 물려 줄 수 있었겠느냐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녀들이 세상 사람들 다 되어 버리고, 신앙이 자녀 대에 가서 다 끊어져 버렸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자녀들도 죽고 망해 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에는 복음을 끝까지 붙잡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신앙을 굳건하게 지킨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25절을 다시 함께 읽으십시다.
“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너희에게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자 이세벨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고 타협하지 않은 참 믿음이요, 참 복음이요, 천국에 대한 소망입니다. 이들은 다른 것은 가진 것이 없지만, 돈도 없고, 권력도 없고, 가난하지만, 복음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습니다. 천국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예수님 오실 때까지 굳게 잡으라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은 타협하지 말고, 여러분들이 가진 믿음을 굳건하게 잡으시오.
그리고 약속하십니다. 26절에 보면, “이기는 자와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자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이것은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다스리는 권세입니다. 20장 4절에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6절에는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이기는 자에게는 이런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또 28절에 보면, “새벽 별을 주리라”고 하십니다. 새벽 별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계22:16에 보면 예수님 자신을 “광명한 새벽 별” 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자신을 주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 뭐니 뭐니 해도 제일 정확한 입장권은 예수님 자신이지요, 17절에 버가모 교회 교인들에게 이긴 자들에게 “감추인 만나”을 주신다고 했는데, 이것과 같은 겁니다. “감추인 만나”도 예수님 자신이고, “새벽 별”도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을 가진 자, 예수님을 품은 자들이 천국에 확실히 들어 간다 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랑도 좋고, 믿음과 섬김과 봉사와 많은 인내도 귀하고 좋지만,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고, 자기가 영광 받고, 존경 받기 위해 세상과 타협하고, 그 속에 예수가 없고, 복음이 빠진 사랑과 섬김과 봉사, 선교는 의미가 없다. 예수님이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종말의 시대에 주님께 눈이 열려, 예수님의 복음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이 무엇인지 알고, 예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말씀대로 살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