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8(일)[요한계시록38]측량권 안에 있는가?
주일설교(2017/10/8)-요한계시록(38)
측량 권 안에 있는가?
계11:1-6 28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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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은 위의 10장 11절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라는 말씀에 대한 답변입니다. 11장에서는 구체적으로 그 복음을 받은 자들이 어떠한 삶을 사는가 하는 것을 자세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종말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신앙상태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1절과 2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계11:1-2) “(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2)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이 부분은 11장의 서론부분에 속합니다. 앞으로 보호 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를 구분합니다. 보호 받는 자는 성전 안에 있는 자이고, 보호 받지 못할 자는 성전 밖에 있는 자입니다.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10:11) 하는 예언 사역을 위탁받은 사도요한에게 성전 척량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그에게 ‘지팡이 같은 갈대’, ‘칼라모스, kavlamo"’가 주어집니다. 이 갈대로 번역이 된 헬라여 칼라모스는 당시 사람들이 쓰던 길이를 재는 자였습니다. 3m정도 되는 갈대입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에스겔도 똑같이 성전 척량의 명령을 받고 장대로 성전을 척량하는 장면이 에스겔서 42장에 나옵니다.
(겔42:15-16)을 찾아 읽어 보십시다.
“(15) 그가 안에 있는 성전 척량하기를 마친 후에 나를 데리고 동쪽을 향한 문의 길로 나가서 사방 담을 척량하는데, (16) 그가 척량하는 장대 곧 그 장대로 동쪽을 척량하니 오백척이요.”
여기서 쓰인 ‘장대’, 히브리어 hn<q; ‘카네’가 ‘갈대’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갈대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예언하여야 하리라” 라는 예언 사역의 위탁이 일어난 후에 성전 척량이 나오는가?
그것은 당시에 어떤 경우에 성전을 척량했는지를 알면, 왜 요한에게 이러한 명령이 떨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겠죠? 당시에는 다음과 같은 두 경우에 성전을 척량했습니다.
먼저 첫 번째는 ‘파괴를 위한 척량’입니다. 어떤 건물이나 구조물을 파괴해 버릴 때 척량을 했고, 두 번째는 바깥 것들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울타리를 쌓는 개념으로의 척량이 있었습니다. 파괴 혹은 보호입니다. 이 개념을 머릿속에 잘 두시고 다음 구절을 보세요.
무엇을 척량하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입니다.
이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때가 AD95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성전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AD70년에 로마의 티투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럼 여기서 요한에게 척량하라고 하는 성전과 제단은 실제의 성전이 아니죠? 그럼 뭘까요?
하늘의 성전, 바로 교회, 하나님의 백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성전을 척량하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척량하라’는 말은 앞으로 마지막 때는 신앙상태, 영적상태, 복음을 가지고 사는 삶의 모습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의 의미는 ’이제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복음을 삶으로 입으로 전하고 그 복음의 내용을 직접 살아내게 될 텐데 그 삶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삶이 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대적들이 있고 그 대적들은 그들을 실패케 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들의 울타리가 되어 이 땅에서 그들의 삶이 끝나는 날까지 지키고 보호 하겠다‘ 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의 표현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 2절을 보시면 “성전 바깥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성전은 맨 바깥에 이방인의 뜰이 있었고, 그 다음에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 제사장의 뜰, 성소, 지성소 이렇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소로 들어가는 문이 열 개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맨 바깥의 이방인의 뜰을 성전 바깥뜰이라고 했고, 나머지 부분을 성전 안 뜰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바깥뜰에서 이방인들이 안 뜰로 넘어 들어오게 되면 즉시 사형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성전 바깥 마당은 믿는다 하면서 형식적으로 믿거나 예수를 믿지 않는 죄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통과하며 살아가는 진짜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보호하시지만 죄인들, 그리고 형식적으로 믿는다 하는 자들은 심판과 저주에 그대로 노출시켜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성전 바깥마당”은 이방인의 뜰입니다. 마흔두 달 동안 거룩한 성이 짓밟힐 때, 성전도 함께 짓밟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의미입니다. 성전 안에 있는 진짜 성도들, 알곡 같은 성도들은 보호 받지만, 믿지 않는 자들과 믿는다 하면서도 형식적인 신앙으로 바깥마당만 밟는 자들은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전3년 반 동안 적그리스도의 유혹에 넘어가 예수를 배반하고, 교회를 떠나는, 배교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2절의 ‘그 성전 바깥마당을 마흔두 달 동안 이방인들에게 주었다’는 구절의 “주었은즉” 이라는 헬라어 ‘ἐδόθη 에도떼’는 시제가 부정과거 수동태입니다.
그러니까 이방인들이 스스로 성전 밖 마당을 짓밟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하심에 의해서 그 짓밟힘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의 말씀은 앞으로 있을 제3성전과 관련이 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지금의 예루살렘에는 옛 날 솔로몬 성전이 세워져 있던 자리에 회교도들이 점령해서 “로크원형사원” 이라고 불리는 회교사원이 세워져 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우기 위해 준비한 자리는, 그 옛날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 받은 모리아산으로, 다윗은 성전을 세우지 못하고 성전 지을 재료만 다 준비 해 놓았다가, 훗날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세우게 됩니다. 이 솔로몬 성전은 BC587년 시드기야 왕 때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다 파괴되고 무너집니다. 그 후 70년이 지난 후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 온 후에, 그 허물어졌던 솔로몬성전 터 위에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지휘 하에 제2의 성전을 건축하게 됩니다. 이것은 제2의 성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이 성전은 헬라와 수리아의 통치를 받으며, 많은 핍박과 짓밟힘을 당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이 받은 모욕과 수치는 마지막 때 환난기에 적그리스도로부터 핍박 받을 예표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40년 전에 헤롯왕이 이 성전을 헐고 다시 새롭게 세웠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시대에 존재했던 헤롯성전입니다. 이 성전은 예수님이 예언한 대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AD70년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무너져 버렸습니다. 이 터 위에 회교도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회교도 사원을 세운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회교도들의 증오가 극에 달해서 거기에 있던 돌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100% 전혀 다른 재료로 회교도 사원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솔로몬성전이 세워져 있던 그곳에는 빛나는 황금 둠으로 회교사원이 높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여러 곳에는 말세에 이 성전이 재건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솔로몬 성전과 같은 제3의 성전이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여러 곳에, 그리고 신약성경 여러 곳에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15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하고 말씀하신 것은 말세의 환난 시대 후반에 다니엘이 예언한대로 적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의 성전이 모독을 받게 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우선 성전이 재건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3-4절에도 “(2:3)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2: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환난기 후반에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스스로 하나님인 것처럼 온 세상에 나타내 보임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예언인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에 성전이 재건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전이 재건되기 위해서는 회교사원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 되고, 회교도들과 타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중재를 잘해서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결탁해서 적그리스도와 동맹을 맺고 제3의 성전이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제3의 성전이 세워지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예수님이 성전이신 것입니다. 앞으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면 그곳에도 성전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21:22) 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언한 것은 이 땅에 있는 가시적인 성전은 참 성전이신 예수님을 위한 그림자요 예표로, 예수님 오시기까지 임시로 있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신 이후부터는 예루살렘에 있어 왔던 구약성전은 존재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구약성전을 다시 세운다는 것은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결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적그리스도와 결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적그리스도가 사탄의 힘을 빌려 전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것이고, 성전 위에 군림하면서 스스로 하나님처럼 성전 위에 앉아서 군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 중에도 다 성전 재건를 찬성하고 적그리스도와 결탁하는 게 아닙니다. 그 중에 의식이 깨어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것을 반대하고 전 세계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면서 적그리스도와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7장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이요, 신약 성도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흰 옷 입은 무리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한다” 라는 말은 성전을 재건하는 것에 타협하지 아니한 자들과 영적인 면에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적그리스도와 타협하지 않고, 형식적인 믿음이 아닌 알곡 성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어서 말씀을 전하면서 핍박 받은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측량” 이라는 말은 “소유의 회복과 확보” 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 안에 있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측량권 안에 들어 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측량권 밖에는 구원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측량”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확보하는 복음운동인 것입니다. 대 전도 운동, 또는 대 선교 운동인 것입니다. 전 세계에 전도해서 측량 권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측량 권 안에 든 자들은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의 반열에 들어가게 됩니다. 측량에서 제외된 것은 성전 바깥 마당입니다.
“바깥 마당”은 말하자면 이방인의 마당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영적으로 볼 때 양이 아니라 염소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다섯 처녀입니다. 한 달란트를 받고 땅에 묻어둔 게으른 종과 같습니다. 믿는다고 하지만 참 도리, 참 지식, 참 믿음에 바로 서 있지 못하면 결국 측량 권 안으로 들어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녔지만 바깥마당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 구원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우리가 교회는 다니지만, 이방인의 뜰에 서 있는 자와 같은 신앙생활로는 구원 받지 못한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마흔두 달 동안 성전과 거룩한 성을 짓밟을 때, 다 배교합니다. 다 하나님을 떠나 버립니다. 이들은 순교자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편안한 것만 추구하기 때문에 고난이 오면 다 떠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는다고 했는데, “마흔두 달”은 1260일, 한 때 두 때 반 때, 3년 반을 말합니다. 이 말을 악한 세력과 하나님의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서 악한 세력이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들을 핍박할 때, 즉 세상을 지배하고 밟는 상태를 말할 때는 “마흔두 달” 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의 입장에서 말할 때는 “천이백육십 일”, 또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라고 표현합니다.
다시 보십시오. 2절 마지막을 보십시오.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라고 되어 있지요? 13장 5절에 보면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리라.” “마흔두 달 동안 권세를 받으리라” 라고 하지요? 이것은 악의 세력에 대해서 말할 때 이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다시 11장 3절을 보십시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두 증인이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한다고 하지요? 또 12장 6절을 보십시오.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여기서도 마흔두 달이라고 하지 않고, 천이백육십 일 이라고 말합니다. 여자는 구약교회, 교회의 어머니입니다. 사탄이 교회의 어머니를 핍박할 때에 안전하게 피신시켜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탄의 입장에서 말할 때는 “마흔두 달” 이고, 교회와 성도들의 입장에서 말할 때는 “천이백육십일,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같은 3년 반이지만, 하나님은 다르게 대하신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지막 때 환난기에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전반기 3년 반 동안은 인기 작전으로 나갑니다. 포퓰리즘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백성들에게 환심을 사서 인기를 얻습니다. 그러면서 정적들을 하나 하나 제거합니다. 권력의 생리는 정권을 잡으면 그 권력으로 다시 살아날 정적들의 싹을 잘라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보세요. 정적들을 제거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반대세력은 안 죽으려고 피 터지게 싸우는 겁니다. 그래서 계속 정치보복하고, 싸우고, 제거하고, 계속 보복하고 싸우는 겁니다. 이건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이걸 독재국가라고 하는 겁니다. 포퓰리즘으로 백성의 환심을 사서 독재를 하는 겁니다. 옛날, 히틀러가 그랬고, 레닌이 그랬고, 뭇솔린이 그랬고, 김일성이 그랬습니다. 똑같습니다. 앞으로 적그리스도가 출현해서 전3년 반 동안 이렇게 이 세계를 다스립니다. 세계정부를 만들어 이 세계를 다스리게 됩니다.
이것을 자세히 보여 주고 있는 말씀이 계시록 13장입니다. 1-4절은 전3년 반에 일어나는 이야기이고, 5-18절은 후3년 반에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2장 3-7절까지도 전3년 반에 해당하는 이야기이고, 8절 이하는 후3년 반에 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11장은 환난기 전반기 3년 반 동안에 일어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세상은 평안하게 안식을 누리며 살는지 모르겠지만, 교회는 핍박과 고난을 겪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때는 배교하는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3절에는 이 때에 배교하는 일이 일어난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떠나고 신앙을 버리는 사람들이 속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 잘 믿는다고 자랑하고, 교회 안에서 명예 좋아하고, 감투 좋아하고, 어깨에 힘주고 교만하게 자기를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신앙 환경이 바뀌고 어려워지면, 즉 핍박이 오고 고난이 오면 신앙을 버리고, 교회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예수님 재림하시기 직전 상황입니다. 마지막 나팔을 불기 전 상황입니다. 세상은 폭풍전야처럼 평안하고 풍요롭고, 살기 좋은 시대처럼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고난과 핍박 속으로 들어 갑니다. 오늘 2절에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인 것입니다.
이 때 신앙의 상태가 확 들어나는 것입니다.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 속에 속한 자들이 있고, “성전 바깥마당”만 밟는 상태에 있는 자들로 확연히 드러나고 구분되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시면, 이 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향한 핍박과 고난이 있음에도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이 있습니다.
우리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11: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여기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1절에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입니다. 성전바깥 마당만 밟는 자들은 당연히 전도 안 하겠지요? “천이백육십일”은 전3년 반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전도 합니까? “굵은 베옷을 입고” 전도합니다. 굵은 베옷은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참회할 때 입던 옷입니다. 왜 이렇게 입고 전도합니까?
전도자들을 항상 이런 겸손한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된 것은 다 우리 먼저 믿는 자들이 잘못해서 그렇다 라는 마음을 가지는 겁니다. 교회가 바른 복음을 전하지 못해서 그렇다는 심정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향하여 회개하는 마음으로 전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굵은 베옷을 입고 겸손히 전도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성도가 세상과 싸워 이기고, 세상과 대결해서 싸우는 방법이 뭐지요? 전도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세상과 대결하여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선한 싸움”이라고 했습니다.(딤전6:12, 딤후4:7)
이 때가 마지막 때입니다. 이 때가 마지막으로 전도하는 기회입니다. 교회도 마지막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후부터는 교회도 존재하지 않고, 복음의 말씀도 들을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4절에 보면 사도바울도 “이 후에는 마지막이니”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일곱째 나팔을 불면 재림하시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 성도는 휴거하든지, 피난처로 가서 보호 받는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12장 할 때 다시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이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너가 성전 안마당, 측량 권 안에 있느냐? 측량 권 바깥, 성전 바깥마당에 있느냐?’ 이게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상태, 영적상태가 어디에 속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의 측량 권 안에 속해 있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