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2,18[요한계시록50]복된 하나님의 성도들
주일설교(2018/2/18)-요한계시록(50)
복된 하나님의 성도들
계1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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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시간에 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면서 땅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마지막 3년 반 동안은 이 땅에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실하게 믿음을 가진 자도 없다고 했습니다. 다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를 섬기면서 우상에게 절하고, 경제적인 해택을 누리면서 돈의 단맛을 빨아 먹으면서 살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미 휴거했거나 설령 신실한 성도들이 있다해도 순교했거나 아니면 산속이나 광야에 숨어서 자급자족하면서 고난을 겪으며 살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 천사가 직접 공중에 날아가면서 영원한 복음을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 성경에는 천사가 직접 전도하는 말씀은 없습니다. 복음전파는 사람들, 즉 성도들에게만 일임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도 천사가 직접 복음을 전하는 모습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6절에서부터 보면 천사가 직접 복음을 전합니다. 이것은 이 땅에 복음전도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가 다가오는 절박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단 한 명이라도 더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로부터 벗어나 구원 받고,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 6절부터 13절까지는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바로 직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직전, 그러니까 후3년 반의 마지막 시기입니다. 이 때 한 번 더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천사들을 보내어 땅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짐승과 거짓선지자를 섬기고 따르는 자들에게 “큰 음성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려라. 그의 심판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하늘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창조주를 경배하라”(7절) 고 외칩니다. 왜 그렇게 외칩니까? 온통 세상은 짐승을 섬기고 우상에게 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 성 바벨론, 즉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가 다스리고 있는 사탄의 제국은 반드시 무너진다. 라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이 바벨론은 무너진 것 같이 앞으로 사탄이 적그리스도를 앞세워 통치하는 제국은 반드시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천사가 더 크게 강조합니다. 이 땅에 거주하는 모든 자들에게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동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되고, 더 나아가 거룩한 천사들과 어린양 예수님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고난은 세세토록 받게 되고 밤낮 쉼을 얻지 못한다”(9-11절)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고, 우리가 예수 믿는 목적을 알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재림하시고 난 후에 반드시 우리는 주님의 나라, 메시야 왕국에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시면 이미 죽은 자들은 부활체로 바뀌고, 죽지 않은 자들은 홀연히 변화되어 우리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고, 적그리스도를 따르고 섬기고, 우상에게 절하고, 666으로 경제활동을 하고, 경제활동을 위해서 예수님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면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세세토록 밤낮 고난을 받으리니...”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지옥 아닙니까? 이게 예수님 믿지 않으면 지옥간다 라는 말과 같은 말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인내로 믿음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느니라”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12)“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여기서 성도들의 믿음을 먼저 말하지 않고, 성도들의 인내를 먼저 말합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뭐냐?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것” 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사실 믿음을 더 많이 강조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은 맞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잃어 버리기 쉽니다. 오늘 같은 물질시대에 믿음을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마지막 때에 짐승이 다스리는 시대에, 666이 경제활동의 도구가 되는 시대에는 더 그렇습니다. 점점 갈수록 돈 때문에, 직장 때문에, 가정 때문에, 자녀 때문에, 세상의 쾌락 때문에 믿음을 지키기가 더 어렵고, 믿음이 약화되어 가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을 지키는 것은 인내라고 했습니다. 믿음 옆에 인내가 딱 붙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인내와 함께 나란히 가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내를 많이 강조합니다.
(눅8:15)“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눅21:19)“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롬5:3-4)“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히10:36)“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이 외에도 성경에서 인내를 강조하고 있는 말씀이 많습니다. 한 마디로 신앙생활은 잘 참고 견디는 겁니다.
오늘 12절에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인내가 필요하다 라고 합니다.
이 구절과 비슷한 말씀이 12장 17절에 보면 있습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 다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구약을 말합니다. “예수에 대한 믿음” 또는 “예수의 증거“는 신약을 말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두 가지의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는 신약교회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다 같이 믿고 있기 때문에 신약교회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해석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유대인들이고,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든, 저렇게 해석하든 문제는 없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유대인이든 신약의 성도들이든 신구약성경을 믿고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의 계명을 굳게 잡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위에 굳게 서 있지 않으면 다 적그리스도를 섬기고, 그를 따르게 됩니다. 다 666를 받아 적그리스도를 섬기면서 편안하게 경제활동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은 마지막 때 예수님 오시기 직전에는 적그리스도가 거짓선지자와 함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세계를 통치할 것이고, 돈이 최고인 시대가 되고, 경제활동이라는 무기를 앞세워 사람들의 정신과 삶을 빼앗을 것이고, 성도들은 믿음을 지키며 신앙생활하기가 너무 너무 힘들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난시대에는 인내로 믿음을 지켜야 한다 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3절을 읽겠습니다.
(13절)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이 구절의 말씀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면서 외친 후, 이제는 하늘에서 최종적인 결론 형식의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성령님이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성령님이 보증하시는 형식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보증해 주신다는 말을 사도바울도 많이 강조했습니다(고후1:22,고후5:5).
“기록하라”는 말은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기록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꼭 기억해야 되고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마지막 때에는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라고 하십니다. 제가 아버지 돌아가신 후 묘비에 이 구절을 새겨 넣었습니다. 아버지가 6.25전쟁 때, 나이 20살에 북한에서 내려 왔습니다. 나이 20살에 고향, 부모, 형제 떠나와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습니까? 나 자신이 나한테 늘 되물어 보곤 합니다. ‘너 같으면 어떻게 살았겠냐?’ 고향 생각, 부모 생각, 형제 생각에 많이 우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제가 어른이 되어 나이를 한 살 씩 더 먹을수록, 아버지가 고생한 것, 수고한 것이 이해가 되고, 눈물을 글썽일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 가신 후 아버지 고생한 것을 생각하며, 이 구절을 새겨 넣었습니다. “지금 이 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이 구절의 문맥상으로 볼 때, “지금 이후로”는 사도요한이 이 글을 기록할 때인지? 각 성도가 죽는 순간부터인지? 14장 시점인지? 환난의 시작부터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대체로 두 가지 뜻으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환난의 시기가 오기 전에 죽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또 하나는 신약시대 전시대에서 예수님 믿다가 죽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랬던 저랬던 우리 성도는 예수님 믿고, 교회를 섬기다고 주 안에서 죽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복이 있다”는 말을 일곱 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7복이라고 합니다. 7은 완전한 숫자로 완전한 복을 의미합니다. ①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 ②14:13,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다. ③16:15,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 ④19:9,어린양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이 복이 있다. ⑤20:6,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 ⑥22:7,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 ⑦22:14,자기 옷을 빠는 자들은 복이 있다.
이렇게 요한계시록에서는 7복을 말씀하는데, 완전한 복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의 복은 이 땅에서 물질의 복을 받고, 만사형통의 복을 받고, 승리하고, 성공하고.... , 이런 복을 말하고 있지 않지요? 다 주님이 오시는 것과 연결되어 있는 하늘의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으로 살았는 믿음의 증인들이 나옵니다. 아브라함도 그랬고, 모세도 그랬고...., 모든 증인들이 하늘의 복을 바라보고 살았다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나온 본향인 갈대아 우르를 사모했으면 돌아갈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지만, 더 나은 본향, 하늘에 있는 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나그네 같은 인생이지만 인내하며 잘 견디었다고 말씀합니다(히11:15-16).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귀하게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 봄이니라(히11:24-26)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진짜 바른 믿음을 가진 자들은 하늘의 복을 사모하는 자들입니다. 이 땅의 복은 저 하늘의 복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이 땅의 복은 저 하늘의 복이 있으면 자동으로 딸려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에 대해서 말씀한 후, 성령님이 보증해 주시는 음성이 들립니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이 구절을 좀 쉽게 번역해 놓은 새 번역 성경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그렇다. 그들은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이다. 그들이 행한 일이 그들을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일”은 일반적인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핍박을 통과한 수고를 말하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deeds 입니다. 행위들을 말합니다. 헬라어로는 e[rga (에르가) 주격, 복수입니다. “행한 일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은 받지만 믿음과 행위의 일치를 말합니다. 믿음을 인내로, 수고로 지킨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내 힘으로 믿음을 지켜내고, 내 힘으로 믿음과 행위의 일치된 삶을 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단순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잘 살아내기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나는 어떤 인간이며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배우고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항복하고 가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성령님이 우리를 도와 주시는 것이고, 보증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성령이 이르시되”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님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으려는 시도들이 나오는 것이지 단순히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이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이 땅에서 훌륭한 일을 해내고 엄청난 업적을 쌓고 자신의 인격을 수양해서 모든 이에게 존경받는 사람들을 생산해 내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자신의 불가능함을 깨닫고 그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인생에 주인이 되어서 내 인생을 이끌어 가던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사는 게 진짜 행복한 삶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 전적으로 그 분께만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어 내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항복하고 그 분께 순종하게 된 자들의 삶이 변해 가는 것을 ‘거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수고”, “그들의 행한 일” 은 전적으로 성령님이 도와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저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 보려고, 신앙을 지키려고, 참고 견디면서 믿음을 지키고, 수고하고 애를 써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실하게 신앙생활하다 보면 성령님이 도와 주시고, 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복을 받은 자들이요, 터를 닦아 놓은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유리한 고지에 올라 서 있는 것입니다. 오르막을 힘들게 오르게 있는 자에게 뒤에서 조금만 밀어주면 큰 도움이 되고 쉽게 오를 수 있는 것처럼, 성령님은 오늘도 우리의 삶에 찾아 오셔서 밀어 주시는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