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원고/요한계시록

2018,4,15[요한계시록56]진노의 대접과 은혜의 대접(2)

☆ 주님의 머슴 2018. 4. 15. 15:11


주일설교(2018/4/15)-요한계시록(56)

진노의 대접과 은혜의 대접(2)

(16:8-16) 260

============================================================================

우리는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믿음을 지키지 않으면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마귀 사탄은 우리의 믿음을 빼앗아 가려고 호시탐탐 노립니다.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믿음을 지켜야 된다고 강조합니다. 말세가 되면 성도들의 믿음을 빼앗아 가는 것들이 요소 요소에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세상에 휩쓸리고, 나도 모르게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기독교의 신앙과 먼 생활을 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때에는 이 영적싸움이 더 치열해 지는데, 내 힘으로 이길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앞장서서 싸워 이기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빼앗기지 말고, 마귀에게 속아서 마귀의 종 노릇만 하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에 보면, 이 신앙을 지키는 방법을 누구든지 깨어 있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34-5절에도 신앙을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3:4-5)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라고 하십니다.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세상의 즐거움과 쾌락, 세상 문화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구약을 읽어보면, 특히 선지서에서 선지자들이 책망한 것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고, 가나안의 우상을 숭배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도 열심히 섬기고, 우상도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버린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긴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너희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갔다고 책망한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양쪽 다리를 걸쳐 놓는다고 합니다. 교회와 세상, 신앙생활하면서 동시에 세상 문화에 푹 빠져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겁니다. 이것을 성경은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에 빠져 있다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런 신앙은 형식적인 신앙이요, 그 마음에 온전히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올수록 신앙을 지켜야 한다. 신앙의 변질이 오면 안 된다.’ 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나찌의 장군이었던 롬멜을 누가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느냐하면, 독일 사람들이 아니라 영국군이 롬멜을 위대한 장군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대영 제국의 황제의 군대가 한낱 독일군에게 연전연패하고 있을 때 영국군들이 자기들의 열세에 핑계를 대기 위해서 상대 적군의 장수를 영웅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저런 훌륭한 장군 때문에 우리가 졌다라는 좋은 핑계를 만든 것이죠.

 

여러분, 우리는 피 흘리며 싸우다 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을 그런 영웅의 자리에 올려놓고 우리는 안된다. 불가능하다그러면서 성경을 위인전으로 생각하고,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은 우리하고 다르다. 그들은 우리하고 다른 위대한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다하면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내 편한 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5장에서 “(17)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18)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하고는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5:15-18) 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안된다. 우리는 불가능하다라고 하지 말고, ‘기도해라. 병 낫기 위해 기도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죄 사함 받기 위해 기도해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엘리야도 우리하고 똑같이 성정이 같은 사람이지만 기도하니까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 다윗,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등등, 이런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을 존경하고, 찬양만하지 실재로는 그들의 믿음을 닮으려고 전혀 노력도 하지 않는 겁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경에 나오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 우리나라에도 초대교회 때부터 일제 강점기,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핍박을 거치면서 많은 신앙의 선배들을 위인의 자리에 올려놓고 박수만 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100세에 난 아들을 바칠 수 있었을까?’ ‘다윗은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 수 있었을까?’ ‘바울은 어떻게 그런 고난을 견뎌 냈을까?’

 

여러분 성경에 등장하는 분들, 교회사에 나타난 믿음의 위인들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분들이기도 하지만, 우리도 믿음을 지키고, 신앙으로 살아가면, 하나님은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모델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을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축복해 주셨는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8절과 9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16:8-9) “(8) 넷째 천사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9)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

 

이 지구에 해가 너무 뜨겁게 내리 쬡니다. 이것도 자연 재해지요? 이 지구에 살아남을 생명체는 없습니다. 햇빛은 생명을 줍니다.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들은 이 햇빛을 받아 살아 갑니다. 지구와 태양의 거리가 조금만 멀어져도 지구는 얼음으로 뒤덮혀 사람이 살기 어렵고, 생물들은 다 얼어 죽습니다. 반대로 지구가 태양과 조금만 거리가 가까워지면 뜨거워서 살 수 없습니다. 지금도 여름에는 뜨거워서 일사병, 심장병에 쓰러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열대아, 폭염주의보가 내리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대접을 해에 쏟았다는 말은 태양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입니다. 태양의 열기가 더 뜨거워질 수도 있고, 태양과 지구의 거리가 가까워질 수 있겠지요. 과학자들은 태양 플레어 현상즉 태양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폭발현상이 주기적으로 일어나는데, 심할 때는 태양 플레어는 태양의 활동기 때 하루에 몇 번이고 일어나기도 하는데, 태양의 활동은 11년을 주기로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태양 폭발이 더 심해지거나, 계속해서 일어나면 지구에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있겠지요.

 

오늘 9절에서 사람이 태양의 열에 크게 태워진다 라고 하는 것을 보면, 태양의 뜨거운 열기가 이 지구를 태워 생명체가 살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뒷받침해 주는 말씀이 배드로후서 3장에 있는데, 함께 읽어보십시다.

 

(벧후3:10-13)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이렇게 온 지구가 뜨거운 열기로 태워지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살아야 하고, “약속대로 의가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 보면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비방하고, 회개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배운대로 1113절에서 전3년 반 동안에는 두 증인이 활동하면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데, 이 때 지진이 일어나고,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는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께 회개하게 됩니다.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11:13) 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 라고 합니다. 이것은 대접 재앙이 내리는 이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 믿음을 가진 자가 한 사람도 없는 겁니다. 다 적그리스도를 따르고 추종하는 자들, 다 사탄의 물을 먹고 악에 바친 자들만 있는 것을 말합니다. 신실한 성도들이 다 휴거되고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마지막 끝판에는 이 세상이 자기들 세상인 냥, 악한 자들이 판치는 세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든, 이 세상이든 회개가 없다는 것,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 모르고, 세상을 비방하고, 교회를 비방하고, 하나님을 비방하고, 회개를 모르는 것은 벌써 망한 것이고, 벌써 버림받은 것이고, 이제 마지막 심판만 남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넷째 대접의 재앙에서 성도들은 보호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7장에서 미리 당겨서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7:9-17)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16절에 보면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한다 라고 하지요? 하나님이 이렇게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휴거를 통해서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라는 말은 이 지구상에 사는 각 나라 족속, 지역마다, 나라마다 말이 다 다르잖아요? 그래서 방언에서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이방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 중에서 흰 옷 입은 무리는 구원 받은 백성, 신실한 성도들을 말합니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어린양의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휴거한 백성들입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대접 재앙의 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장막으로 덮여진 성도들은 전혀 해를 입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들은 휴거된 백성들입니다. 마지막 재앙인 대접 재앙이 내리기 전에 이들은 휴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71-8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인침을 받은 십사만 사천명 이야기가 나옵니다. 함께 찾아 읽어 보십시다.

(7:1-8)

“(1)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2)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3)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4)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5) 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6)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8)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1절에도 이 일 후에, 9절에도 이 일 후에 라는 말이 있지요? 이 말은 장면이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같은 사건이 아니고 다른 사건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7장 한 장 안에 유대인들이 구원 받는 이야기이방인들이 구원 받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구원 받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한다. 이들은 뒤늦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게 됩니다. 이들은 성도들이 휴거하는 것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 대접 환난을 앞두고 피난처에 들어가 보호를 받게 됩니다.

 

1213-14절에 이렇게 설명합니다.

(12:13-14) “(13)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박해하는지라 (14)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피난처에 들어가 보호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마지막 때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는 자들이 피난처에 들어가 보호를 받을 것을 예표로 보여 준 사건이 이미 출애굽 사건 때 있었습니다.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이 내릴 때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께서 구별해 놓으신 땅 고센 땅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센 땅은 피난처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 다음 10절과 11절을 보시지요. 다섯 번째 대접입니다.

(16:10-11) “(10) 또 다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11)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다섯 번째 대접이 짐승의 보좌에 쏟아지니까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집니다. 이 재앙은 애굽의 아홉 번째 재앙과 흡사하지요? 다섯 번째 대접이 쏟아지자 사단의 나라가 어두워집니다.

짐승의 왕좌 적그리스도의 본부를 말합니다. 이 적그리스도의 본부는 7년 대환난기 때에 만들어진 바벨론 성읍을 말합니다. 세계 무역의 중심이요, 종교, 정치, 경제, 군사, 모든 악의 중심지입니다.

 

1619절에 보면 적그리스도의 본부를 큰 성 바벨론이라고 했고, 175절에는 큰 바벨론,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 라고 했습니다. 182절에는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 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적그리스도의 본부는 각종 더러운 죄악을 만들어 내는 곳입니다. 다섯 번째 대접은 이곳을 심판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곳을 어둡게 해 버립니다. 어둠은 죽음을 말하고, 절망을 말합니다. 어둠은 생명이 살 수 없습니다. 계속되는 어둠은 각종 질병을 창궐하게 합니다. 삶이 고통스럽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11절에는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비방한다라고 했습니다.

 

아픈 것, povno"(포노스), 수고, 아픔, 고통 정신적 고통, 영적인 고통입니다.

종기”, e{lko"(헬코스), 헌데, 종기, 종양, 곪은 상처 육체적인 질병입니다.

정신적인 고통과 육신적인 질병을 함께 겪는 것입니다. 이것은 2절에서 첫 번째 대접 재앙에서 악하고 독한 종기가 생겼다고 했는데, 그것이 없어지지 않고, 계속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내린 재앙은 한 재앙이 끝나고 다른 재앙이 나옵니다. 모세가 기도함으로 그 재앙이 끝납니다. 그래도 바로가 이스라엘백성들을 보내주지 않으면 다른 재앙을 내립니다. 이렇게 한 재앙이 끝나고 다른 재앙이 내리지요? 그런데 계시록의 일곱 재앙은 다 같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재앙이 내리고, 그 위에 두 번째 재앙이 내리고, 또 그 위에 세 번째 재앙이 내리는 것입니다. 오늘 16장의 대접 재앙도 마찬가지로 앞의 재앙이 없어지고, 다음 재앙이 오는 것이 아니고, 계속 그 위에 또 다른 재앙이 얹어지는 형식입니다. 그러니까 일곱 가지 재앙이 겹쳐지고 쌓이는 재앙입니다. 일곱 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이지요? 완전한 재앙입니다.

 

그리고 9절의 네 번째 대접 재앙과 같이 11절에서 다섯 번째 재앙 때도 회개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회개가 없다는 말은 완전히 버림받았다는 말이고, 최악의 상태가 끝판까지 와 있다는 말입니다. 9절과 11절에서 회개가 없고, 하나님을 비방한다는 것을 두 번 반복하는 것은 신실한 성도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저주 받은 곳, 희망, 소망이 하나도 없는 곳, 절망이 있는 곳, 고통당하는 곳을 어둠이라고 표현합니다.

성경은 사단의 나라를 어두움, 흑암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영원한 흑암 속으로 던져지게 될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지금도 칠 흙 같은 어두움 속에서 눈이 멀어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저주받을 자들을 그대로 그 흑암 속에 놔두시는 것입니다.

 

이곳에는 회개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재앙들은 회개를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회개시키기 위해서 재앙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재앙이 있고, 고난이 있고, 고통이 있고, 문제가 많이 생기고, 어려움이 자꾸 오면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죄악에 묻혀 있는 자, 강퍅한 자, 영적 눈이 어두워 있는 자는 회개를 하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세상은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한 재앙들이 자기들에게 임하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에 전쟁이나 기근이나 질병이나 자연재해 같은 물리적인 고통을 허락하시거나 아니면 그들의 죄악 된 삶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자초하는 정신적인 불안함이나 피폐함이 오게 될 때 죄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데, 회개의 자리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흑암 속에서 이 세상의 힘으로 그 문제들을 해결해 보려고 애를 쓴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 삶 자체가 지옥입니다. 하나님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몸부림 자체가 지옥과 다름없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들은 눈이 멀어 있기 때문에 그 지옥 같은 삶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고 만족과 행복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날 때부터 소경 된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눈을 뜬것처럼 밝히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가던 길에서 완전히 돌이켜 회개를 한 것입니다. 회개라는 단어의 의미는 유턴이라는 의미입니다. ‘돌아서서 고치다가 회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불같은 저주의 대접이지만 우리에게는 회개의 촉매가 되며 우리의 거룩을 완성하는 은혜의 대접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그러한 진노의 대접들이 나타나고 진노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여러분은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대접 재앙이 쏟아질 수 있기 때문에 빨리 회개하고, 깨달아 알고,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 와야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 때에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이 내려질 때, 고센 땅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 어떤 상태에 있었을까? 어떤 마음이었을까? 무엇을 했을까? 재앙이 하나씩 하나씩 진행될 때마다 그들은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겸손이 지켜보며 기다렸을 겁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바로는 언제 항복할까? 궁금해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기대를 걸고, 기다렸을 겁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신기했을 겁니다. 같은 애굽 안에 사는데도 고센 땅에는 재앙이 내리지 않는 것이 신기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진정한 축복이 뭔지를 깨달았을 겁니다. 진노의 대접 재앙이 바로 오늘 우리 믿는 자들에게 은혜요, 축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우리에게 오는 고통과 어려움과 문제들이 도리어 큰 은혜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