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4,22 [요한계시록57]아마겟돈 전쟁
주일설교(2018/4/22)-요한계시록(57)
아마겟돈 전쟁
(계16:12-16)
35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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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요한계시록을 배우고 있습니다. 기독교역사에 한 때는 요한계시록을 무시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이상한 책으로 취급해 버리기도 했습니다. 종교적인 몽상가들이 보는 책 정도로 취급해 버렸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계시록을 공부하면 다른 사람이 미친 사람처럼 보이든가 아니면 자기가 미치든가 그 둘 중에 하나”라고 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종교개혁자인 루터는 요한계시록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고, 칼빈도 요한계시록을 설교하지도 않았고, 주석을 쓰지도 않았습니다. 쯔빙글리도 요한계시록을 비판하면서 “요한계시록은 성경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흥미도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한국의 장로교회에서는 요한계시록을 설교하지도 않았고, 은근히 무시해 왔습니다. 그러는 사이 우리 한국의 이단들은 요한계시록을 자기들 입맛에 맞추어 풀면서 사람들을 현혹시켜 한국의 장로교에서 많은 이단들도 생겼지만, 많은 선량한 성도들이 이단에 빠져 들었습니다. 오늘날 현존하고 있는 이단들은 모두 이 요한계시록으로 한국교회의 성도들을 현혹해서 재미를 보았고, 이단교리를 만들고, 이단집단을 키워 왔습니다. 모든 이단들의 밑바탕에는 이 요한계시록을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교회들이 이 요한계시록을 설교하면 혹시 이단이 아닌가 라고 색안경을 끼고 보면서 의심하게 합니다. 언제가 어떤 부인이 우리 교회에 예배드리러 와서 요한계시록을 설교하기 전에 그 준비 과정으로 다니엘서를 설교했는데, 요한계시록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니엘서를 이해해야 요한계시록을 이해할 수 있는데, 그래서 요한계시록과 연결시켜서 다니엘서를 그림을 띄워 놓고 설교를 하려고 다니엘서의 그림을 프로젝트에 띄우는 순간 바로 설교를 들어 보지도 않고, 가방 들고 나가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속으로 그 분도 “우리교회가 이단이구나!” 라고 생각하고 나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우리 한국의 이단들은 모두 요한계시록으로 출발했고, 성도들을 현혹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의 목사님들은 “어느 교회를 가던 요한계시록을 설교하면 조심해라” 라고 가르치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교회도 요한계시록을 설교하기 때문에 이단이 될 수도 있지요?(ㅎㅎㅎ)
우리 한국의 장로교회들이 이 요한계시록을 정통적인 신학으로 바로 가르쳤더라면 우리 한국에 이단들이 이만큼 창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대부분의 교회들은 이 요한계시록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말세다. 마지막 때이다. 예수님 오실 때가 가까웠다.’ 라고 하면서도 정작 요한계시록을 설교하기를 꺼립니다.
여러분, 요한계시록을 무조건 무시하면 안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왜 하나님이 성경 66권 속에 제일 마지막에 이 요한계시록을 넣어 놓으셨을까?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다’ 라고 하면서도 왜 마지막에 있는 요한계시록은 무시하는 겁니까? 성경에 요한계시록이 들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고자하는 말씀이 들어 있는 거지요.
성경을 일일이 한 자 한 자 기록하신 것도 하나님이시지만,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책별로 배열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인위적으로 성경의 책들을 빼 버리거나, 인위적으로 순서를 바꾸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천지창조, 출발을 말씀하고 있고, 계시록은 마지막을 말하면서 다시 도래할 메시야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목회의 마지막 종점을 바라보면서 성도들이 이 요한계시록을 몰라서, 이 요한계시록과 종말사상으로 접근해 오는 이단들에게 현혹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요한계시록을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신앙을 세워 나가고, 이단들에게 현혹되거나 세상의 삶으로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요한계시록에는 세 종류의 재앙이 나오지요? 첫 번째가 인 재앙, 두 번째가 나팔재앙, 세 번째가 대접재앙입니다. 세 종류의 재앙들은 일곱 개씩 되어 있습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로 완전한 재앙을 말합니다. 인 재앙과 나팔재앙은 이 땅에 사는 우리 성도들도 다 같이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오는 재앙부터 인간이 잘못해서 오는 재앙까지 이 땅에 사는 성도들도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 종류의 재앙들은 다같이 연장선상에 있다고 했습니다. 인 재앙이나, 나팔재앙이나, 대접재앙이나 별도로 따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자연재앙들이 일어나잖습니까? 쓰나미가 온다든가, 태풍이 온다든가, 지진이 일어난다든가, 화산이 폭발한다든가, 전염병이 일어나나든가, 다 이 세 종류의 재앙들과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6장에 나오는 인 재앙도 수 천 년 전에부터 그 연장선상에서 일어났던 재앙들입니다. 8,9장에 나오는 나팔재앙도 인 재앙과 연결되어 그 연장선상에서 일어나는 재앙들입니다. 오늘 배우는 16장의 대접재앙도 앞의 재앙들과 함께 연장선상에 있는 재앙들입니다.
그런데 이 재앙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시대가 흘러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올수록 점점 더 확대되고 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대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재앙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점진적이고, 더 반복적이고, 점점 더 확대되어 가는 형태를 갖추고 있다고 했지요?
그래서 우리 성도는 인 재앙이든, 나팔재앙이든 이 땅에 나타나는 재앙들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경고요, 징조로 보라고 했습니다. 앞으로 되어 질 일들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보고, 우리가 항상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대접재앙은 마지막 재앙입니다. 7년 환난기 마지막 때 일어나는 재앙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성도들을 다 휴거시키신 후 사탄의 무리, 즉 적그리스도의 무리들을 없애는 재앙입니다.
사실 이 땅에 신실한 성도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9절과 11절에 보면 재앙이 내릴 때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9절).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11절) 라고 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의 마지막 모습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비방하고 회개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성도들이 없다는 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믿음이 신통찮았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구원 시키는 장면이 창세기 19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19장 22절에 보면 “롯의 식구가 소돔성을 빠져 나와 완전히 피신하기 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가 없노라.” 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마지막 때에 우리 성도들이 구원받는 모습을 예표로 보여 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설교하는 분들이 이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성도들을 겁주는 도구로 사용하면 안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을 겁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마지막 재앙인 대접재앙 때 우리 성도들도 다 통과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특별하게 뽑아 택한 사람들만을 위해 광야의 피난처에서 안전하게 보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난처에 다 들어가야 한다고 하면서, 우리만 다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피난처에는 소수의 무리만 들어가는데, 우리만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단들이 좋아하는 찬송가가 있지요?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오라.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 위에 넘치니 두렵잖네.”(70장)
여러분, 믿음에 변질이 오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처음 믿을 때 가졌던 그 순수한 믿음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도 처음 믿음, 첫 은혜를 굳게 잡으라고 했습니다.
어떤 이단들은 휴거하는 것도 우리만 휴거한다는 겁니다. 소수의 무리만 휴거한다는 겁니다. 어떤 이단은 십사만 사천만 휴거한다는 겁니다. 아주 작은 소수의 무리만 휴거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만 휴거한다. 그러니 우리에게 오라는 겁니다. 이게 다 거짓말이지요? 여기에 현혹되면 안됩니다.
7장 9절에 보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와 어린 양 앞에서” 찬양을 합니다. 이 모두가 이 땅에서 예수님 믿고 구원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 보좌 앞, 불 타는 유리 바닷가에서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자들입니다.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소수의 무리가 아니잖아요? o[clo" poluv"(오클로스 폴뤼스) 는 오늘 우리 말로 “억수로 많은” 이런 뜻입니다. 이 말 속에는 “믿는 모든 무리들” 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변질이 오지 말고, 첫 은혜, 처음 믿음을 굳게 가지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이제 12절을 함께 읽으십시다.
“또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더라”
여섯 번째 대접이 큰 강 유브라데에 쏟아지니까 강물이 말라버립니다. 이 구절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에서 이 유브라데 강이 어떤 지정학적 위치를 갖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창15: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언약을 하시는 장면입니다. 그 가나안 땅의 북 쪽 경계가 바로 유브라데 강입니다. 그 유브라데 강 너머에서 걸핏하면 이스라엘을 공격해서 결국 이스라엘을 망하게 만든 두 나라가 있지요? 바벨론과 앗수르입니다. 바벨론은 요한계시록에도 계속해서 악의 세력을 상징하는 나라로 등장하지요?
북 이스라엘은 BC722년에 앗수르에게 망했고 남 유대는 BC586년에 바벨론에게 망했습니다. 그렇게 그 큰 강 유브라데는 이스라엘과 대적들과의 경계와 전선(戰線)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유브라데 강이 마르고 동방으로부터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 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과 그 대적들과의 전쟁이 있을 것임을 예고하는 장면인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여러 곳에 ‘강이 마르고 물이 마른다.’는 구절이 등장합니다.(렘50:37-40, 51:36-37)
하나님께서 악의 상징인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하시면서 그들의 멸망을 ‘강과 물과 바다를 말리운다’라는 말로 표현을 하십니다. 그러나 이 ‘강과 물과 바다를 말리운다’라는 구절은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는 바다와 강이 말랐던 때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사건으로 ‘이스라엘’이 절대 잊지 못할 그 사건이 뭡니까? 홍해와 요단강이 말라서 마른땅이 된 사건이지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출애굽할 때 홍해를 마르게 하고, 요단강을 건널 때 강이 말랐습니다.
이렇게 구약 성경에서 ‘강이 마르고 물이 마른다.’는 구절은 거의 대 부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대적들을 모두 심판해서 전멸시키시고 그 분의 백성들을 안전하게 구해 내시는 사건을 묘사할 때 ‘강이 마르고 물이 마른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에 홍해가 육지 같이 열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멸시키기 위해서 애굽 군대도 함께 건너게 되지요? 그러나 결국 애굽 군대는 홍해가 합쳐지면서 다 빠져 죽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유브라데 강이 마르니까, 동방의 왕들이 몰려 옵니다. 결국 어떻게 되겠어요? 결국 다 죽게 되겠지요? 그래서 이 유브라데 강이 마른다는 말 속에는 이스라엘은 구원 받고, 동방의 왕들은 멸망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점령하지 못하고, 적그리스도의 세력권 안에 넣지 못한 지역이 있는데,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이스라엘을 완전히 통치하고 예루살렘을 완전히 장악하면 세계를 다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 이라고 하는 것은 북쪽 유브라데 강을 건너오는 전 세계의 적그리스도의 세력들 전체를 표현하는 적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과 적그리스도세력이 대 격돌할 것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13절과 14절을 보세요.
(계16:13-14) “(13)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14)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13절을 보시면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사탄의 삼위일체가 등장합니다. “용, 짐승, 거짓 선지자”입니다. “용”은 12장에 나오는 붉은 용이지요. 이게 사탄입니다. “짐승”은 13장에 나오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지요. 적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13장11절에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지요. 적그리스도를 돕는 자입니다. 여기서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용에게 능력을 받아 용을 위해서 일합니다. 마지막 때에 이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사탄의 삼위일체입니다.
그들의 입에서 더러운 세 영이 나와서 온 천하 임금들을 미혹해서 하나님을 대적해서 전쟁을 하자고 부추깁니다. 14절 보시면 그 더러운 영은 “귀신의 영”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라고 합니다. 더러운 영이 입에서 나옵니다. 입은 말하는 기관이며, 언어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주는 무기입니다. “영”(spirit) 이란 말의 원어는 “프뉴마”(pneuma)이고, 프뉴마는 헬라어로 호흡(breath)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말이지만, 그 말에는 악한 영을 실고 나오는 것입니다. 온 세상에 악한 말, 현혹하는 말, 나쁜 말, 없는 말, 거짓말을 퍼뜨립니다.
그렇게 해서 온 천하의 왕들을 모읍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마겟돈 전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더러운 마귀와 하나님과의 전쟁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14절 후반부에 보시면 그 전쟁은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치러질 전쟁’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하나님의 군대와 한 판의 전쟁이 있을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되겠어요? 앞에서 말씀한 것과 같이 애굽 군대가 홍해에서 다 멸절당한 것처럼 결국 하나님이 이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일곱 재앙에서 공부한 내용처럼 세상은 자기들이 꽤 강한 것처럼 거들먹거리며 하나님을 대적하여 악을 행하며 죄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적까지 행하면서 하나님께 칼을 들이대고 있는 것 같지만 그들은 결국 그 죄와 악을 완전하게 심판하실 ‘전능하신 하나님의 큰 날’을 재촉하는 어리석은 전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15절을 보십시다.
(계16:15)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바로 앞에 14절에서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 에 대해 이야기를 한 후에 15절에서 “바로 그 날, 내가 도적같이 임해서 세상을 끝내버리겠다” 라는 말씀입니다. “도둑 같이 임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재림을 말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이날을 항상 준비해 있으라는 말입니다. 이 날을 준비하는 방법이 뭡니까?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이와 비슷한 말씀을 많이 합니다. “흰옷을 더럽히지 아니했다” “옷을 지켰다” “어린 양의 피에 자기 옷을 씻었다” 이런 표현들은 믿음을 지켰다. 신앙을 지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15절의 이 말씀은 후3년 반 마지막 때에 이 땅에 남아 있는 성도들에게 말씀하는 것이 아니고, 이 때는 신실한 성도들이 없다고 했지요? 다 휴거되고 없습니다. 이 15절의 말씀은 이 요한계시록을 읽는 독자들에게 “그러므로 예수님이 재림해 오셔서 사탄의 세력을 다 멸해 버릴 텐데 그 때까지 신앙을 지켜라. 신앙의 변질이 오면 안된다” 라고 경고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라는 말은 세상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날을 위해 깨어 있어 옷을 더럽히지 말고, 믿음을 굳게 지키라” 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믿어야 하는 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16절을 보십시다.
(계16:16)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여기서 아마겟돈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의 히브리 원어는 ‘할-마겟돈’입니다. 히브리어 ‘하르’는 ‘언덕, 산’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마겟돈’은 ‘므깃도 산, 므깃도 언덕’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므깃도’라는 곳은 ‘전쟁’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므깃도 지역은 이스르엘 평원에 있는 가로 14마일 세로 20마일의 평평한 땅입니다. 전쟁을 치르기에는 아주 안성맞춤인 곳이지요. 요즘은 ‘전쟁’하면 흔히 전략과 전술을 동원한 게릴라 전 같은 것을 쉽게 떠 올리지만 옛 날에는 전쟁을 할 때 넓은 평원에서 양쪽 군대가 모두 정열을 하고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장수들이 먼저 싸우거나 아니면 쌍 방이 일제히 한 곳에서 정정당당하게 격투를 하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런 전쟁의 양상은 미국 독립 전쟁 때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독립 전쟁 때도 영국 군대와 미국 군대가 넓은 평원에서 마주 보고 정렬을 하고 서서 상대방을 향해 총을 한 방씩 쏘다가 결국 육박전으로 끝을 내는 그런 전쟁을 했었습니다. 군인들이 엎드려서 총을 쏘기 시작한 것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런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넓은 평원이 필요하지요? 거기에 안성맞춤인 곳이 바로 므깃도 평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치렀던 전쟁 중에 200회 이상이 이 므깃도에서 벌어졌습니다.
가나안 군대가 보무도 당당히 이스라엘을 치러 왔다가 패배하고 돌아 간 곳도 바로 므깃도입니다. 그리고 애굽 왕 바로 느고가 유대의 요시야 왕을 죽인 곳도 므깃도입니다.
오죽하면 나폴레옹도 세계지도를 펴 놓고 세계에서 가장 전쟁하기 좋은 곳으로 그 므깃도 평원을 꼽았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므깃도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쟁을 떠올리게 하는 지명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므깃도 평야가 아니고 므깃도 산인가? 성경은 마지막 심판의 전쟁을 묘사 할 때 그 전쟁이 ‘이스라엘 산’에서 일어난다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겔38:8,39:1-5)
그리고 에스겔서에도 “곡과 마곡의 전쟁” 에서도 이스라엘 산에서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이스라엘 산이 바로 “므깃도 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므깃도 평원에 진짜 산이 하나 있는데, 그 산 이름이 갈멜 산입니다. 그 갈멜 산에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가 하나님의 종 엘리야와 결전을 벌이다가 모두 몰살당한 곳이 바로 갈멜 산, 므깃도의 산, 아마겟돈입니다.(왕상18:40)
엘리야가 거짓 선지자 850명을 갈멜산(므깃도 산)에서 물리치고 기손 시내에 데려다가 전부 목을 쳐버립니다. 이 기손 시내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므깃도 시내’라고 불렀습니다.
이 내용을 오늘 본문과 연결을 시켜 보세요. 오늘 본문에서 개구리 같은 더러운 영이 누구의 입에서 나왔습니까?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왔었지요? 그들이 아마겟돈으로 온 천하의 왕들을 모아서 전쟁을 준비합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겠어요? 결과가 뻔하잖아요?
갈멜산, 므깃도 산에서도 엘리야와 거짓 선지자 850명이 싸웠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됐습니까? 몰살당했지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은 반드시 이긴다. 출애굽 때에 홍해를 말리어서 하나님이 이겼고, 갈멜산에서도 하나님이 이겼다. 그러므로 앞으로 마지막 때에도 하나님이 이기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마겟돈 전쟁은 오늘 우리 성도들이 주님이 재림해 오실 때까지 영적인 아마겟돈 전쟁이 늘 있을 것을 예언하고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땅을 살면서 항상 영적인 ‘아마겟돈 전쟁’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성도라면 이 영적인 아마겟돈이 있습니다. 만약에 나에게 영적인 아마겟돈이 없다면, 평안하게 영적전쟁이 없이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진짜 성도인지 의심을 해 봐야 합니다.
갈멜산에서 여호와 선지자는 엘리야 혼자, 바알 선지자는 450명, 아세라 선지자는 400명 도합 850명, 1대 850, 싸워서 누가 이겼습니까? 엘리야가 이겼잖습니까?
아마겟돈 전쟁도 누구가 이기겠습니까? 하나님이 이기시는 겁니다. 우리가 이 시대를 살면서 하나님 말씀에 붙잡혀 있고, 신앙의 변질만 오지 않으면 결국 내가 이긴다는 것입니다. 내가 힘이 있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고, 내가 믿음만 굳게 지키고 있으면, 큰 유브라데강을 마르게 하시는 그 분이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은 말씀 붙잡고, 믿음의 변질이 오지 않도록 신앙을 굳게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장 서신 예수님이 입에서 나오는 검으로 이기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강물을 마르게 하신 사건마다 하나님이 다 이기셨잖습니까? 그 마른 강으로 수 많은 동방의 왕들이 쳐들어 와도 결국 다 그들은 죽고 하나님은 이기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믿음을 굳게 지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