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원고/요한계시록

2018,8,12,[요한계시록70]최후의 전쟁

☆ 주님의 머슴 2018. 8. 12. 15:53

주일설교(2018/8/12)-요한계시록(70)

최후의 전쟁

20:7-10                                               

===========================================================================

요한계시록을 상징적으로만 해석하는 분들이 있고, 역사적으로만 해석하는 분들도 있고, 미래적으로만 해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문자 그대로만 받아 들여야 된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할 부분은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상징적으로 보아야 할 부분은 상징적으로 보아야 하고, 그리고 역사적이고, 미래적으로 보아야 옳다 라고 봅니다. 기독교의 역사에 일어났던 일들과 함께 연결해서 보아야 하고,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많이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에 미래적으로도 동시에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1절에서 사도요한이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에 미래적으로도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에서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이라고 했고, 2212절에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했고, 2220절에도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끝 맸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된 책이기 때문에 미래에 되어 질 일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미래적으로 해석하고 보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전체를 이 땅의 우리가 사는 역사와는 아무 상관없는 완전한 상징으로만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면 안됩니다. 상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에덴동산도 상징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냥 그런 상징적인 묘사들을 통해 우리가 받을 교훈만 받으면 된다는 식의 해석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그런 것을 좋아하지요.

 

요한 계시록을 어떤 것은 상징으로 보아야 하는 것은 바다에서 용이 나온다든지, 그 용이 열 뿔이 달려 있다든지 하는 것은 상징이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사건은 실제로 역사적이요, 미래에 나타날 일들입니다. 앞으로 성도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즉 계시록에 나오는 아마겟돈 전쟁이라든지 곡과 마곡의 전쟁은 상징적인 단어들로 표현이 되었지만, 있지도 않을 사건을 설화로 꾸며서 교훈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미래에 반드시 대 전쟁이 일어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앞으로 아마겟돈 전쟁과 최후의 전쟁은 없는 것이냐? 아니지요. 성경이 이야기하는 대로 점점 더 심한 공격과 고통이 우리에게 닥칠 것입니다. 그리고 최후에 엄청난 마귀의 발악이 있겠지요. 그 모든 것을 다 종합해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적그리스도나 거짓 선지자도 판치는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자적으로, 상징적으로, 미래적인 눈으로 요한계시록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7-10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고 합니다.

 

곡과 마곡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마곡은 노아의 손자요, 야벳의 아들로 나옵니다(10:2).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메섹과 디라스요.” 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몇 사람의 이름이 에스겔 382절에도 함께 나옵니다. “너는 마곡 땅에 있는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곧 곡에게로 얼굴을 향하고라고 했습니다.

 

곡과 마곡은 이스라엘 동북쪽에 자리 잡은 강대국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궁극적인 환난을 가져오는 민족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마겟돈 전쟁(16:16, 19:19-21)곡과 마곡의 전쟁을 흡사하게 닮았습니다. 그래서 같은 전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다릅니다. 우선 시기적으로 아마겟돈 전쟁은 천년왕국 이전에 일어나는 것이고, 곡과 마곡의 전쟁은 이 후에 일어나는 전쟁입니다. 그리고 그 우두머리들은 아마겟돈 전쟁에서는 사탄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그의 휘하에 있는 짐승(적그리스도)과 땅의 임금들이었지만, 곡과 마곡의 전쟁에서는 사탄이 직접 지휘합니다.

 

7절에서 천 년이 차매라는 말은 천 년 간의 축복의 시기가 끝을 고하고, 세상은 다시 혼란의 시대가 온다는 뜻입니다. 사탄이 옥에서 놓여 나오니까, 다시 세상은 흑암의 권세에 잡히고, 혼란스러워 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상당한 의문을 남기는 부분입니다. 천 년의 복락을 주신 하나님께서 왜 사단을 풀어서 문제를 일으키게 하시는가? 혹은 천년왕국에 참여한 백성 중에도 미혹되어 멸망에 들어갈 자도 있는가 하는 등의 의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렇다면 그렇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신령한 관점에서 보면 또 귀한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경험한 후에는 또 한 번의 온전케 하시는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곡과 마곡을 미혹한다고 했습니다. 마곡은 나라요 곡은 그 땅을 통치하는 왕입니다(38:2). 곡과 마곡은 에스겔 38장과 39장을 배경으로 해서 나온 개념으로 인류 최후의 전쟁입니다. 곡은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을 지칭하며, 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반역의 뜻을 품었으며 이스라엘의 대적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서에서는 북방으로 나오지만, 여기서는 땅의 사방 백성으로 나옴으로 좀 더 발전된 개념입니다. 곡과 마곡이라는 용어만 같을 뿐 에스겔의 사건과 오늘 본문의 말씀을 비교해 보면 완전히 다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곡과 마곡은 에스겔 38, 39장에서 인용해 온 용어이지만, 마지막 최후의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대적할 큰 무리를 상징하는 용어입니다. 사탄 마귀가 최후에 또 한 번 발악하면서 하나님을 대항할 큰 무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년왕국 때에 번성할 대적자들이요, 최종의 적그리스도의 국가이며, 대개 악의 세력의 상징이요, 세계 열방이요, 기독교에 대항하는 세상의 최종적 항거요, 특정국가나 민족이 아닌 악한 세계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곡과 마곡의 침략은 에스겔 38-39장에 나타나듯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들의 원수를 온전히 멸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점입니다.

 

그럼 이란 무엇일까요? 70인역 성경에는 민24:7아각자리에 을 집어넣었고, 7:1보라 곡 왕은 황충이다라고 번역하고 있고, 일부 학자들은 곡을 수메르의 구그’(어두움)와 연관시켜 악의 의인화된 표현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아각 사람 하만과 흡사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없애려는 악랄한 모습을 상징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여기 곡과 마곡은 신령한 의미에서 영적으로 아직도 처리해야 할 최종의 죄악의 잔재를 암시하기도 합니다. 그 동안 십자가의 공로로 죄악의 잔재가 처리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온갖 아름다운 열매와 희생과 충성과 사랑과 겸손과 순종 등 철저한 신앙훈련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기 성도들의 진사랑하시는 성이라 한 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 용어는 특별한 거룩과 특별한 사랑이 함축되어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포기할 수 없고, 하나님이 버릴 수 없는 특별하신 사랑이 담겨 있는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희생적인 참 사랑을 형성시키고자 하심입니다. 그리고 천년왕국의 축복을 누리게 하신 후에 이 과정을 주시듯 지극한 은혜를 경험케 하신 후에 이런 과정이 있음을 암시해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기 곡과 마곡의 영적 배경을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현장, 성도들의 고난의 현장임을 보여줍니다. 본문 8-9절을 보시면, 이 고난의 환경은 그 세력이 막강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으신 것처럼, 본문의 사탄의 세력이 얼마나 강하고 치밀한지 그들을 땅의 사방 백성으로 모아 연합전선을 폅니다. 그리고 수효가 얼마나 많은지 지면에 널리 퍼져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다했고, 그 작전은 성공적으로 진행됩니다. 이에 맞서 성도들의 군대도 나와서 진을 치지만 애석하게도 성도들의 진사랑하시는 성까지 완전 포위를 당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원수들의 세력이 압도적이었던 것처럼 어둡고 암담한 상황입니다.

 

마치 시편 22편을 연상케 하는 장면입니다.

“(1)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11)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19)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22:1-19). “성도들의 진사랑하시는 성이 처해 있는 모습이 이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허락하신 바가 되었기에 원수들의 일시적인 승승장구가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인격 훈련, 신앙의 훈련도 필요함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고 억울하고 수치스럽고 하나님도 돕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침묵하시는 것 같고 돕는 자들도 없습니다. 마치 억울한 누명을 받아 착고에 차여 지하의 깊은 감옥에 갇힌 요셉처럼 암담하기 그지없습니다(105:19). 의인이 왜 고난을 받는가 하는 숙제도 생겨납니다.

 

그러나 이 과정이 어떠한 과정인줄 알면 문제는 쉬워집니다. 하나님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벧전2:19-20“(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하면서 21절에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진리를 알지 못할 때는 하나님 영광을 가린다는 생각에 무고한 고난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그 환경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합당하게 여기고 안심하며 고난 받기를 오히려 소원합니다.

 

그런데 곡과 마곡이 포위하여 절명의 위기에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 원수들을 소멸하고 또 저희를 미혹하던 마귀까지도 불과 유황 못에 던지십니다. 마치 유다인들이 하만의 궤계로 절명의 위기에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극적으로 도우사 하만과 그 민족을 멸하심과 같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을 기뻐하는 수준에 이를 때 하나님의 불길과 같은 사랑과 상상치 못할 강력한 붙드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0절에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라고 하십니다. 1920절에도 보면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미리 잡혀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우리의 영원한 원수요, 지옥은 사탄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졸개들을 가두려고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과 그 무리들을 따르고, 사탄을 이롭게 한 자들은 결국 다 이 무저갱에 함께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 땅에서 오는 고난과 여러 가지 환난이나 시험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삶으로 보고, 훈련으로 삼고, 참고 견디고 이겨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이 있고 난 후에도 그 동안 은혜 아래 평강을 누리며 살아도 하나님은 믿음의 시험을 통과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에게도 은혜 아래에 있고, 구원 받았고, 믿음으로 살지만 인격의 훈련을 위해, 영적 싸움의 승리를 위해, 신앙생활의 훈련을 위해 고난도 있고, 환난의 시험을 통과하게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통치 기간인 천년왕국이 끝날 때가 되면, 무저갱에 갇혀 있던 사탄이 그 옥에서 잠시 놓여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울 무리를 미혹하여 모은다는 것입니다. 이 때 천년왕국에 참여한 1세대는 이미 7년 대환난을 통해 믿음의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천년 동안의 은혜 아래 살다가 보니 믿음에 변질이 온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그리고 이 후에 세대들은 믿음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곡과 마곡의 전쟁을 통해 십자가의 고난을 겪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탄의 미혹을 받아 곡과 마곡의 무리의 편에 속하여 한 편이 되어 버리는 자들이 있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년왕국 끝에 알곡과 가라지를 똑 한번 걸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에 열 가지 재앙도 보았고, 홍해를 갈라 육지 같이 건넜고, 애굽의 군대가 바다에 빠져 몰살당하는 것을 보았고, 여러 가지 기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시는 것을 체험했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합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끌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차라리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우리가 다른 지도자를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 애굽의 바로를 섬기는 것이 낫겠다.” 여러 가지로 원망하면서 하나님과 모세를 대적한 것을 우리는 알지 않습니까? 만약에 이 때에 애굽의 바로가 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왔다면 많은 사람들이 바로의 군대 편에 붙어서 모세를 대항하는 변절자들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이 곡과 마곡의 전쟁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야 하는 순간에 이와 같은 자들을 또 한 번 걸러내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 전체의 흐름을 보면, 중간 중간에 사탄이 성도들과 싸워서 이긴다는 말이나, 땅의 왕들을 미혹해서 군대를 모은다는 말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분명 사탄은 철저하게 패배하고 결박당하여 무력한 존재가 될 것인데도, 또 다른 측면에서는 성도들과 싸워 이기고(13:7),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순처럼 보이는 문제에 대해서 사탄의 이중적 측면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차 말씀드린 대로 이러한 사탄의 공격은 우리 성도들의 구원을 궁극적으로 방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결코 제지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단에게 성도들을 공격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단의 발악은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거룩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분명 전쟁은 실재하고 있고 실재했으며 실재할 것이라는 것이지요. 요한계시록에서는 계속해서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지요? 우리가 이미 앞에서 계속 공부한 부분이지만, 역사 속에 여러 가지 많은 전쟁이 있었는 것처럼, 앞으로 미래에도 여러 가지 전쟁들이 계속 일어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는 대단한 또 한번의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결국에는 마지막 결전의 날이 있겠지만 우리는 그 전쟁의 연장선상에서 끊임없이 작은 전쟁들을 치루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신앙생활하는 데서 오는 영적전쟁을 치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통해 깨달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그 전쟁에 승리하게 될 것이고, 마지막 최후의 전쟁도 반드시 승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계속 승리하신다면 우리에게 있는 작은 전쟁, 즉 우리의 믿음을 약화시키려고 하는 영적전쟁,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세상의 물질과 문화와 정신으로부터 오는 온갖 유혹으로부터 이기고 믿음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확신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전쟁 속으로 투입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장미 빛 환상으로 기대하시면 안 됩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단순히 죄만 용서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향해 공박해 밀고 들어오는 불도저와 같은 것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가만 보고 있지를 않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 앞에서 불도저처럼 밀어 붙여서 결국 인간의 죄를 박살내고는 호수의 물로 뿌려 흙먼지를 씻어내듯이, 보혈의 호수로 완전히 씻어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 앞에 두 손 높이 들고 항복하고, 내 힘이 아닌 십자가 복음의 힘으로, 나에게 주신 그 믿음의 힘으로 나의 영적전쟁을 이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시대에 믿음을 꼭 지키시고, 이 세상에서 금보다 더 귀한 나의 믿음을 약화되거나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