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원고/마가복음

3.세례 - 하나님을 향한 결단과 연합

☆ 주님의 머슴 2021. 1. 9. 11:22

<마가복음 묵상>

3.세례 하나님을 향한 결단과 연합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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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10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 당시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위한 세례였다. 그것은 자기의 죄에 대하여 회개하는 사람들이나 그 죄를 버릴 것을 결심을 표명한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다시 말하면 그 당시 세례요한의 세례는 죄를 많이 지은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표시로 세례를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 빌립보서 28절에서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인간처럼 사시기 위해서 이 땅에 인간의 모양으로 오사 죄인의 모습으로 사셨다. 인간은 죄를 없애기 위해 세례를 받아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 3장에 보면 많은 일반 백성들(무리들)이 와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또 많은 세리들도 와서 세례를 받았다. 또 많은 군인들(권력자들)도 와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고는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하고 물었다. 그 때 세례요한은 일반백성들에게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누어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고 했다. 또 세리들도 세례를 받은 후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고 물었다. ”정한 세 외에는 더 거두지 말라고 했다. 군인들도 물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사람들에게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고 했다(3:10-14). 세례는 세상의 불의에 항거하고, 세상을 따르지 않고, 정의롭게 살고, 진리로 살고, 진실하게 살게 한다. 과거와 다른 변화의 삶을 살게 된다.

 

다 이렇게 세례를 받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몰려와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예수님이 활동하시기 바로 직전에 먼저 세례요한이 유대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왔다라고 외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엘리야가 다시 나타났다고 믿었다. 300년 동안 침묵하고 있던 예언자의 음성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고 믿었다. 더 나아가 드디어 메시야가 나타났다고 믿었다. 그러나 요한은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7-8) 고 했다. 세례요한은 정말 위대한 선지자였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의 표로 세례를 받았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다.

 

그런데 이러한 세례가 예수님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인데(4:15), 예수님에게는 이러한 세례가 예수님에게는 불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죄가 있는 사람들처럼 회개의 세례를 받아야 했는가?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3:14-15).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서이다.

세례는 하나님을 향한 결단을 말한다. 사람이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면 이렇게 세례를 받고 마음에 굳은 결단이 있어야 된다는 사실을 몸으로 직접 보여 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을 보면서 세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지만, 몸소 세례를 받으심으로 세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사실은 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결단을 내릴 때 어떤 위대한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다.

 

1.세례는 하나님을 향한 결단과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있다(9).

2.세례는 하나님과 그 분의 백성이 함께하는 시작과 동일성(연합)이 있다(9).

3.세례는 사명과 능력을 부여받는다(10).

4.세례는 하나님의 인정과 격려와 축복을 받는다(11).

 

첫 번째로 결단과 순종이다. 9절을 보자.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사실 속에는 결단과 희생과 순종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매우 중대한 결단과 전적인 순종이다.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꾸는 행복한 가정과 친밀한 가족과 안정된 직업과 좋은 친구들, 그리고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통하여 경험해 온 즐거운 추억들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모든 것들을 떨쳐버리고 떠났다. 즉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나사렛을 떠났다. 왜 그러셨을까? 예수님의 마음 속에는 이 세상을 구원하려는 사명, 즉 전적인 희생이 요구되는 사명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소명이 있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 되었다면 소명감과 사명감을 가진 하나님을 향한 결단을 가져야 한다. 희생해야 한다면 희생해야 하고, 손해 봐야 한다면 손해 봐야 하고, 버려야 한다면 버려야 한다. 이 세상에서 좋은 것 가지고, 좋은 것 다 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투자해야 한다면 투자해야 한다. 시간도 투자하고, 물질도 투자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겠다고 결정한다면, 거기에는 어떠한 소망과 영생과 만족함이 없다.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곳에는 진정한 하늘이 주는 기쁨이 없다. 낭패와 비극적인 삶은 아니더라도 더 많이 절망하고 낙심해야 하고, 삶의 보람이 더 없을지도 모른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9:23-25).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8:12-13).

 

두 번째는 시작과 동일성(연합)이다.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은 그 분의 삶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 즉 새로운 삶을 알리는 시작이다. 그리고 하나님이시면서도 인간과 같이 되는 동일성, 즉 연합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 예수 믿기로 작정하고 세례를 받는 순간에 지금까지와 다른 새로운 삶을 산다는 시작이다. 다시 말하면 중생해서 새롭게 거듭난다는 시작이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시작이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연합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세례와 우리의 세례는 새로운 시작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동일(연합)하게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되고,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8:9)

그러니까 예수님은 낮아지시고 우리는 높아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꾸치기한 것이다. 부유하신 예수님이 가난하게 되시고, 가난한 우리가 부유하게 하신 것이다.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힘이 된 것이다. 떨어져 있던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은 것이다.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연합이다.

 

그래서 세례는 시작과 연합이다.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6:5-8).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16:16).

 

세 번째는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은 사명과 능력을 부여 받았다는 사실이다(10).

이러한 사실은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바둘기 같이 그 분에게 내려오심에서 알 수 있다.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예수님이 사명과 능력이 부여되는 극적인 순간이다. 하늘이 갈라졌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하늘이 열렸다”(3:16,3:21)고 했다. 그 속에서 성령이 임했다. 비둘기 같이 임했다. 성령이 비둘기가 된 것도 아니고, 비둘기가 성령인 것도 아니다. 누가복음은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임했다”(3:22)고 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니,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으니 하나님의 배려하심으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비둘기 같은 형체로 임한 것이다. 요한복음에 보면, 세례요한이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1:32-34).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성령이 임했고, 사명과 능력이 임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 사명과 능력이 부되는 것이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잘 모르고 살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사명과 능력이 부여되었다. 요한복음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다”(1:12). 마귀를 이길 능력, 세상을 이길 능력, 죄악을 이길, 우리의 원수를 이길 능력, 여러 능력을 부여 받았다.

 

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사명을 주셨다. 성도의 여러 가지 사명을 다할 능력을 주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1:8).

 

네 번째는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은 하나님의 인정과 격려와 축복이 포함되어 있다(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는 말씀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인정하심과 격려하심과 축복이 있다. 하나님은 보증으로 자기를 따르는 성도들에게 필요를 채워주신다.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인정하시고 격려하시고 축복하신다.

 

이제 우리는 한번 비췸을 받고,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 이제 결단하자. 이제 하나님께 쓰임받자.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 따라 일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