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마가복음 묵상⑥>
6.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막1: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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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18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1: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1: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요, 축복이다. 특히 세상의 많은 사람들 중에 제자로 부름을 받는다는 것, 예수님과 동거동락 하면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정말 영광중에 영광이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먼저 네 사람이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다.
예수님이 갈릴리에 오셨다.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가장 북쪽지방이다.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상업을 하든지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든지 해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갈릴리호수를 중심으로 많은 도시들이 형성되었다. 그런데 이 대부분의 도시들은 물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꾸려나갔고, 물고기를 소금으로 절인 다음 로마 등 다른 도시로 수출하는 작업을 했다.
예를 들어 “벳새다” 라는 동네가 있다. 이 벳새다라는 뜻은 ‘고기의 집’이라는 뜻이다. 베드로, 안드레, 빌립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요1:43-44).
또 “타리카에아” 라는 동네도 있었다. 이 뜻은 ‘절인 생선의 곳’ 이라는 뜻이다. 갈릴리 지방에는 많은 어부들이 살고 있었다. 예수님 당시의 유명한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책에 갈릴리에는 어선이 330척 가령 있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그리고 갈릴리지방에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많았다. 천한 사람들이 많았다. 병자들이 많았다. 과부들이 많았다. 정치적으로도 소외된 사람들이 많았다.
예수님은 이러한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 제자들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단순한 사람들을 부르셨다. 큰 권력을 가진 자들을 부르시지 않으셨다. 그들은 매우 단순하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며, 모든 일상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삶에 있어서 일상적인 일에 종사하는 보통 사람들이었다.
저는 하나님이 일반인들을 사랑하신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세상에 일반인들을 많이 두셨다. 예수님도 아마 이렇게 기도하시지 않았을까? “나에게 보통사람 열두 명을 주십시오. 만일 그들이 나에게 그들 자신의 전부를 맡긴다면 나는 그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고, 세상을 변화시키겠습니다.” 라고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보통 사람들을 불러서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을 한 것에 대해 그 누구도 미처 몰랐을 것이다(구약의 몇몇 선지자는 알았다). 아마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런 평범한 사람들을 불러서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을 할 수 있고, 그런 평범한 사람들을 불러서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하시리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로 보통 사람을 불렀다. 지금도 주님은 대단하고 능력하고 탁월한 사람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을 부르신다.
분명한 사실은 기독교는 처음에 이렇게 시작했다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시작했다. 후에 제자들도 똑같이 예수님처럼 평범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제자들을 삼았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뛰어난 사람들만 모아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교회도 다 처음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서 시작한다. 문벌 좋고 뛰어난 사람들이 먼저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역사, 교회의 역사는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않았다. 능한 자가 많지 않았다.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았다. 하나님이 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평범한 자를 선택하여 능한 자로 만들 수 있다. 하나님이 능하신 분이신데 능력 있는 자를 선택하실 필요가 있겠는가? 능력자를 선택하여 일하게 하시면 결국 ‘내가 능력 있어 내 힘으로 다 했다’고 자랑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자, 지혜 없는 자, 약한 자, 천한 자, 멸시 받는 자를 택하셨다고 하셨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그렇다. 예수님도 이렇게 시작하셨다. 이스라엘에서도 제일 못한 곳, 제일 모자라는 곳, 제일 부족한 곳, 제일 낮은 곳, 아무도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는 곳, 제일 천대 받는 곳에서부터 시작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그곳은 부유하고, 권력이 있고, 학문이 높고, 선생들이 많다. 귀부인들이 많다. 자기 자랑이 판치고, 높이 오르기 위한 경쟁이 치열한 곳이다. 비방이 판치고, 폭력이 난무하고, 정의가 없는 곳이다. 결국 정의를 짓밟고 진리를 짓뭉개고 하나님의 말씀을 짓밟고 무시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는 곳이다. 하나님의 주권이 통하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곳에서 시작하지 않으셨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는 곳에서 시작하셨다.
예수님은 나사렛 동네에서 사셨다. 그래서 나중에 이름 앞에 나사렛이 붙어 ‘나사렛 예수’ 라 불려졌다. 나사렛도 갈릴리에 속한 지역이다. 나사렛은 갈릴리지방에서도 변방이다. 천시와 멸시받는 곳이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나다나엘’ 이라는 청년이 나사렛 예수를 처음 소개를 받을 때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하면서 아주 낮추어 보는 멸시의 말을 했다. 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라는 이 말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갈릴리 나사렛을 보는 통용된 말이요, 의식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자.
부족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 나약함이 있는 곳에 강함이 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 넘친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 넘친다(롬5:20)고 했다. 부족한 곳에 사랑이 넘친다. 부족한 곳에 은혜가 더 넘친다.
교회는 만들어져 가는 곳이다. 부족하지만 서서히 만들어져 가는 곳이다. 부족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부족하지만 은혜를 사모하며 하나의 교회를 만들어 가는 곳이다. 교회는 꿈을 이루어 가는 곳이요, 소망을 이루어 가는 곳이다. 주님의 능력의 손길, 주님의 사랑이 항상 머물러 있는 곳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광야교회 위에 구름기둥, 불기둥이 늘 머물러 있었던 것 같이 주님의 몸된 교회 위에 주님의 보호하심과 이끄심이 늘 머물러 있는 것이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부르심을 보라. 예수님은 평범한 어부들을 맨 먼저 부르셨다. 그러나 어부들이 이들만 있었던 게 아니다.
예수님이 이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 부조건 부르신 게 아니고, 예수님이 마음에 드는 무언가가 있었다(막3:13). 예수님이 보시기에 만족하게 여기는 것이 있었다. 예수님이 보시고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드셨길래 제자로 삼으셨을까?
첫째는 근면했고 열심히 일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열심히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배에서 깊고 있었다. 마태는 세관에 앉아서 자기 일을 열심히 봤다(마9:9, 막2:14).
둘째는 그들은 꿈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실 때에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꿈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예수를 따른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마9:9). 마태도 이렇게 부름 받았고, 세무공무원인 직업을 버리고 따랐다. 예수님은 아무나 찾아오시고 부르시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뭐니 뭐니 해도 제일 큰 위대한 일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다. 사람을 살리는 일, 생명을 구원하는 일, 사람을 가르치고 기르는 일이 가장 위대하다. 세상의 직업도 가만히 보면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인간을 만들고, 생명을 구하고, 사람을 살리는 직업이 제일 귀한 것이다. 제자들이 고기를 낚던 어부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군이 되었으니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셋째는 그들은 협력하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돕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을 돕기 위해서이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막3:13-15).
오늘 주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교회를 돕고, 주의 종을 돕고, 더 나아가 예수님의 일을 돕게 하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이 혼자 있는 아담을 보고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18절)” 하시고,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다” 고 했다. 여기서 이것은 교회가 태어나는 예표로 보여주시고 있는 것이다(창2:18-23).
첫 번째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 인 둘째 아담의 모형이다(롬5:14,고전15:45). 예수님의 모형이다.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했다는 것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말한다.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하와를 만들었다는 것은 교회가 아담의 갈빗대, 즉 둘째 아담이신 예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로 말미암이 탄생했다는 것을 말한다. 아담의 갈빗대로 만든 여자를 아담에 이끌어 오셨다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로 구원받은 성도를 성령님이 예수에게 이끌고 와서 붙여 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하와를 만드셨는가? 왜 옆구리에서 나오게 하셨는가? 아담의 돕는 배필을 위해서이다. 마찬가지로 왜 하나님은 성도를 택하시고 부르셨는가? 왜 예수님의 십자가로, 왜 창에 옆구리를 찔로 물과 피를 흘리며 성도를 구원하셨는가? 돕는 배필로 삼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의 옆구리에서 나왔다. 성도는 교회로 예수를 위한 신부이다. 신부는 남편을 돕는 배필이다. 아담은 예수요, 하와는 교회이다. 신랑과 신부의 관계이다. 돕는 배필로 삼으셨다.
넷째는 희생을 각오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모든 희생을 각오했다. 모든 것을 버렸다(18,20절). 평생 예수만 따르기로 결심한 것이다.
우리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 현대사회에서 특별한 부름을 바은 자들이다. 내 눈에는 보기에 어떠하든지 우리는 분명히 부름 받은 자들이다.
하루는 제자 중에 한 사람인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했다.
“주님,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겠습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재산을 버린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 받을 것이다“ 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