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원고/마가복음

9.예수님의 정신과 생활

☆ 주님의 머슴 2021. 2. 13. 17:20

<마가복음 묵상>

9.예수님의 정신과 생활

1:3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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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은 기독교 사상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인이 불교사상이나 유교사상이나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면 안 된다. 기독교 사상은 예수 사상이다. 예수 사상은 결국 예수의 정신과 생활을 가지게 한다. 예수의 정신과 생활이 없으면 기독교인이 아니다. 예수 없는 기독교인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런데 슬프게도 오늘 교회 안에 예수 없는 기독교인, 기독교인이라는 탈을 쓰고 교회를 다니는 예수 없는 예수 정신이 빠진(정신 빠진) 기독교인 있다. 오늘날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기독교인,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기독교인이 있다. 인본주의 사상을 가진 기독교인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사상이라고 치면 인간들이 생활하면서 지니게 되는 세계관을 총칭해서 부르는 역동적인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 기독교 사상은 뭐냐?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가지는 것이다. 기독교적인 세계관은 성경적인 세계관이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세계관이 바로 되어 있어야 된다. 성도의 세계관은 예수로부터 흘러나오는 세계관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사상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를 2천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오게 했고, 수많은 순교자들을 내면서도 기독교는 무너지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기독교 사상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세상적인 사상과 철학이 교회를 덮고, 성도들의 삶을 덮고 있다. 특히 성경을 읽지 않고 있다. 성경을 읽으라. 성경에서 예수를 알고, 예수를 배우라. 온 세계가 인본주의에 빠져 있고, 극도의 이기주의에 빠져 있다. 이것은 기독교 사상이 아니다. 여러분은 기독교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고, 기독교 세계관으로 책을 읽고, 기독교 세계관으로 생각을 넓히라.

 

오늘 본문도 기독교 사상, 예수의 사상을 보여 준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의지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정신, 사상, 삶이 곧 나의 정신과 삶이 되어야 한다.

 

남자가 군대에 가면 군인 정신을 가져야 한다. 군대 가서 옳은 군인정신을 가지지 못하면 군 생활을 바로 할 수가 없다. 내가 군대 있을 때, 자기 애인이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시집을 가고, 군대에서는 고참한테 꾸중을 듣게 되고 해서 홧김에 술을 먹고 총을 쏘면서 내무반에서 소동을 부리고는 급기야 자기를 괴롭히는 고참을 총으로 쏘고는 자기도 총을 쏘아 죽는 사건이 있었다.

또 한 번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공병 무대에 산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자기는 피하면 살지만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내무 반으로 뛰어다니며 알리다가 자기는 끝내 산사태에 매몰되어 죽고만 한 장교가 있었다. 이런 군인정신을 가진 자들도 있었다. 어느 것이 참된 군인정신인가?

 

남녀가 결혼해서 부부가 되면 부부 중심의 정신과 생활을 해야 한다.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한다. 같은 정신, 같은 말, 같은 생각, 같은 삶을 살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이 옳은 부부가 아니겠는가? 예수는 우리의 신랑이요, 성도(교회)는 예수의 신부라고 한다. 예수와 일심동체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했다(고전1:10). 교회는 예수의 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어떤 정신과 생활을 하고 있는가?

그럼 예수의 정신과 생활을 보자.

 

첫째는 기도의 정신과 생활이다(35)

35절은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인식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기도에 대해서 만큼은 분명히 철저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개인적인 기도의 습관을 보여 주고 있다. 주님은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일어나 나가 ...” 기도하셨다. 바로 전날 극심하게 피곤한 안식일이었다. 회당에서 사역하고 가르치시는데 엄청난 힘을 쏟으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집까지 몰려든 사람들을 밤 늦도록 돌보셨다. 심히 피곤한 가운데 휴식을 취해야 하는 것 같은데도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일어나 나가기도하셨다.

 

복음서를 통해서 보면 예수님은 기도를 많이 했음을 볼 수 있다. 그가 세례를 받으실 때도 기도하고 계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3:21). 변화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었다라고 했다(9:29). 열 두 사도를 선택할 때에도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라고 했다(6:12).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난 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삼으려고 할 때에도 조용히 따로 산에 올라가 기도하셨다”(14:23) 고 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시험을 받을 때에 돌 던질 만큼 더 가셔서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고 하셨다(14:32).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셨고, 용기를 잃지 않으셨다. 아무리 절망스럽고, 어렵고 고민되는 일이 있어도 먼저 기도 하셨다. 죄는 없으셨지만 하나님과 끊임없는 교재로 본보기를 우리에게 삼으셨다.

 

인자하신 예수님, 구주가 되시고 하나님이 되시는 예수님조차도 기도로 많은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으셨다면, 하물며 우리에게는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기도에 투자해야겠는가?

 

구약에 보면 히스기야라는 유대나라의 왕이 있었다. 그가 어려움 당할 때에 그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고, 북쪽의 적국인 앗수르가 쳐들어와 포위되었고, - 이럴 때에 자기 힘으로도, 왕의 힘으로도 버티지 아니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 보시옵소서. 들으시옵소서.” 눈물을 흘리며 금식하고 매달릴 때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질병을 고쳐 주시고, 나라를 회복시켜 주시고, 그의 앞날에 영원히 생명책에 기록하셔서 다윗왕 다음으로 히스기야 왕 같은 사람이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다시 나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신다는 것을 믿으며, 참으로 귀하게 생각한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하나님은 우리 편이시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3:17).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2:13)

 

기도는 어려운 것 같아도 열매가 좋다. 기도는 시작할 때가 힘들다. 그러나 세상은 처음은 좋아도 가면 갈수록, 결국 끝에 가서 아주 나쁘게 된다. 세상으로 갈 때는 좋아도 돌아올 때는 참으로 힘들다. 그러나 기도는 그렇지 않다. 죄인이 기도하면 거룩하게 된다. 가난한 자가 기도하면 복을 받는다. 병든 자가 기도하면 건강하게 된다.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을 보면, 찬송이 있다. 세상적으로는 유행가(대중가요)를 부른다. 유행가는 절망, 좌절, 회의, 번뇌와 염세적인 것과 인간의 고뇌, 슬픔을 노래한다. 그러나 찬송은 소망, 기쁨, 감사, 평안, 능력을 가져오게 한다.

 

유명한 크리소스톰은 기도는 만능의 갑옷이요, 값이 떨어지지 않는 보물이요, 고갈되지 않는 광산이며, 구름으로도 흐려지지 않는 창공이요, 폭풍으로도 꾸겨지지 않는 하늘이다. 이것은 나의 믿음의 뿌리요, 지반이요, 한량없는 어머니의 축복이다.” 라고 고백했다. 아무도 이 말을 부인할 수가 없다.

 

기독교인은 예수 사상, 기독교 사상, 예수 정신이다. 기독교 정신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기도하는 정신이다. 요란함 속에, 혼란스러운 시대에, 거짓과 술수, 죄악으로 달려가는 시대에 조용히 자기를 돌아보며, 예수님처럼 무릎을 꿇고 기도하자.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의 정신과 삶을 본보기로 삼자.

 

두 번째는 복음전파의 정신과 생활이다(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예수님은 전도의 정신으로 꽉 차 있었다. 오늘 본문을 가만히 읽어 보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36-37). 제자들이 잠에서 깨어나 보니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다.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지 물어 그 분을 따라 갔다. 그리고 기도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만났다. “주님, 여기에 계셨습니까? 모든 사람이 주를 찾습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이 말씀 한 마디에 예수님의 모든 사역이 다 담겨져 있다. 예수님이 어떤 정신을 가지고 계신지를 다 담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을 더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442절에서 44절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했습니다. “(42)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44)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가버나움을 떠나시지 말고 늘 함께 있어주세요.’ 했다. 이 때 예수님은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그리고는 갈릴리 여러 동네의 회당으로 다니며 전도하셨다고 했다.

 

여러분, 기독교 사상, 기독교 정신의 또 하나는 전도이다. 성도는 복음 전파의 사상이 있어야 한다. 이 세상에 온갖 사상이 판을 치고 있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고, 사람들에 생각에 파고들고 있지만, 성도는 전도의 사상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오늘날에는 전도의 사상이 식어지고 있고, 옛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다 이런 전도 사상을 가졌다. 나 혼자 예수 믿고, 신앙 생활하는 것이 미안하고 죄송했다. 우리는 복음 전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세 번째는 성실함, 진실함의 정신과 생활이다(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예수님은 온 갈릴리전역의 여러 회당에서 말씀을 전파하시고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셨다. 갈릴리는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이었다. 정말 몸으로 전 지역을 누비고 다녔다. 몸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성실함, 진실함은 능력을 보장한다. 성공도 보장한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도 보장한다. 하나님은 성실하고 진실한 자에게 그 분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공급해 주신다. 반대로 성실하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하면 그 분은 자신의 능력을 거두어 가신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2).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6:2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10)

 

신앙생활, 즉 믿음생활은 성실과 진실이 함께 포함된 것을 말한다. 믿는다는 그 믿음 속에는 성실과 진실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믿음이 성립되지 않는다. 믿음이라는 그 자체가 성실과 진실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할 때, 믿기 때문에 거짓이 없어야 하고, 믿기 때문에 성실한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정신과 생활이 일치했다.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관이 달라진다. 도적질하고, 살인, 강도, 마약 등, 이 세상의 온갖 나쁜 짓은 생각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 좋은 생각을 해야 한다. 소망적인 생각, 좋은 비전을 가져야 한다. 히브리서 31절에서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했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되어 있다. 그래서 영혼과 육체를 분리해서 살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정신과 생활이 분리되어 살수가 없다. 그 사람의 생각과 사상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정신과 생활이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항상 영혼과 육신을 귀하게 여기셨다. 혹 믿는 사람 가운데도 어떤 이들은 영혼은 귀하게 여기지만, 육신을 아주 천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기독교는 이 둘을 다 귀하게 여긴다. 이 둘 중에 한 쪽만 천하게 또는 귀하게 여기면 이단에 빠져 있는 경우거나 아니면 성경의 진리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 두 가지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다 귀한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해 놓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구원관은 전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全人的(전인적) 구원이라고 한다. 구원이라는 말은 전인적 구원을 말한다. 사람의 어느 한 부분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인간의 영혼과 육신에 비중을 두시고 함께 하시고 계신다. 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른다. 아직까지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즐거운 시간을 누리지 못하고 고통과 근심 속에서, 기쁨이 없고 슬픔과 외로움 속에서 살고 있는지 모른다. 오늘 우리는 예수의 정신과 생활을 가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