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산상복음2]산상복음 서론(2)
주일설교(2015/5/24) - 산상복음 설교(2)
산상복음 서론(2)
마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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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는 좀 딱딱하고, 재미없고, 듣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말씀 중에는 가끔 이렇게 듣기가 힘들고 재미없고, 딱딱한 말씀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말씀을 따라 잘 들어 주시고, 몰랐던 부분도 알아 깨닫게 되는 여러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할렐루야!
제가 산상복음을 설교하면서 본론으로 못 들어가고 서론부분에 머물러서 서론만 2주 연속 말하고 있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산상복음을 가볍게 생각하고, 가볍게 취급해 버릴까 싶어서입니다. 실재로 이 산상복음을 가볍게 생각하고 시시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면 안됩니다. 이 산상복음은 가볍게 생각하고 살짝 맛만 보고 넘어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성경의 말씀이 다 그렇지만, 특히 이 산상복음을 아주 가볍게 생각하고, 시시하게 생각하고 이 산상복음을 대할 때, 우리의 신앙에 변질이 오기 쉽고, 오해의 소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산상복음을 시시하게 생각하거나 율법으로만 생각하고, 나하고는 거리가 먼 것처럼 취급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라톤을 하거나, 오래 달리기를 하거나, 깊은 물에서 수영을 해야 할 때는 반드시 준비 운동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처럼, 이 산상복음은 너무나 심오하고, 우리의 신앙이 현재에 머물러있지 말고, 신앙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고, 신앙의 변질을 가져 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 계속 서론부분에 머물러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번 기회를 통해서 정말 여러분들의 신앙과 영성이 한 단계 뛰어 오르고, 복음의 엑기스를 맛보시고, 여러분의 말씀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공부할 때, 한 쪽 부분만 강조하거나 치우치면 안됩니다. 성경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한다. 또는 숲은 보고 나무는 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거나 연구할 때, 숲과 나무를 동시에 보아야 합니다. 어느 특정한 부분 하나만 지나치게 강조하면 안됩니다. 이단들의 특징 중에 하나가 뭐냐하면, 성경의 한 쪽 부분을 뽑아내어서 계속 그 부분만 강조합니다. 성경은 웅장한 교양곡과 같습니다. 특히 이 산상복음은 아주 조화를 잘 이룬 교양곡 음악과 같습니다. 그 중에 하나라도 자기 소리를 못 내면 모든 음악이 망치는 것과 같이 산상복음은 숲과 나무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산상복음은 순서가 아주 중요합니다. 주님은 아무렇게나 이 산상복음을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산상복음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영적순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초를 세워 놓고, 중요한 것부터 하나씩 하나씩 쌓아 올린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5장 1-10절에 있는 팔복이 뒤에 있지 않고 앞에 있는 것은 아주 의도적입니다. 예수님이 팔복을 먼저 말한 것은, 팔복을 소유하지 않으면 뒤에 따라 나오는 모든 산상복음의 말씀을 지킬 수 없고,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팔복도 주님이 아무렇게나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기초부터 하나 하나 쌓아 올라가는 형태입니다.
지난 주일에 서론을 말씀하면서 산상복음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한다고 했습니다. 이 산상복음은 예수를 믿고 구주로 영접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성도들에게 현재의 위치에서 삶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산상복음은 큰 틀에서 보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이 세상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 가를 말합니다. 이게 5장 전체의 말씀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어떤 유의 인간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 산상복음은 기독교인에게 세상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깨닫게해 주고, 자기의 위치가 어디인가를 깨닫게 해 주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실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6). “착한 행실”입니다. 살인, 간음, 맹세, 보복, 원수사랑, 구제 등을 통해서 기독교인이 사회와의 관계에서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기독교인은 자기 정체성이 분명해야 합니다. ‘나는 어떤 유(類)의 인간인가? 그리고 나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가?’ 분명히 인식하고 깨달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구원받은 자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나는 삶과 의에 있어서는 세상과 분명히 다르다.’ 그리고 ‘나는 과거에는 하나님을 몰랐는데, 현재는 분명히 하나님을 만난 자다. 나에게는 중생의 역사가 있었다. 나는 내가 가던 길에서 바뀌어 새로운 인생이 열렸다. 그래서 나는 세상과 다르며, 다른 삶을 산다.’ 라는 자기의 인식, 정체성이 분명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과 관계입니다. 이게 6,7장 전체의 말씀입니다. 기독교인은 항상 하나님과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늘 하나님과 일대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태양이 항상 지구를 비추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가끔 구름이 태양을 가리기도 하고, 혹은 밤이 되어 지구 반대편에 있어서 보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태양은 항상 지구를 비추고 있는 것과 같이, 기독교인은 항상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존재요, 기독교인은 항상 하나님과 관계 속에 호흡을 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잘 보일려고 사람을 의식하거나, 사람에게 아부하거나,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6:1)”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 나팔을 불지 말라.(6:2)”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6:5).” “너희는 금식할 때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금식하고 있다는 표시를 내지 말라”(16절) “너희는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19절)
기독교인은 자기가 항상 하나님 앞에 있으므로 자기를 드러내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 관심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은 이 산상복음을 통해서 복을 주시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산상복음의 결과는 축복입니다. 산상복음은 기독교인들이 축복을 체험하고, 축복을 소유하게 하려고 주신 것입니다. 산상복음의 핵심은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주시면서, ‘이 산상복음의 말씀대로 살면, 큰 축복이 너 한테로 돌아간다. 팔복을 받은 자는 팔복을 지켜야 하고, 팔복을 지키는 자는 그 이하 모든 산상복음을 지키며 산다라는 것입니다. 산상복음의 결과는 육적이고, 영적인 큰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상복음의 마지막인 7장 24절 이하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여기서 집은 나를 말합니다. 바로 내가 ‘집’입니다. 성도가 집입니다. 히브리서 3장 6절에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했습니다. 확신을 가지고, 예수 잘 믿고 신앙생활 잘 하면 우리가 주님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산상복음은 우리를 주님의 집이 되게 하고, 주님의 집으로 반석 위에 든든히 서 있으면 큰 축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이단들이 이 산상복음을 어떻게 보는가를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이 산상복음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서 이단인가, 아닌가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단들은 이 산상복음을 “사회복음” 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산상복음을 사회복음의 기초라고 봅니다. 그래서 개인 개인에게 준 말씀이 아니고, 사회구원을 위해 준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해 그 원리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살면 모든 지구상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으며, 모든 전쟁을 끝장낼 수 있으며, 모든 인간의 어려운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산상복음은 사회구원을 위해 주신 사회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산상복음은 우리 개인 개인에게는 아무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과는 관계없는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단들은 이 산상복음을 모세의 율법을 더 세밀하고 정교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산상복음은 율법주의자를 만들고, 은혜가 다 빠져나간 은혜와 관계가 없는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인데, 율법만 있고, 은혜가 없으니 기독교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에는 은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 구원, 성령의 사역, 거듭나게 하는 중생의 교리가 있어야 하는데 이 산상복음에는 이것이 없고, 도리어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지킬 수 없는 복음이고, 도덕적인 것만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의 복음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단들은 산상복음을 무시해 버립니다. 보지도 않습니다.
셋째는, 이단들은 이 산상복음을 예수님이 재림해 와서 왕국시대, 즉 천년왕국 시대를 위한 것이며, 현재 이 땅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세대주의 복음주의 자들이 이것을 주장합니다.
우리 한국에 이단들이 많은 것은 세대주의 복음주의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초창기 일부 선교사들 중에서 세대주의 복음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역사에서 이단들은 모두가 세대주의 복음에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많이 들어본 천년왕국에 대한 것도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이 있는데, 그중에 전천년설에는 역사적 전천년설이 있고, 세대주의 전천년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들은 초창기부터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외국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이단들이나, 우리나라에서 자생 이단들이나 모두가 이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영향을 받아서 모든 이단들이 이 세대주의에서 다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대주의가 우리나라의 이단들을 길러내는 온상인 겁니다.
이 세대주의가 뭐냐하면, 성경의 역사를 시대 시대별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아담의 타락 이전시대를 무죄시대, 이 때는 구원이라는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아담부터 노아시대까지를 양심시대, 그 다음부터 아브라함시대까지를 인간통치시대, 아브라함시대부터 모세시대까지를 계약시대(약속시대), 모세시대부터 세례요한까지를 율법시대, 그 다음시대를 은혜시대(교회시대), 그 다음이 천년왕국시대, 그 다음이 낙원시대, 이렇게 성경을 시대별로 구분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하면, 이렇게 시대를 구분하는 게 문제가 아니고, 그 시대 시대마다 하나님은 다르게 역사했고, 다르게 하나님은 인간을 다스렸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때마다 하나님의 복음은 달랐다는 것입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복음의 은혜가 아담 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이 한결 같은 것입니다. 시대 시대마다 다르면 어떻게 됩니까? 성경의 해석도 달라지고, 복음도 달라지고, 교리도 달라지고, 성경의 해석이 다르게 해석이 되는 겁니다. 이단들에게는 이 세대주의 성경해석이 너무나 좋은 온상인 겁니다.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하는 겁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이단들은 다 이 세대주의에 근거를 두고,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교리를 만들어 이제부터 미래는 하나님이 예수시대는 끝내고 제2의 예수를 보내셨는데, 자기들의 교주가 제2의 예수요,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계속해서 제2의 제3의 메시야가 자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대주의 영향을 받은 자들은 이 산상복음을 천년왕국에 가서 필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단들은 이 산상복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읽지도 않습니다. 천국에 대한 설교요, 지금 우리에게는 필요 없는 것, 현재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필요 없는, 나하고는 상관이 없는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단이 아니라도 현재 교회 안에 세대주의 영향을 받은 목사님들은 이 산상복음을 ‘지금은 필요 없다. 천국에 가서나 필요하다’ 하면서 무시하는 목사님들도 있습니다.
넷째는, 이단들은 이 산상복음을 가지고 잘못된 천국관을 심어줍니다.
우리가 이 산상복음을 배우면서,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 중에 하나가 천국에 대한 눈이 열려야 합니다. 산상복음은 올바른 천국관을 갖게 합니다. 잘못된 천국관을 가지면 우리의 신앙이 변질되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안합니다. 잘못된 천국관은 예수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만 생각하고, 현재의 삶을 불의하게, 거짓되게, 부도덕하게, 그냥 형편없게 사는 겁니다. 무질서하게 사는 겁니다.
이 잘못된 천국관 때문에 이 땅에서 사기치고, 돈 떼먹고 안주고, 비윤리적으로 사는 겁니다. 요즘 보세요. 신문지상, 방송, 인터넷에 목사가 사기치고, 보이스 피싱하고, 장로가 기업하면서 직원들 임금을 안주고, 세금을 안 내고 탈세하고, 교인이 카드 깡, 보험사기, 별의별 나쁜 짓하다가 감옥가는 사람들이 많찬습니까? 대부분 이단들은 거의 다가 비윤리적이고, 인권이 없습니다. ‘자기들은 선택받고, 구원 받았기 때문에 무슨 짓을 하고 다녀도 천국간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일반 교인들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았기 때문에 날마다 죄지으면 회개하면 되고, 천국은 이미 내 것이 되었으니, 양심은 좀 찔리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즐기면서 막 살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많이 벌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번은 우리 교회 현관 들어오는 옆 벽에 이단 단체의 광고물을 스티커처럼 크게 만들어 덕지덕지 붙여 놓았는데, ‘한국교회여! 회개하라’ 이러면서 크게 인쇄해서 붙여 놓았습니다. 그것 그냥은 떼어지지를 않는 겁니다. 칼로 하나 하나 긁어내야 했습니다. 아주 양심도 없는 거예요.)
이것은 잘못된 천국관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천국관은 이런 것입니다. 천국은 아직 이 땅 위에 임하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천국은 동시에 이미 땅 위에 임한 나라입니다. 천국은 이미 여러분 속에 임했습니다. 천국은 참된 그리스도인들 속에 있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곳에 있습니다. 내 속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으면 이미 천국은 내 속에 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아직 임해야 합니다. 지금 오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천국에는 두 단계가 있습니다. “이미“ 와 ”아직“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믿으면서 교회를 통하여 현재의 천국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의 천국은 아직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천국(이미의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면, 미래의 천국(아직의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현재의 천국 안에서 사도바울이 말한 것처럼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천국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찾아 읽겠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5장 3절을 보십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여기에 나오는 천국은 현재의 천국입니다. 첫 번째 천국, 이미 임해 있는 천국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10절을 보십시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이 천국은 미래의 천국입니다. 아직 임하지 않은 오고 있는 천국입니다. 팔복 중에 천국이 두 개입니다. 첫 번째 천국 문을 통과해서 마지막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상복음은 우리를 향하여 의미 없이 무질서하게 막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산상복음은 우리의 삶의 자세를 바르게 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깨우칩니다. 왜 우리가 예수를 믿는지, 왜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깨우쳐 줍니다.
그러므로 산상복음이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람들은 천국을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이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리셔서 구원해 주신 그리스도인이요, 현재의 천국을 소유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세워주신 천국을 맛보는 것입니다. 산상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깨닫고, 우리가 누군지 발견하십시오. 하나님의 축복을 더 받아야 하며, 또 받은 축복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함을 깨달으십시오. 여러분의 심령에 복음을 붙잡고, 은혜의 물결이 출렁이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