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산상복음3]팔복 서론
주일설교(2015/5/31) - 산상복음 설교(3)
팔복을 받자 – 팔복 서론
마5:1-10
====================================================================
오늘부터는 팔복입니다. 오늘은 팔복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팔복 서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산상복음 제일 앞에는 팔복이 먼저 나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팔복을 먼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팔복이 산상복음의 제일 꼭지점입니다. 팔복을 통하지 않고는 다음에 나오는 산상복음이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팔복이 먼저 내 것이 되어야 그 다음 나오는 산상복음이 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일 먼저 팔복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신약성경 전체를 요약해 놓으면 이 팔복이 됩니다. 우리에게 우리가 왜 예수를 믿느냐 라고 묻는다면, 과감하게 이 팔복을 받기 위해, 이 팔복을 주님이 약속해 주셨기 때문에, 이 팔복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앞의 서론에서 현대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특징이 신앙의 피상성-형식적인 신앙과 신앙의 얄팍함-무게 없는 신앙, 즉 쭉정이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신앙이 깊지를 못합니다. 특히 대형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은 물론 다는 그렇지 않지만, 주일 오전만 한번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끝냅니다. 그리고는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이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습니다. 죄사함 받은 경험도 없고, 구원의 확신도 없습니다. 성령 세례의 체험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또 성령 체험했다하는 사람들도 일시적으로 한번 받고 끝나버리거나, 성령의 지속성, 성령의 충만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가짜 성령을 체험을 해 놓고, 성령 체험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부터 팔복을 배우면, ‘내가 가짜 성령을 체험했구나, 나의 신앙이 형식적이고, 얄팍하구나’ 하는 것이 다 드러나 버립니다. 이 팔복을 받으면, 신앙의 피상성 – 형식적인 신앙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 팔복을 받으면, 신앙의 얄팍함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 팔복이 나한테 와버리면, 구원의 확신, 죄사함의 경험, 하나님을 만난 체험, 성령의 체험은 말할 것도 없고, 천국이 내 속에 들어와 버립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내 삶이 바뀌어 버립니다. 내 신앙 자체가 애쓰고 힘씀이 없이도 자동적으로 물 흐르듯이 신앙생활이 되어 버립니다.
산상복음은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합니다. 현재의 위치에서 머물러 있지 말고, 신앙이 계속 전진해 가라, 계속 변화해 가라고 요구합니다. 이 팔복이 내 속에 들어와 버리면, 그냥 변해 버립니다. 쓴물이 단물이 되듯이,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듯이, 그냥 자연스럽게 변해 버립니다. 이 팔복이 나에게 오면,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예수 믿는 기쁨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 이런 것이 성령체험이구나!’, ‘예수 믿으면 바뀐다고 하더니만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복이 나에게 와야 합니다. 팔복이 나에게 와야 나에게 예수 믿는 기쁨이 있습니다. 팔복이 나에게 와야 진정한 하늘의 축복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오복(五福)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五福(오복)은 書經(서경) 周書(주서) 洪範篇(홍범편)에 나오는 문장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五福(오복)은 一曰壽(일왈수)요, 二曰富(이왈부)요, 三曰康寧(삼왈강녕)이오, 四曰攸好德(사왈유호덕)이오, 五曰考終命(오왈고종명)이니라.” 했습니다.
이 문장을 풀이하면, 첫째는 장수하는 것, 둘째는 부유한 것, 셋째는 신체가 건강한 것, 넷째는 좋은 德을 가진것, 다섯째는 일생동안 평안하게 살다가 天命(천명)을 마치는 것, 이 다섯 가지가 五福(오복)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민간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오복(五福)이 있습니다.
첫째는 치아가 좋은 것, 둘째는 자손이 많은 것, 셋째는 부부가 해로하는 것, 넷째는 손 대접할 것이 있는 것, 다섯째는 명당에 묻히는 것,
그 외에도 민간에서 전해오는 또 다른 오복(五福)도 있습니다.
나를 중심하여 부모 복-부모를 잘 만나는 것, 처복<남편>-부부가 잘 만나는 것, 관복(官福) - 벼슬, 지위를 얻는 것, 문복(文福) - 문장, 글재주를 가지는 것, 인복(人福) - 도움주는 사람 복입니다. 이런 복들은 전부다 자기중심적이고, 땅의 복을 말합니다.
기독교에도 팔복이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해 주신 팔복은 영적이고, 육신적인 것입니다. 즉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인간에게 행복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 행복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인류역사에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들이나, 여러 학자들이 이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한 자가 없습니다. 아무도 이 행복을 설명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이다’ ‘행복은 이런 것이다.’ 라고 정확하게 말한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온 세상이 행복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당면한 최대의 문제가 행복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 방황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이 문제입니다. 절대 다수가 불행을 불러오는 방법을 사용하여 행복을 찾고 있습니다. 절대 다수가 일시적인 행복, 잠깐 왔다가 사라지는 행복을 찾습니다. 이러한 행복은 불행을 더 만듭니다. 왜냐하면 일시적인 행복에는 죄의 속임수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처음에는 행복을 가져 오는 것 같아도 죄는 결국 불행, 비참함을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팔복은 우리가 진실로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팔복은 ‘우리가 행복해지는 방법이 여기에 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복되고 행복한 사람은 이런 타입의 사람들이다.’ ‘ 이 방법대로 하면 참으로 행복해 진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팔복은 인간이 가져야 할 진정한 행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하는 최고 복이 바로 이것이다 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하는 복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복을 꼭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팔복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이 팔복 전체가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꼭 전하고자 하는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기독교인은 다 이렇게 되어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나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가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의 말씀일 뿐이야! 나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어!” 라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읽거나 들으면 안 됩니다. 아니면, “일부 특별한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지 나하고는 거리가 먼 이야기야!” 가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탄이 주는 마음입니다.
카톨릭이 잘못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그리스도인을 두 그룹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성자 그룹과 평신도 그룹입니다. 특수한 그리스도인과 보통 그리스도인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이단들도 보면, 특별한 그리스도인이 있고, 보통 일반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특별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특별한 그리스도인의 반열에 들어가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바리새인들도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자기들만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만 진짜 하나님 백성이고, 자기들만 구원 받습니다. 대부분의 일반백성들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저주 받은 자들이라고 멸시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은 책망한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으면 너희들보다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라고 무섭게 책망했습니다.
여러분, 팔복은 특별한 기독교인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기독교인이라면 다 이 팔복을 받아야 하고, 팔복대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팔복의 원리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팔복전체를 다 나타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심령은 가난한데, 애통함은 할 줄 모른다든가, 애통함은 있는데 온유함이 없다든가, 의에 주리고 목마름은 있는데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없다든가 이런 법은 없다는 겁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이 모든 팔복의 특징을 다 나타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팔복 중에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다른 것은 덜 나타내곤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팔복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아직 우리 속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팔복은 하나씩 하나씩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 동시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의 축복은 또 다른 복을 가져오게 합니다.
예를들면 애통함이 없이는 심령에 가난함이 없고,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없이는 애통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팔복 중에서 하나의 복을 가졌다”는 말은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약간의 무게의 차이는 있을 수는 있어도 하나의 복이 있으면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팔복은 하나의 완전한 전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분리 시켜서 가질 수 는 없는 것입니다. 팔복 중에 하나만 가지면 다른 복은 딸려 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하나의 복이라도 가졌다면 다른 복은 그 속에 다 연결되어 있어서 같이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사람은 팔복 중에 하나라도 태생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성품에 가지고 태어나는 자는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성품이 깨끗하고, 선하고, 성품이 부드럽고 좋은 사람이라도 태어날 때부터 팔복의 성품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팔복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이 내려 주신 축복입니다. 하늘로부터 임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노력해서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본래부터 태어나면서 팔복의 성품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부터가 다 죄인입니다. 본래부터 팔복의 성품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어 새롭게 거듭난 사람들에게만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노력하고, 지식을 많이 쌓아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복이 있나니” 라고 서언하고 있는 것이 9번이나 반복하고 있는데,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본문은 “8복”이 아니고, “9복”이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 본문이 팔복인지 9복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것은 신학자들한테 맡기고, 8복이면 어떻고 9복이 어떻습니까? 이 복 하나 하나가 나의 복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복이 되는 게 중요합니다. 여기서 “복이 있나니” 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makavrio" (마카리오스)”인데, 이 단어는 본래 신들에게만 속한 축복을 말할 때 사용된 용어입니다. 즉 ‘신들의 행복’을 가리키는 말이며, 그리고 신들의 상태와 또한 신들의 행복한 실존을 함께 나누는 자들의 상태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신들 앞에서 예배하면서 손을 높이 들고 “호이 마카리오이(hoi makarioi)” 즉 “복있는 자들이여!” 라고 외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복은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차원 높은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구하는 것에도 달라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것들은 세상은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2,000년 동안 이것을 구했습니다. 이 말씀이 기록되던 시대에는 헬라의 지식이 판치고, 헬라의 문화에 지배를 받으며, 로마의 권력을 최고로 여기고, 그 권력을 숭상하면서 살았습니다. 헬라의 지식과 철학과 문화와 로마의 힘이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이럴 때 기독교인들은 심령이 가난한 것을 찾았습니다. 애통하는 것을 찾았습니다. 온유함을 추구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름을 추구했습니다.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과의 사이에는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관심사입니다. 무엇에 관심을 가지느냐 입니다. 어디에 관심을 가지느냐 입니다. 이 차이가 분명했을 때, 교회는 위대하게 보였습니다. 기독교인은 독특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가, 교회가 그들과 독특하게 다름을 알았을 때, 교회가 핍박을 받고 고난을 겪을 때에도 세상은 기독교의 복음에 귀를 기울었습니다. 기독교의 매력에 끌렸습니다.
산상복음과 팔복은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들, 세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달라질 수 있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관심사가 다릅니다. 기독교인 “심령이 가난한 자”를 사모하지만, 세상은 그것을 멸시합니다. 기독교인은 “애통하는 자”를 사모하지만, 세상은 가장 어리석고 나약한 자라고 천대합니다. 기독교인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사모하지만, 세상은 부귀, 돈, 지위, 신분, 명성에 목말라합니다. 결국 기독교인은 마지막에 천국을 사모하며, 그 길을 가기를 원하지만, 세상은 천국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삶으로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기독교인은 세상과 관심사가 다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믿으며 팔복을 소유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목적이 팔복을 소유하기 위해서입니다. 팔복이 내 것이 될 때 진정한 축복이 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영적, 육적 축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땅에서의 성공의 축복, 풍성함의 축복도 팔복이 내 속에 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영적, 육적인 풍성한 축복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