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원고/산상복음

6.[산상복음6]애통하는 자의 복

☆ 주님의 머슴 2021. 3. 8. 09:19

주일설교(2015/06/21) - 산상복음 설교(6)

애통하는 자의 복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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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두 번째 복으로 애통하는 자의 복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위로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애통심령이 가난해야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으면 애통이 생기지 않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나타나는 첫 번째 모습입니다. 애통의 복은 기독교인을 심히 기독교인 되게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이 아닌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않는 복입니다. 그래서 이 애통하는 복은 기독교인을 기독교인이 아닌 세상 사람들과 다른 존재로 눈에 띄게 구별되게 합니다.

 

애통은 눈물입니다. ‘비통해 하는 것을 말합니다. “애통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penqevw(펜데오) 입니다. 이 단어는 죽은 사람을 위해서 애곡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눈물과 함께 더불어 터져 나오는 슬픔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슬픔은 심장을 궤 뚫는 슬픔입니다. 이 슬픔은 감상적인 슬픔이 아닙니다. 이것은 가슴을 부수는,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뼈를 깎는 슬픔입니다. 이 슬픔은 옆에서 볼 수 있는 슬픔이요, 이 슬픔은 그 사람의 행동으로, 그 사람의 얼굴에서 나타나는 슬픔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기독교인의 삶은 온통 기쁨과 웃음으로 충만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인은 당연히 성령이 충만해 있다면, 즐거움과 기쁨이 충만해 있어야 하고, 웃음을 띠고 계속 활기차고, 기쁨이 넘치는 기운찬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성경적입니다.

누가복음 625절에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실제로 기독교적인 눈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적인 애통함이 있습니다. 기독교인 다른 사람의 죄악을 보고 애통해야 하며, 자기의 죄악을 보고 애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런 슬픔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이런 슬픔을 감춥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말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우수꽝스럽게 여깁니다. 세상에서 적어도 피하고 싶은 게 하나 있다면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철학은 가급적이면 슬픔을 피하여 살자’, ‘골치 아픈 일은 피하고 싶다.’ ‘행복하게 살고, 즐겁게 살아야지, 왜 슬퍼하며 사느냐세상은 쾌락을 즐기며,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 기쁨으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애통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삶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세상과는 역설적이고, 다릅니다. 진정한 웃음은 애통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애통이 없는 웃음은 진정한 웃음이 아니요,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가져다주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쾌락의 웃음, 임시적인 즐거움은 언젠가는 정말 우리의 삶을 슬프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웃음과 즐거움은 기독교의 애통과 행복을 정죄합니다. 그러나 오늘 애통하는 자에게 축복과 행복과 기쁨과 평화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왜요? 이 애통은 신령한 문제를 가지고 애통하는 신령한 애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은혜 때문에 울어 보았습니까? 은혜 때문에, 은혜에 감사해서, 성령에게 붙잡혀서 수많은 눈물을 흘려 보았습니까? 여러분! 울어야 합니다. 애통해야 합니다. 죄 때문에 애통해 하고, 실수 때문에 애통해 하고, 하나님을 떠난 생활 때문에 애통해 하고, 은혜를 받으니 감격해서 애통하고, 성령님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애통하게 하는 경험이 있습니까? 성도는 심령이 가난할 때 애통이 터져 나옵니다. 애통이 생활 속에 늘 머물러 있습니다. 기도하다가도 울음이 터져 나오고, 성경 보다가도 울음이 터져 나오고, 설교 듣다가도 울음이 터져 나오고, 길을 가다가다도 주님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

 

오늘 우리는 다 메말라 있지 않습니까? 애통이 사라져 버리지 않았습니까? 애통이 왜 없습니까? 애통은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데, 왜 오늘은 내 속에 애통이 사라져 버렸습니까? 교만 때문입니다. 배부르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사라져 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은혜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은혜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위로부터 오는 구원의 은혜, 말씀의 은혜, 십자가의 은혜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먼저 애통하는 자에게 오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위로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는다.” 라고 약속합니다. 누구가 위로하십니까? 우리가 슬퍼하거나 외로워하거나 답답해하거나 절망할 때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누가복음 225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니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로가 누구를 통해서 옵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옵니다. 그러므로 시므온이 위로를 기다렸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기다린 것입니다.

우리를 위로하고, 민족을 위로하고, 가정을 위로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는 것입니다.

 

진정한 위로는 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세상의 위로는 위로가 아닙니다. 물질의 위로, 권세의 위로, 인간적인 위로, 육신을 즐겁게 하는 위로는 잠깐 있다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2:18)

 

오늘 이 시대는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 시대입니다. 위로가 세상에는 없기 때문에, 참 위로를 모르기 때문에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위로는 하늘로부터 옵니다. 진정한 위로는 세상에 있는 게 아닙니다.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위로의 축복을 받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예수님이 찾아 오십니다. 예수님이 만나 주십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가난하여 굶주린 자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과부와 어린아이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애통해 하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진정한 위로를 받습니다.

 

(고후1:3-4)“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때 그 받은 위로로써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모두 세상의 위로가 아닌 하늘의 위로를 받기를 축원합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이런 위로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세상의 모든 사물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근심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고, 세상 근심이 있습니다. 우리 성경 한 군데 찾아 읽으십시다. 고린도후서 710-11절입니다. “(10)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영의 근심이고, 세상 근심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육의 근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룹니다. 그러나 세상 근심은 결국 사망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왜 구원을 이루는 회개가 일어납니까?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애절함, 간절함, 애달픔, 애통함, 눈물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기쁨도 세상적인 기쁨이 있으며, 신령한 기쁨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울음도 쓸모없고 아무 가치 없는 울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능력의 울음도 있습니다. 가치 없는 울음은 육의 눈물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울음은 신령한 영의 눈물입니다.

 

조금만 속상해도 울고, 술만 먹으면 신세타령 하면서 울고, 세상을 비판하면서 울고, 자기의 처지가 한탄스러워서 비관하면서 울고, 이런 눈물은 가치 없는 눈물입니다. 이런 육의 눈물에는 주님의 위로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위로를 받고 축복이 되는 눈물은 신령한 눈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인 눈물입니다. 위로를 받는 눈물이요, 은혜가 넘치는 눈물입니다. “햇빛이 늘 비치는 곳은 사막이 된다라는 아랍 격언이 있습니다. 항상 햇빛이 비치는 곳은 사막이 되고 맙니다. 땅은 햇빛을 필요로 하지만 때론 비도 내려야 합니다.

항상 편안하고 아무 문제가 없는 자는 복이 있는 자가 아닙니다. 성도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영적인 눈물을 많이 흘려야 합니다. 영적인 눈물은 내 영혼의 단비입니다. 비가 촉촉하게 내려야 만물이 소생하고 푸른 초원이 되듯이 우리 심령에도 영혼의 단비가 내려야 신령한 은혜가 살아나고 건강한 믿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웃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노하셨다거나, 굶주림과 갈증으로 고통을 당하셨다는 기록은 있으나, 그의 생애에 웃음의 기록은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 53장에서 예언하기를 주님은 슬픔을 많이 겪었으며 질고(疾苦)를 아는 자”(3) 라고 했습니다. 그의 용모는 너무 상하여 아무도 그를 바라 보지 않을 정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기쁨으로 웃으실 일이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11:35에 예수님은 그의 친구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셨습니다. 그가 우신 것은 그의 사랑하는 친구가 죽었기 때문에 우신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는 곧 다시 살아날 것을 아셨습니다. 잠시 후에 다시 살아 날 텐데 뭐가 슬퍼서 울었겠습니까? 예수님이 우신 것은 친구가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저렇게 고통 가운데서 다 죽어야 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941-44에서 보면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우셨습니다. 왜 우셨습니까? 예루살렘의 멸망을 아시고 우신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하고 살기가 좋은 도시이지만 그 속에는 죄악이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를 중상모략해서 죽이는 도시가 예루살렘입니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아름답고 평온하지만, 그 속의 죄악은 추하기가 이를 때 없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신 이유가 뭡니까? 그 속의 죄악을 보고, 얼마 있지 않아 멸망해 없어질 도시 예루살렘,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허물어질 예루살렘, 그 성전과 그 도성을 보면서 우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인이 왜 애통해야 합니까? 성도가 왜 애통해야 복이 임합니까? 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까?

 

첫째는, 자기의 죄 때문에 애통해 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세 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난 후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하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 나는 곤고하고 비참한 사람이로다. 내 지체 속에서 또 하나의 육체의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구나,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내랴!” 라고 외쳤습니다. 자기 자신의 비참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 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 육체가 죄의 법을 섬긴다라고 한탄합니다.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없고, 내가 원하는 바 선한 것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것만 행한다고 괴로워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한심하고, 너무 비참해서 비탄에 잠겨 울부짖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죄 때문에 애통해 하는 자들입니다. 육신에 매여 사는 것이 한심스러워 한탄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철저히 절망감을 가지는 자들입니다. “나는 노력해도 안됩니다. 잘 믿어 볼려고 해도 안됩니다. 술 끊을려고 해도 안 됩니다. 경건해 지려고 해도 안됩니다. 내가 이제 예수 믿은지 이 정도 되었으면 무언가 이제는 제대로 되어야지, 이제 제대로 예수 좀 믿을 수 있어야지, 왜 아직도 이 모양입니까?” “이제 집사 쯤 되었으면 이제는 과거의 습관을 청산하고, 이제 정신 좀 차리고 신앙생활 제대로 해야 되는데, 아직도 세상적이고, 아직도 옛날 그대로이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이런 것 때문에 내 자신이 한심스럽고, 서글프고, 이런 것 때문에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나는 왜 잘 안됩니까? 나는 왜 아직 이 모양입니까? 나는 왜 아직 술을 못 끊는 겁니까? 나는 왜 아직 담배를 못 끊는 겁니까? 나는 왜 아직 세상이 좋고, 세상에서 즐기며 살고 싶습니까? 나는 왜 아직 주님을 온전히 의지 하지 못하고 삽니까?” 이런 것 때문에 애통해 하고, 이런 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게 성도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성도는 애통이 있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성도는 애통이 있습니다. 비참함 때문에 애통이 있습니다. 내 마음 먹은대로 잘 믿지 못하는 것 때문에 애통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애통이 있는 자가 복이 있는 자입니다. 이런 애통이 있는 자에게 주님은 위로의 손길을 내미시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위로의 축복을 받습니다. 할렐루야!

 

<찬송가190>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애통하며 회개할 맘 충만하게 하소서.

예수여, 비오니 나의 기도 들으사, 애통하며 회개할 맘 충만하게 하소서.

정케하고 위로하사 복을 받게 합소서, 충만하게 하시오니 무한 감사 합니다.

예수여, 비오니 나의 기도 들으사, 애통하며 회개할 맘 충만하게 합소서.”

 

세상 사람들은 이런 것 가지고 애통해 하지 않습니다. 성도가 아닌 자는 진정한 애통이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기 때문에 애통이 없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애통해 하는 것을 멸시합니다. 미련하다고 합니다. 이런 애통은 시대에 맞지 않다고 보기 때문에 감춥니다. 안 그런척합니다. 속은 괴로운데 겉으로는 웃습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봐도 서글프고 한심스러운데, 겉으로는 안 그런척하고 삽니다. 애통을 감추고 웃음을 드러냅니다. 여러분! 애통해야 할 때 그것을 무시하고 웃는 것은 죄악이요, 저주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625에서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도가 애통해 하면 왜 복이 있습니까? 참된 기독교인은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도 애통해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애통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타인을 위해서도 애통해 합니다. 그리고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애통해 합니다. 느헤미야나 예레미야나 역사의 위대한 신앙인들은 타인과 나라를 위해 애통해 했습니다. 우리는 신문을 보면서 애통해 하고, 정치가 잘못되어 가면 애통해 하고, 경제가 어려워지면 애통해 하고, 나라가 혼란스러우면 애통해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죄를 보면 애통해 하고, 세상의 타락과 불건전함을 보면서 애통해 해야 합니다. 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애통해 하시면서 우셨습니까? 예루살렘의 죄악과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왜 우셨습니까? 인간의 죄악과 죽음을 보면서 안타까움으로 우신 것입니다. 인간의 죽음이 이렇게 비통하고, 아픈 것임을 알기에 우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죽음을 가져오고, 생활을 망쳐 놓고 생활을 불행하게 만든 죄라고 하는 무섭고 추하고 더러운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애통은 세상의 정신과는 정 반대입니다. 세상은 실재 상태를 바로보지 못합니다.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지만, 아무도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을 보고 울었는 자가 없었습니다. 세상은 실재의 내면을 볼 줄 모릅니다. 세상은 실재의 내면을 무시하고 행복해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표어는 먹고, 마시고, 즐기자입니다. “세상의 골치 아픔 일에는 매이지 말자.” “거저 즐기면서 살자입니다. 세상에는 좋은 게 다 좋은 겁니다. 울 일이 없습니다. 웃음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는 세상과 비교했을 때 너무 역설적일 때가 많습니다. “애통 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애통해 하는 사람이 참으로 복이 있다이것은 하나님의 역설입니다.

 

자기의 죄 상태 때문에 참으로 애통해 하는 사람은 벌써 회개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애통해 하는 사람은 그 위에 벌써 성령이 강하게 역사한 사람이요,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철저히 애통해 하는 사람은 주님을 찾은 사람이고, 벌써 주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애통이 있기 전에, 애통에 앞서 먼저 예수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성도가 애통해 하면 왜 복이 있습니까? 자기의 가족과 자녀를 위해서 애통해 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328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면서 옆에서 울고 있는 여인들을 향하여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는 자기 자녀를 위해 기도하며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주여, 우리의 자녀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자녀를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자녀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녀 위해서 십자가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녀를 낳아 키우면서 힘써 애써 수고 하지 않으려고 하고, 돈으로 다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리고는 돈이 없어서 못하겠다고 합니다. 돈만 있으면 자녀의 양육은 다 되는 줄 압니다. 돈만 마음껏 투자하면 자녀가 저절로 자라는 줄 압니다. 아닙니다. 눈물이 없고, 기도가 없고, 부모의 희생이 없는데 어떻게 돈만 있으면 됩니까? 눈물 없이, 기도 없이 돈 만으로 키운 자녀는 반드시 훗날에 부모의 가시가 됩니다. 그 자녀 때문에 노년에 애통하며 울어야 하는 날이 옵니다.

 

 

여러분! 애통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심령이 늘 가난해서 영이 늘 슬픈 사람들입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늘 주님께 손을 내밀고, 주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애통하는 사람들은 영이 늘 슬픈 사람이지만, 정신이 병적으로 우울한 사람은 아닙니다. 병적으로 세상에서 고독으로 고뇌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영이 늘 위로 받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비참한 사람은 아닙니다. 늘 서글픈 인생으로 자기를 낙심 시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심각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신경 쇠약증에 걸릴 정도로 고민하고 갈등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신중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냉정하거나 무엇이든지 부정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심각하게 무엇이든 고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따스함이 있고, 애정이 있습니다. 늘 긍정적입니다. 그 이유는 애통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늘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눈물을 흘려 보았습니까? 지금의 내 삶이 감사합니까? 지금의 내 처지가 늘 감사합니까?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뒤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그를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를 더 위로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 두 손 높이 올리시고 통성으로 기도 하십시다.

나에게 애통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심령이 가난하게 하옵소서. 심령이 가난하여 애통이 일어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