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원고/산상복음

8.[산상복음8]온유한 자의 복(2)

☆ 주님의 머슴 2021. 3. 8. 09:24

주일설교(2015/07/05) - 산상복음 설교(8)

온유한 자의 복(2)

5:5 찬송: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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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7장에 나오는 산상복음은 우리 기독교인이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계속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산상복음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변화를 요구합니다. 기독교인은 세상체제에 순응하며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순응하고, 교회라는 공동체와 세상이라는 공동체가 사람들 눈에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면, 교회는 이미 죽은 것이 되고, 교회가 이미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대표적으로 일곱 교회가 나오는데, 그 중에 칭찬이 없는 교회가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사데 교회를 향하여 주님이 책망하기를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3:1-2) 라고 책망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어서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3:15,17)라고 책망합니다.

오늘날 현대교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대교회의 모습,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의 신앙상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핍박도 없고, 열심도 없고, 변화가 없는 신앙으로, 세상과 타협하면서 세상체제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현대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산상복음은 이 세상을 향하여 대항하는 말씀으로 끊임없이 변화하여 신앙을 지키고, 세상을 이기고, 사단을 이기고, 세상 문화에 대항해서 나의 신앙이 변질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산상복음은 끊임없이 변화를 요구합니다. 세상문화를 대항하는 기독교문화를 만들어라 는 것입니다. 산상복음은 세상 문화와는 다른, 기독교문화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산상복음 중에 이 팔복은 무엇이 기독교인인가? 기독교인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기독교인은 어떤 사람들인가? 기독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기독교인의 심령은 어떤 모습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인은 심령이 가난해야 하며, 기독교인은 애통하는 자이며, 기독교인은 온유한 자이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이며, 기독교인은 긍휼히 여기는 자이며, 마음이 청결한 자이며, 화평케하는 자이며, 의를 위해서는 핍박을 받는 자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복을 추구해도 세상적인 방법으로 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팔복의 방법으로 복을 추구한다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지난 주일에 이어 온유한 자의 복에 대해서 한번 더 말씀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온유한 자의 복애통하는 자의 복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사이에 나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팔복은 앞뒤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팔복은 아무렇게나 흩어 놓은 게 아닙니다. 순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앞뒤의 복과 관계가 깊습니다. 그리고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갑니다.

 

처음 출발이 심령이 가난한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모든 성도가 성도가 되는 것은 심령이 가난한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이 기독교의 출발이요, 기독교인이 되는 시작입니다. 기독교인이 되면 누구든지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게 되니까 자기의 죄가 드러나고, 죄를 발견하게 되고,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애통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발견하고 애통함이 일어날 때, 마음이 온유해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온유해지면 점점더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팔복은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면서 점점 확대되면서 더 깊이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마지막 열덟번째 복에서 천국에 들어감으로 천국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팔복의 첫 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은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과 무능을 인식하기를 요구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늘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면전에 일대일 관계로 하나님을 대면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면전에 일대일로 서 있는 자는 모든 것이 다 드러납니다. 내 자신이 죽은 듯이 납작 엎드리고 무기력하고 무능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모세도 그랬고, 이사야도 그랬고, 예레미야도 그랬고, 에스겔, 다니엘, 사도 요한, 성경의 모든 인물들이 하나님을 대면하고, 하나님의 면전에 일대일로 놓여 있음을 깨달았을 때, 다 엎드리고, 죽은 자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기독교인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복은 우리가 가진 것이 하나도 없구나, 나는 무능하구나,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나는 부족한 존재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나는 심령이 가난합니다. 나는 참으로 무력하고 나약합니다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나의 신분이 어떠하든, 내 사회적 지위가 어떠하든, 내가 심령이 가난함을 느낄 때, 그 다음 복인 애통의 복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두 번째 단계인 애통의 단계에서 나의 죄성, 나의 성품이 들어나게 되고, 내 속에 거하는 죄 때문에 나의 인간성이 어떤 인간성인가를 깨닫게 되고, 통곡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은혜를 받고 회개가 일어나는 자는 은혜의 눈물, 감사 감격의 눈물과 동시에 회개의 애통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애통의 은혜가 있은 후, 세 번째 단계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온유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 자기 속에 있는 추하고 더러운 죄인의 모습을 보고는 온유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는 위대한 것입니다. 온유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입니다. 온유는 큰 권세입니다. 온유는 진리의 수호자입니다. 온유한 자는 진리를 굳게 믿습니다. 온유한 자는 진리를 위해 목숨을 버립니다. 그래서 순교자들이 온유한 자들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약한 자가 아닙니다. 온유한 자는 강한 자입니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대면하여 만난 자이기 때문에 강합니다. 세상을 이깁니다. 말이 없고, 표현하지 않지만, 변질되지 않습니다. 내면이 강합니다. 온유의 영이 가득차 있습니다.

 

온유는 하나님을 향하여서도 온유하지만, 사람을 향하여서도 온유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온유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말씀을 읽을 때나, 기도할 때나, 설교를 들을 때나 내가 깨닫고, 내가 나에게 내가 죄인이구나, 나는 철저하게 무능한 인간이구나, 나는 죄와 악함이 가득찼구나 하면서 깨달아지고, 그런 느낌과 생각이 떠오를 때는 화가 안 납니다. 은혜로 받아 드립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나에게 그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다른 사람이 나를 정죄하고 나를 죄인이라고 말할 때 본능적으로 분개합니다. 심지어 설교하는 목사님이 설교를 통해 여러분들은 철저한 죄인입니다. 구재불능의 죄인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죄와 악함이 가득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속으로 기분 나쁘고 분개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온유한 자가 아닙니다. 온유는 앞의 복들보다도 우리를 더 겸손하게 하고 더 굴욕을 느낄 때에도 온유하게 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말하는 온유는 세상이 말하는 부드럽고 온순한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태생적으로 성격이 부드럽다든가, 온순하거나 화를 잘 내지 않는다든가, 점잖은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온유는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수준 높은 하늘로부터 임하는 것입니다. 온유의 영이 내 심령 속에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온유는 외적 태도일 뿐만 아니라, 내적 정신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외적 행동으로도 온유해야 하지만, 내적인 정신적으로도 온유해야 합니다. 내 속이 온유하지 않으면, 내 외적 행동도 온유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입술과 입을 통제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참 기독교인입니다. 유명한 청교도 목사님 중에 한 분은 우리 성도가 가져야 할 온유는 성이 나서 치는 일격을 참고 견디라. 그러나 더 나아가 성난 일격을 참을 뿐 아니라 그것을 조금도 참는다거나 견딘다는 느낌을 갖지 않는 상태까지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온유, 기독교가 말하는 온유가 무엇입니까? 온유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온유는 두 가지입니다. 온유는 하나님을 향한 나의 자세인 동시에 나 자신에 대한 자세로 다른 사람에 대한 관계에서 나타나는 나의 태도의 표현입니다.

여러분! 온유한 사람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온유는 심령이 가난함애통함뒤이어서 오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고, 애통이 일어나지 않고는 절대로 온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악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지 않고는 제대로 온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온유한 자가 되기 때문에, 정말 온유한 자는 교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는 자랑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주장할 정도로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온유는 자기를 주장하라. 자기를 표현하라고 말하는 오늘의 인기 심리학를 부정합니다. 온유는 이것을 반대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또 온유한 사람은 자기를 위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모든 권리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의 지위나 특권이나 소유물이나 신분을 요구 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자는 빌립보서 2장에 있는 말씀처럼 예수님을 그대로 닮습니다.

“(1)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1-8)

이것이 온유의 모델입니다. 온유는 예수님처럼 하는 것입니다. 온유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민감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나 자기의 이익을 먼저 살피지 않습니다. 그리고 온유는 스스로 먼저 방어적 자세를 취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민감성, 자기 자신을 너무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 자기 자신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 대해 염려하거나 민감하거나 의식하거나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예민하게 의식하고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고, 신앙도 없고, 온유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연민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온유한 자는 남의 위로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평가하든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자는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자는 자기를 나쁘게 평가해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 나쁘다는 말에 요동하거나 고민하거나 기분 나빠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또 좋게 평가한다고 해서 좋게 생각하고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향한 그 칭찬을 늘 낮추어 받아드립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평가에 늘 초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온유한 자는 늘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의식합니다. 자기 자신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는 늘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늘 배후로 삼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온유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이 어떻게 대하고 말하든 그에 대하여 생각하는 바를 고맙게 여기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유의 본질입니다. 온유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나의 태도와 품행에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온유는 예수님처럼 조용한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한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자는 늘 귀를 기우리고 배우려고 합니다. 교만한 자는 절대로 배우는 자세가 없습니다. 온유한 자만이 배우는 자세를 가집니다. 늘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 다음 복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단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입니다. “나는 이제 됐다. 그만 배워도 된다. 나는 부하다그러면 그는 아직 온유한 자가 아닐뿐더러, 팔복의 문턱에도 들어오지 못한 것입니다.

 

끝으로, 저는 온유를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온유는 우리의 모든 것, 즉 우리의 자신, 우리의 권리, 우리의 대의명분, 우리의 장래의 전체를 하나님의 손에 일임하는 것입니다. 온전히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당하게 고통을 당하고, 부당하게 핍박을 당해도, 부당하게 멸시를 받아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하나님의 손에 일임해 버리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219절이하에서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2:19-24) 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온유한 자의 모습입니다. 온유는 예수님처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1219에서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원수 갚는 것도 주님께 맡겨버려라는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보상하겠다고 주께서 말씀하신다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온유는 원수 갚는 것까지도 주님께 맡겨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우리를 맡기기만 하면 주님이 대신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신과 우리의 대의와 우리의 권리와 기타 모든 것을 내 영까지, 내 생각과 마음까지 하나님께 일임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유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는 하나님을 인생의 배경으로 삼고, 하나님께 다 맡기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다른 모든 복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이 강하지만, 이 온유의 복만은 땅의 기업을 받습니다. 이 땅의 복이 강합니다. 이 땅의 기업을 받습니다. 땅을 정복합니다. 사람을 정복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습니다. 물질의 축복도 따릅니다.

 

온유는 성령께서 우리들 속에 만드시는 하나의 성격입니다. 온유는 성령이 직접 만드시는 성령의 열매입니다(5:23). 온유는 성도에게만 주시는 복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세상 사람들에게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에게 이미 성령이 먼저 작업을 하시고, 성령이 내 속에 계시기 때문에 온유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온유의 복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