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산상복음10]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2)
주일설교(2015/07/19) - 산상설교(10)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2)
마태복음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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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러면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위로를 받습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러면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만족함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라는 이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된다면, 온 세상은 평화가 올 것이고, 진정으로 사람들은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 복도 세상의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누구든 주리고 목마른 것을 싫어합니다. 아무도 주리고 목마른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고, 이렇게 될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오늘 기독교인의 또 하나의 특징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복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기독교는 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세상은 너무나 다르고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은 온 세상이 행복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온갖 행동과 야심과 모든 일과 모든 노력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커다란 삶의 동기입니다. 행복하기 위해 일을 하고, 행복하기 위해 사람을 만납니다. 모든 것이, 모든 일이 행복하기 위한 목적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비극은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원하고, 행복을 갈망하면서 찾고 있지만, 행복을 발견하지 못하고,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비극적인 사건들은 행복하지가 않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다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전쟁이 생기고, 폭력이 생기고, 미움이 생기고, 혼란이 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행복하면 불평, 불만, 미움, 시기, 싸움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행복하면 세상에 모든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설령 문제가 생겨도 행복하면 참고 잘 견디는 것입니다.
인류역사에 유명한 학자들이 한 사람도 행복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분명한 정답을 제시해 준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행복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무족건 행복을 찾고, 행복해지기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어디서 옵니까?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닙니다. 환경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으로부터 행복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행복한 것 같았는데, 불행해지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행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리고 행복은 변하지 않습니다. 늘 한결 같고, 영원합니다.
행복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오늘 산상복음은 우리에게 행복이 무엇인지 가르쳐줍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행복에 목말라 하며 행복을 좇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에 주리고 목말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행복해지고, 복이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과 복만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진정한 행복과 복을 놓쳐 버린다는 것입니다. 행복과 복은 우리를 피해서 지나가 버립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행복과 복은 직접 구해야 할 것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행복과 복은 항상 다른 것을 구하는 결과로 온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교회 밖에 있는 세상 사람들이나, 교회 안에 있는 기독교인들이나 다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이 세상에는 누구든, 기독교인이든, 기독교인이 아니든, 다 행복해지고 싶고, 복된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행복해지려고 쾌락을 찾는 것입니다. 이 쾌락을 통해서 삶의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을 잊어버리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행복을 찾으려, 복을 찾으려, 그것을 목표로 살아갑니다. 그래도 이것을 찾지 못합니다. 한평생 찾아다니지만 찾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시작부터 끝까지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를 구하는 사람만이 참으로 행복해질 수 있고, 복된 삶을 살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의를 구하는 사람들만이 참으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행복을 의보다 먼저 찾을 때 행복은 오지를 않습니다. 복을 의보다 먼저 취하려고 할 때 복은 오지를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이론은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은 너한테 달린 거야! 행복한 삶은 너의 마음 먹기에 달린거야! 행복은 누구가 갔다 주는게 아니야, 행복은 너의 손에 달린 거야, 너가 마음 먹기에 달린거야! 행복은 쟁취하는 거야!” 아닙니다. 그것은 속는 것입니다. 행복은 내가 만드는게 아닙니다. 행복은 내 마음에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다 이렇게 속입니다. 세상은 너 자신을 믿고, 너 자신을 의지하라고 합니다. 힘이 너한테만 있는 거야, 행복을 쟁취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보세요. 세상은 다 행복을 쟁취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지지 않고, 빼앗고, 속이고, 죽이고, 자기의 힘만을 의지하고, 힘을 길으려고 애를 씁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복이 오지 않고, 행복을 도로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세상은 기본적인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인생의 심각한 에러(grave error)현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왜 오늘날 사람들에게 인생의 에러가 생깁니까? 의를 먼저 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통스런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대체로 이런 환자는 그 고통에서 해방 받고자 하는 한 가지 욕망만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통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환자는 그에게서 고통을 면해줄 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해 보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환자는 현재의 자기 고통만을 제거해 보려고 온갖 방법을 다 사용해 봅니다.
그러나 이 환자는 진정으로 그 고통에서 해방되려면 신실한 의사를 만나 그 고통의 원인을 찾아내어 치료해야 합니다. 만약 서투른 의사나 신실하지 못한 의사를 만난다면, 그 고통만 잠시 멈추게 하는 데만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아프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건강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썽의 원인은 남아 있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또 고통이 제발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실한 의사는 그 고통의 원인을 완전히 제거하는 치료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의 어두운 그림자들을 보십시오. 인간의 삶의 고통은 그 원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고통의 궁극적인 치료법은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지 그 고통을 치료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저지르고 있는 잘못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은 말합니다. “나는 고통을 제거하고 싶다. 나는 나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지 하겠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세상의 쾌락으로 빠지고, 마시자. 먹자. 하면서 깊은 타락의 늪으로 빠지고, 세상의 즐거움을 찾아 잠시 고통을 잊는 쪽으로 갑니다.
여러분, 행복과 복에 주린 사람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먼저 와야 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없는 상태에서 복과 행복을 찾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교회 밖에 세상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교회 안에 신실한 믿음을 가졌다 하는 자들에게도 이런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우리 성도들도 복에 먼저 굶주리면 안됩니다. 복 받기 위한 것에만 관심을 가지면 안 됩니다. 교인들 중에도 복을 찾아 여기 저기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복 받는 데만 관심을 가지고, 나의 현재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문제만을 먼저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신령한 것을 경험하고 싶어서, 먼저 하나님을 체험하고 싶고, 성령을 체험하고 싶고, 신령한 은사를 체험하고 싶어서 먼저 이것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의에 목말라 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목말라하고, 기도에 목말라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에게 이것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체험, 성령의 은사는 말씀에 충만해야 합니다. 말씀에 목말라야 합니다. 기도가 뒤 따라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철저한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입니다. 이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사모하고 구하는 자에게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목말라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기본적인 관계에 목말라하지 아니하고 먼저 복과 신령한 은사와 체험만 추구한다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고, 얄팍한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속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이 말씀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의”가 무엇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의는 사람들이 말하는 이 세상의 일반적인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의(general righteousness), 단순한 도덕인 의, 단순한 존경받고 착하고 선한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의는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로마서에서 말하는 “칭의(稱義Justificaion) –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의”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이상의 의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의를 세분(細分)해서 나누면, 첫째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에 대한 욕구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기독교의 의는 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데, 죄로부터의 해방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으려고 하는 욕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으려고 하는 욕구,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기초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어떤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으려고 하는 욕구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어디에서부터 생겼습니까?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의 옳은 대로, 자기의 생각대로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 살면서 잘못되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길이 막히고,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 갇혀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악의 진흙탕 속에서 반복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가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 막아 인간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과의 관계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복을 가로 막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죄와 반역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 존전에서 밀려난 사실을 알고, 옛 관계로, 하나님 존전에서의 원초적인 최초의 의의 관계로 되돌아가기를 바라고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최초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존전에서 의롭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하나님과의 가장 좋은 관계로 하나님과 함께 거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바로 이것을 바라고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의”입니다.
둘째는, 이 “의”는 필연적으로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욕망을 의미합니다.
심령의 가난이 무엇이며, 내 속의 죄로 인하여 애통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나서 우리는 당연히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소원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 복들을 살펴보면서 기독교인은 그가 발 딛고 사는 세상이 온통 죄와 사탄의 조종을 받고 있음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가 악한 세력의 통제를 받고 있으며,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속에 역사하는 영인 공중권세 잡은 자에 따라” 행하고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그는 “이 세상 신이 믿지 못하게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여러 가지 일들에 이끌려” 살게 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게 해서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르게 해서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살아가도록 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이것을 보고 알므로 이것에서 해방되려고 애를 쓰는 사람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사탄의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인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고백한 것처럼, “나의 지체 속에 또 다른 법이 있어 나도 모르게 질질 끌고 가는 그 악한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죄는 밖으로 드러난 죄보다, 드러나지 않은 내 속에 숨어 있는 죄의 뿌리가 더 무서운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죄를 지으려는 죄의 뿌리로부터 해방되려는 욕망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죄가 나쁘다는 것을 알지만, 그는 여전히 그것을 원합니다. 그는 죄를 좋아하고, 죄를 원합니다. 그러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사도바울처럼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내 지체 속에 또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아 가는 구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하면서 몸부림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내 속에 숨어 있는 죄에서 해방되려는 간절함이 있는 자인 것입니다. 이“의”는 바로 죄에서 벗어나려는 간절함입니다.
셋째는, 이 “의”는 적극적으로 성결해 지려는 소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기 위해 소원하는 것입니다. “의”는 인생의 최고의 욕망인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예수님 닮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최고의 소원, 최고의 욕망은 예수님 닮는 것입니다.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예수님 닮기 원함이라.
예수님 형상 나 입기 위해 세상의 보화 아끼잖네.
예수님 담기 내가 원하네, 날 구원 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 속에 지금 곧 오사 주님의 형상 인치소서.“♬ (452장)
♬“주님의 마음을 본 받는 자, 그 맘에 평강이 찾아옴은,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주님의 마음 본 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455장)
여러분,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갈망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소원하는 것입니다. 주리고 목마름은 고통입니다. 심각한 궁핍의식입니다. 주리고 목마른 것은 소원하는 사람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주리고 목마름은 그것이 만족하기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다른 것이 재미가 없습니다. 다른 것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삶이 공허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해결되면 배부른 것입니다. 만족함을 얻는 것입니다.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작고도 작지만, 그러나 인간의 마음 속에 이 세상의 모든 것, 우주의 모든 것을 다 채워도 채워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채워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가 내 속에 채워지면, 나는 만족함을 얻는 것입니다. 최고의 기쁨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습니다. 왜요? 내가 만족할 수 있고, 풍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