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산상복음11]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주일설교(2015/07/26) - 산상설교(11)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마태복음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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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팔복은 정말 우리에게 복을 받는 비결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2)팔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단순한 복이 아니라 여러 가지 깊이 있는 신비로운 복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3)팔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다양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4)그리고 팔복은 한 단계 한 단계 계단을 밝아 올라가듯이 올라가는 복입니다. 더 깊이 있는, 더 값진 단계로 올라가는 복입니다. 5)팔복은 첫 번째 복,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라는 말로 시작해서 여덟 번째 복인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라는 말로 끝납니다. 그래서 팔복은 천국으로 시작해서 천국으로 끝납니다. 팔복은 천국을 먼저 가진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팔복은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천국 안에 들어와 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그리고 천국도 또 단계가 다릅니다. 첫 번째 주어지는 천국과 마지막 여덟 번째 주어지는 천국은 단계와 깊이가 다릅니다. 예를들면 첫 번째 천국은 대궐로 치면 대문을 열고 지금 막 들어와 있는 정도의 천국입니다. 여덟 번째 복의 천국은 대궐의 중심인 임금님을 배알하고 임금님 앞에서 모든 상금을 받는 상태의 천국입니다.
오늘 다섯 번째 복은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라고 선언합니다. 앞에 나오는 긍휼은 1단계 긍휼이고, 뒤에 나오는 긍휼은 2단계 긍휼입니다. 앞에 나오는 긍휼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긍휼의 영을 가진 자를 말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
(1단계의 긍휼) (2단계의 긍휼)
<하나님께 받은 긍휼로(성도라면 누구나 골고루 받은 긍휼) 긍휼를 베풀 때 주어지는 더 높은 수준의 긍휼>
이 긍휼은 구약 성경에 가장 중요한 단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구약성경에서 150회 이상 나오는 단어입니다. 긍휼은 히브리어로 ‘헤세드(chesedh)’ 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90% 이상이 하나님에 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행동에 관하여 언급할 때 사용했습니다. 이 ‘헤세드’ 라는 단어는 긍휼 이라는 단어로도 번역 되었지만, 오히려 사랑과 자비라는 말로도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긍휼’이라는 ‘헤세드’는 하나님에 관해서 거의 사용되었으며,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다정스러움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긍휼은 하나님의 사람과의 모든 관계의 기초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가지는 기초적인 관계가 이 긍휼입니다. 또 긍휼을 ‘인자’또는 ‘인애’라는 말로도 번역했습니다. (미7:18)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시36:5)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시57:10)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고, 하나님의 긍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 벌거벗은 것을 가죽옷을 입혀주시는 것부터, 노아 홍수에서 방주를 통해 노아의 가족을 구원하는 이야기,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이야기,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는 이야기, 광야 40년동안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이야기, 다윗을 통해서 이스라엘에 복 주시는 이야기, 바벨론에서 70년후에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이야기 등등 ...............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인류를 구원하는 사건까지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긍휼, 인자하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또는 인류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증명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위대한 인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긍휼을 보게 됩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증명될 뿐만 아니라, 자연 속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가득차 있습니다. 땅은 하나님의 긍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시119:64)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비가오고 햇빛이 비치는 것도 하나님의 긍휼하심, 인자하심입니다. (욥37:13) “혹 징벌을 위하며 혹 토지를 위하며 혹 긍휼 베푸심을 위하여 구름으로 오게 하시느니라.”
사람이 어디에서든, 역사를 통해서든지, 자연의 조화들을 통해서든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찾을 수 있고,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대해서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영적인 눈이 열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만 보려고 하지 말고,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멀리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바로 가까이에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의 넘치는 긍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맺어지는 관계를 결정하는 것도 긍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호소하며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에서는 “주여, 주의 인자(긍휼)로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시6:4, 31:16, 49:26)라고 했습니다. .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 했을 때,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했다고 느끼고 용서를 구할 때의 근거도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모세가 자기 백성이 패역하고, 불순종할 때 용서를 구하는 장면을 보면, 모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는 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인자 하심과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긍휼을 가진 자는 성실합니다. 진리 앞에 확고부동합니다. 믿음이 확고부동합니다. 충실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가진 자는 진실합니다. 겸손합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이 많습니다. 온유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릅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내가 하나님의 긍휼로 인하여 요동치 않는다”(시21:7) 고 합니다. 또 사람이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 이라고 했습니다(시33:18, 57:3). 우리가 실패 했다가도 다시 일어 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 것도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삶의 원천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가진 자들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할 때에 이 “긍휼”은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자를 말합니다. 긍휼의 영을 가진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가지고 긍휼을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누구나 긍휼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는 누구나 성령의 사람이기 때문에 긍휼을 베풀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 한 단계 더 높은 긍휼하심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말은 1단계 긍휼에서 한 단계 뛰어 오른 2단계의 긍휼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마25장 29절에서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고 했습니다. 있는 긍휼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내가 가진, 내 속에 잠재해 있는 긍휼로 더 큰 긍휼을 소유합시다. 처음에 다섯 달란트 받는 것도 긍휼입니다. 두 번째 덤으로 받는 한 달란트는 그 다음 단계의 긍휼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복음은 일체의 강조점을 행위에 두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행위보다도 인간의 삶의 자세에 두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무언가 행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기독교를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무언가 행하기에 앞서 어떤 존재인가입니다. 존재 가치에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어디에 더 무게를 두느냐? 존재에 더 무게를 두느냐? 행위에 더 무게를 두느냐? Being 이냐? Doing 이냐? 삶의 자세가 행위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존재의 가치를 깨닫는 것이 행위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존재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에 따라 그렇게 행동하고 삶을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존재냐에 따라서 거기에 맞는 행동을 하고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인이 되려고 노력하고, 애쓰고, 힘써야 기독교인이 되어지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힘쓰고 노력한다고 기독교인이 되는게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는 기독교인이 되려고 힘쓰고, 애쓰고 있는게 아닙니다. 우리는 벌써 기독교인이 되어져 있습니다. 기독교인 되어 가는 중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인 되어져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 는 말은 내가 긍휼을 얻기 위해, 내가 긍휼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미 내 속에 하나님의 긍휼이 와 있는데, 그 긍휼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팔복은 항상 자기의 존재 가치, 항상 내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야 되는 것을 말합니다. 행동으로 되어져 갈려고 애를 쓰는 게 아니고, 이미 되어져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받은 백성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 받을 때, 이미 예수를 믿을 때, 거듭날 때, 이미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구원 받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거듭나게 되어 예수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내 속에 성령이 이미 거하시고, 성령의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것입니다. 이 긍휼하심을 입은 존재로서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더 큰 한 단계 뛰어 오른 긍휼하심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칫하면 오해하게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라고 했기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해야만 하나님도 나에게 긍휼하실 것이며, 내가 용서해야만 나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 내가 용서 받는 조건은 내가 용서하는 것에 달려 있다’ 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큰 오해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용서하면 우리도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이고,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도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주기도문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키지도 못하는 주기도문을 뭐할려고 하느냐? 면서 주기도문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빚진 자를 탕감해 주는 비유”가 나옵니다. 여기에 빚을 지고 있는 자인 한 종이 그의 주인으로부터 빚을 갚으라는 요구를 받고, 그 종은 갚을 돈이 없어서 빚을 갚지를 못하니까 주인이 불쌍히 여겨서 몽땅 빚을 탕감해 줍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에게 조금 빚을 진 다른 동료에게 빚을 갚으라고 독촉을 합니다. “조금만 더 참아 주시면 꼭 , 모든 것을 다 갚겠다” 사정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그 빚진 동료를 감옥에 쳐 넣습니다. 그런데 다른 종들이 이것을 보고 주인에게 가서 고하게 됩니다. 주인은 이 보고를 받고 너무 괘심해서 잔인하고 불의한 이 종을 불러다가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탕감해 주었건만,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 같이 네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히 마땅치 아니하냐 ” 하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들어 가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35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진심으로 형제를 서로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자, 이제 우리는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용서하지 않는 정도에 따라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도 있고, 못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고, 용서하느냐에 따라서 긍휼을 받고, 용서를 받는 것으로 한다면 , 우리가 용서를 많이 하고, 긍휼을 많이 베풀면 용서를 많이 받고, 긍휼을 많이 받고, 적게 베풀면 적게 받는다면 두 가지 면에서 기독교의 교리가 문제가 됩니다. 이런 잣대를 엄격하게 율법적으로 대하게 된다면, 첫째는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죄를 용서 받을 수 없고,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잣대로 엄격하게 심판을 한다면, 아무도 죄사함 받지 못하고 천국에 못 들어 갑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신약성경에서 가르치는 은혜라는 말은 다 사라져야 됩니다. 값없이 은혜로 구원 받았다는 말은 맞지 않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다시는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 받았다는 말은 틀린 말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용서와 긍휼은 내가 먼저 예수를 믿어야 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용서와 긍휼이 없습니다. 또 용서와 긍휼은 내가 참으로 회개할 때 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진정한 회개를 동반합니다. 내가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내가 이미 긍휼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용서한다는 말은 내가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나에게 이미 ‘용서의 영’, ‘긍휼의 영’ 이 임하여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회개함으로 예수를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다면 내 속에 이미 하나님의 긍휼이 나에게 와 있는 것입니다. “긍휼의 영”이 성령과 함께 나에게 임해 있습니다. 그러면 자동으로 긍휼을 베풀게 되고, 자동으로 용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긍휼의 영’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보는 눈은 어떤 눈일까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될까요? 긍휼의 영을 가진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요? 이런 그리스도인이 필연적으로 가지게 되는 마음이 뭘까요? 여러분! 진정한 기독교인, 긍휼을 체험한 기독교인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봅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을 어떤 눈으로, 어떤 마음으로 보게 될까요? 옆에 믿지 않는 남편, 믿지 않는 가족, 친구등을 어떤 마음으로 보게 됩니까?
나는 세상의 사람들이 속고 있는 사람들로 보입니다. 사탄 마귀에게 이용당하는 노예로 보입니다. 사탄의 희생물로 보입니다. 불쌍하게 보입니다. ‘긍휼의 영’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보는 눈은 다 긍휼을 받아야 할 불쌍한 인생들로 보이는 것입니다. 세상의 신에 지배를 받고, 세상의 악한 영에 붙잡혀 사는 지옥에 갈 사탄의 노예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만약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나도 똑같이 아직도 그들과 똑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는 겁니다.
여러분! 복음서들을 자세히 읽어 보십시오. 예수님은 긍휼의 영으로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게 아닙니다. 긍휼한 마음으로, 긍휼의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모든 무리를 보시면서 긍휼히 여기시면서 “목자가 없이 헤매고 방황하는 양들”로 보았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마23:37-38)
긍휼의 눈으로 예루살렘을 보시는 겁니다. 겉으로는 평화롭게 보이고,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긍휼의 눈으로는 울어야 할 도시로 보입니다. 망하기 직전의 도시로 보입니다. 사탄에게 붙잡혀 생명의 불이 꺼져가는 도시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도 보십시오. 자기를 못 박는 자들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왜요? 어째서 그렇게 말씀했습니까?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 하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사단의 도구 노릇을 하는 것 뿐입니다. 그들은 죄의 통제와 지배를 받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긍휼의 영을 가진 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경지에 도달했던 자가 있었습니다. 스데반입니다. 스데반 집사도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 했습니다. “그들은 죄에 미쳤습니다. 그들은 내가 주님의 종인 것을 모릅니다. 그들은 나의 주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 신에 의해 눈이 멀어져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들은 책임이 없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스데반은 그들을 불쌍히 여겼고, 그들을 긍휼히 여겼습니다.
진정한 성도는 긍휼의 영을 가진 자입니다. 긍휼의 영을 가진 성도는 세상을 불쌍하게 봅니다. 세상 사람들이 불쌍하게 보입니다. 여러분이여! 우리는 이러한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긍휼의 눈으로 볼 때 세상은 다 불쌍한 자들입니다. 교회를 대적하고, 핍박하는 자들은 불쌍하고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보는 눈이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긍휼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