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원고/마가복음

11.치유 받은 중풍병자

☆ 주님의 머슴 2021. 3. 12. 11:07

<마가복음 묵상>

11.치유 받은 중풍병자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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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2: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2: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2: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2: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2: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2: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2: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2: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많은 무리가 예수님께 나왔다. 문 앞에까지 들어 설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 왔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를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것이 틀림없다. 이것을 아는 자는 틀림없이 예수님께 나아온다. 이 중에 대부분은 병을 고치고자하는 바램으로, 혹은 기적을 보기 위해서, 혹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어떤 말을 하는지 정탐하기 위해서 왔을 것이다.

 

어째든 예수님이 가버나움의 한 집에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나왔다. 우리는 나의 영혼을 위해 기회를 잘 이용해야 한다. 그 기회를 놓치고 나면, 영원히 그 기회를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내가 예수님 믿고 있는 것은 그 기회를 잘 잡아서 일까? 그렇다면 나는 행운아인 것이다. 복된 자다. 약간의 시간차로 그 기회가 빗나가 버렸다면, 나는 지금도 아직 예수님을 모르고 살지도 모른다. 이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다. 나의 노력이 아니요, 나의 힘이 아니다. 찰나의 순간에 옆으로 빗나가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기회가 지나가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내가 어떠한 방법으로, 어떠한 기회로, 어떠한 환경으로 예수님을 만났든지 하나님이 다가와 주시거나, 주님이 나를 기다려 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이 본문을 보면서 상상을 해 보았다. 예수님이 우리 마을에 오셨다. 옆집의 어떤 분이 예수를 보러 가자라고 말했다. 그래서 따라가 보았다. 그런데 집 앞에 발 들어 설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예수님의 얼굴은커녕 말씀 조차도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실망하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고 하자. 그랬으면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기적은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신앙에는 나에게도 이러한 기적이 일어날 것을 사모하면서 인내하는 것도 필요하다. 인내 없이는 믿음을 지킬 수 없고, 인내 없이는 믿을 수 없으며, 기적을 볼 수 없다.

 

1.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한 집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시는데, 네 사람이 한 중풍병자를 메고 왔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께로 들어 갈 수가 없으니까, 지붕 옥상으로 올라가서 지붕에 구멍을 내고, 그 중풍병자를 들것 채로 달아 내렸다. 예수님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고,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일어나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기 들것을 들고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우리는 여기서 재미있는 현상을 본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향하여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5) 하니까, 옆에 있던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6)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때 예수님이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라고 하시면서 이어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9) 물으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대답도 듣지 않으시고,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10)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11).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걸어 나갔다고 했다. 그리고 거기 있는 사람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라고 했다

 

나도 여러분에게도 한 번 물어 보고 싶다. 중풍병자를 향하여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라고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는가? 여러분들이 직접 그렇게 묻고 답해 보라. 어느 것이 쉬울까? 오늘 여기서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을 빗대서 하시는 말씀이다. 그 당시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은 그런 말만 한다는 것이다. 병자들에게 병을 고쳐주지는 못하면서, 겉으로 아무 표시가 나지 않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는 말만 한다는 것이다. 죄 사함을 받은 것에 대해서는 즉시로 겉으로 아무런 표시가 나타나지 않는다. 죄 사함을 선포할 수 있는 것은 대단한 권세인데, 그 권세가 겉으로 아무런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만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죄 사함을 선포할 수 있는 권세가 있음을 두 가지로 보여 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권세 있는 하나님이심을 두 가지로 보여 주고 있다.

 

하나는 그들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아셨다는 것이다.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6-8)

이것은 독자들에게 누가가 예수님이 죄를 사하시는 분임을 살짝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정말 일어나 상을 가지고 걸어갔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죄를 사하시는 능력 있고, 권세 있는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떠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가? 오늘 같은 코로나 사태, 아니 앞으로 더한 위기가 올 수 있는데, 이런 위기 앞에 우리 성도는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는가? 우리 성도 앞에 있는 위기는 우리의 믿음을 알아보게 하는 시금석이다. 그리고 위기를 어떻게 잘 넘기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오는지를 알게 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고 했다. 기독교는 말이 아니고 능력이다. 죄 사함은 겉으로 아무런 표시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아니고, 겉으로 능력의 표시가 나타난다. 죄 사함은 우리의 삶에 변화가 있고, 능력이 나타난다.

 

사도바울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5) 라고 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것이 죄 사함의 표시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요즘은 믿노라 하면서도 경건의 모양조차도 없는 자들이 너무 많다.

 

우리가 믿어 죄 사함 받았다는 증거로 들것을 들고 걸어갈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오늘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향하여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들것을 들고 걸어가는가?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졌는가?

 

2.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오랫동안 중풍병으로 누워 있었던 한 사람을 본다. 그리고 이 사람의 믿음을 본다. 그 중풍병은 죽을 때까지 고치지 못하는 병이었다. 그리고 그 네 친구의 믿음을 본다. 그 네 사람은 형제인지, 이웃 친척인지, 동네 사람들인지, 친구인지 알 수가 없다. 여기서는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인지 아무 상관이 없다. 저는 이것이 교회라고 본다. 예수님이 오신 후에 구원받은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모습이라고 본다. 초대교회에 고난을 받고 있는 교회들에게 예수님은 교회는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교회는 똑같은 믿음을 가지고, 한 사람의 중풍병자를 위해 들것에 뉘고 나와야 한다. 예수님께 나오기 위해 온갖 수고를 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지붕을 뚫어야 한다.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다. 이웃에게 진리를 만나게 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저는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이 중풍병자의 믿음을 본다. 오래 동안 중풍병으로 누워 있었던 사람이 잠시 예수님께 나와서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는 이 말씀 한 마디를 믿고 아무 의심도 없이 벌떡 일어나 걸어가려고 했다는 것은 의심 없는 순수한 믿음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고칠 때처럼 손으로 만져 주신 것도 아니다. 손을 얹어서 안수를 해 주신 것도 아니다. ‘네 병이 낫겠다.’라고 직접 말씀해 주신 것도 아니다. 그저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고 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말씀과 동시에 병이 나은 것도 아니다. 아직 몸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병이 나은 줄로 믿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들것을 들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병이 나은 것이 아니고, 병자가 몸을 움직여 일어나기 시작할 때 병이 낫기 시작했다. 그리고 들것을 들고 걸으려고 할 때 완전히 낫게 된 것이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병자의 믿음에 더 포커스를 맞추어 병자의 믿음을 더 강조하고 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나의 현재의 위치에서 나의 믿음도 한번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갖자.

 

예수님은 이스라엘에서는 드물게 가버나움에 오래 머무셨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제2의 고향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오래 머무시면서 사셨다. 그러다가보니 가장 많이 능력을 행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증거하셨도, 예수님이 많은 애착을 가지시고 일하신 곳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많은 제자들이 이곳이 출신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행하셨던 이적과 전하신 말씀들은 그곳 주민들의 마음에 별로 효과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오는 본문에서 보는 봐와 같이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을정도로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 들었다. 그들은 모두 놀랐다. 그러나 그들은 변하지 않았다. 회개하지 않았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오래 동안 머물러 계셨다는 것은 대단한 은혜 중에 은혜인 것이다. 특권 중에 특권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지극히 큰 영적인 특권을 누리게 되었는데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큰 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후에 이러한 정죄를 내리신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11:23-24).

 

가버나움의 사람들은 가장 완전한 복음을 들었고, 그것이 놀라운 이적으로 입증되는 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죄와 허물 가운데서 죽은 상태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이 되는 바로 그 복음이 다른 사람에게는 죽음이 되며, 똑 같은 불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생활에 유용하게 사용되어지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멸망시키는 불이 되기도 한다. 불이 밀초를 녹여서 부드럽게 만들지만, 반대로 진흙은 딱딱하게 만들기도 한다. 복음을 규칙적으로 들으면서 교회는 여전히 다니지만 여전히 죄악과 세상 가운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결국 그 사람에게는 그 인간의 마음을 굳어버리게 하여 마음을 더 강퍅하게 할 뿐이다.

 

우리는 살면서 주님, 부족한 죄인을 바로 잡아 주소서. 마음의 완악하지 않도록 구원하소서.” 라고 늘 기도해야 한다.

 

3.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있는 고난이 인간의 영혼에 어떻게 큰 축복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준다.

 

본문에서 중풍병자가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위치에서 네 사람의 친구들에 의하여 침상에 누인 채로 옮겨져서 예수님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즉시로 그 사람이 바라던 것을 이루게 되었다. 영혼과 육신의 의사이신 예수님께서 깨끗하게 치유해 주셨다.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자기의 집에서 옮겨졌던 자가 기쁨으로 자기의 집으로 걸어서 돌아가게 되었다.

 

이 사람이 중풍병으로부터 놓임을 받은 후 자기의 생애가 끝날 때까지 평생 동안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도 한번 생각해 보자. 그가 만일 중풍병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예수님을 전혀 바라보지 못하고 알지도 못한 채로 살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다가 인생을 마쳤을 것이다. 중풍병이 없었더라면 그는 갈릴리에서 평범하게 세상 사람들처럼 생계를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고, 예수님에 대해 관심도 갖지 않았을 것이고, 병에서 고침 받는 체험도 없었을 것이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전혀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축복의 말씀은 절대로 듣지 못했을 것이다. “빛이 있으라.” 하시는 분이 최고의 능력자요, 창조이신데, 그 분이 단 한번만이라도 우리에게 빛이 있으라.” 고 해 주시면 그냥 인생은 펴지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단숨에 해결되어 버린다. 주님을 한번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인생의 극점은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나의 심령에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주여! 나에게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말씀하여 주옵소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체험을 가지고 산다. 그들은 고통으로 말미암아 지혜를 배운다. 죽음을 통해 부활을 경험하고, 손실을 통해 참된 이익을 배운다. 육체의 질병과 고난과 수고는 나를 영혼의 훌륭한 의사이신 주님께로 이끌어 주시고, 성경으로 인도하며,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한다. 그리고 세상을 의지하거나 바라보지 않게 한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의 사모님 중에 결혼 전에 병으로 오래 동안 고생 했는데, 예수님을 믿고 다 고침 받았다고 한다. 그 후에 하나님이 더 축복하셔서 신학생 전도사에게 시집을 와서 사모님이 되셨는데, 늘 하나님께 감사한단다. 늘 감사가 넘치니 몸은 더 건강해 지고, 평강과 행복을 주시니 늘 감사 감격함으로 사니 목회도 잘되더라고 했다. 그 때 병을 주셔서 예수님도 믿게 하고, 또 목사님 사모님도 되게 하시고, 정말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 이렇게 고백하는 것을 들었다.

 

다윗도 시편 119:71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 원망하지 말고, 불신앙적인 말은 하지 말고,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지 말고, 묵묵히 말없이 오직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자. 이 고난이 자나가기까지, 시련과 고통은 아마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우리는 잘 모를 수도 있다. 때가 되면 알게 된다. 그저 엎드려 기도할 뿐이다. 나에게 있는 시련과 고통이 있어야 한다면,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를 더 가까이 부르시려는 하나님의 제스처요, 계시로 믿자.

 

4.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께서 죄를 사해 주시는 능력이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 주님은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고 말씀하신다. 죄를 없게 해 주시는 권세는 하나님께만 있다. 그 당시 유대인들도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죄를 사해주시는 권세가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예수님도 하나님으로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죄 사함을 받는 문제, 구원 문제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합작품이다. 이 우주 만물에는 자기의 위치, 자기 자리가 있다. 이 우주는 자기 위치에서 역사한다. 자기 위치가 바뀌면 혼돈과 공허, 흑암이 온다. 사탄은 이것을 부추겨서 그 위치를 바꾸려고 한다. 악의 세력의 심보가 다 이렇다. 직장 상사가 자기 부하 직원이 자기 자리에 앉아서 근무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는가? 누구도 자기 자리를 침범당하면 제일 싫어한다. 하나님도 이 구원 문제만큼만은 침범당하기 싫어하신다. 구원의 권세는 하나님께 있다. 구원의 역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권세로 나타난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4:12).

 

그러므로 사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오직 전인적(全人的) 치유는 오직 주님께 있다. 주님께 나오라. 주님께 엎드려라. 주님을 믿으라. 주님의 의지하라. 주님께 맡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