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산상복음16]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의 복
주일설교(2015/08/30) - 산상설교(16)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의 복
마태복음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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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핍박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연대를 달리하면서 강도가 약하고 강하고 차이가 있지만, 모든 시대 시대마다 핍박은 늘 있어 왔습니다. 과거에는 핍박이 국가와 지역에 따라 달랐습니다. 어느 지역은 핍박이 심했고, 어느 지역은 핍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골고루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핍박이 심합니다. 요즘은 직접적인 핍박보다는 간접적인 핍박이 더 많습니다. 중국이나, 북한이나, 중동지역 같은 곳에는 직접적인 핍박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같은 지역은 간접적인 핍박입니다. 간접적인 핍박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마귀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핍박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간접적인 핍박은 ‘내가 핍박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목을 조루는 것입니다. 사회의 모든 곳에서 전반적으로 기독교를 대적하는 방향으로 흐릅니다.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모든 언론, 사회의 전반적인 모든 흐름이 기독교를 대적하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예를들면 세상은 교회를 싫어하고, 교인들을 싫어합니다. 직장동료들이 식사자리에서 술이라도 한잔씩 돌리게 될 때, 기독교인이라고 술잔을 안 받으면 아주 싫어합니다. 직장에서 부부동반해서 등산이라도 가게 되면 주일이라고 빠지면 같이 행동하지 않는다고 아주 싫어합니다. 깨끗하게 선하게 살아보려면 유별나게 튄다고 싫어합니다. 예수 믿는 표시라도 내면 은근히 억압하고 싫어합니다.
그리고 사회적인 분위기가 기독교인들을 싫어하는 쪽으로 흐릅니다. 은근히 교회나 기독교를 비방하거나, 은근히 불쾌한 말을 해서 감정을 상하게 하는 말들을 합니다. 언론, 방송들은 기독교를 비판하는 글을 올리고, 부풀리고, 안 좋은 사건들이 생기면 괜히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도 크게 보도하고 자극적인 말을 해서 기독교와 교회를 해할려고 합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 항상 기독교는 핍박을 받아 왔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기독교가 핍박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변질되어 소규모 종교로 남아 있다가 지금은 사라져 버리고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의 역사도 핍박의 역사입니다. 신약성경의 이야기는 핍박을 이겨낸 사람들의 승리의 이야기입니다. 의롭게, 신실하게, 신앙적으로 살려고 한 자들은 다 핍박을 받았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복은 팔복 중에서 가장 수준 높은 복입니다. 복 중에서 최고의 축복입니다. 이 복은 그냥 믿는다고 주어지는 복이 아닙니다. 핍박을 받아야 하는 복입니다.
그러면 핍박을 받기는 하는데 아무 핍박을 받아서는 되는 게 아니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아야 합니다. 핍박도 여러 가지 핍박이 있습니다. 단순히 “핍박을 받는 사람은 무조건 복이 있다” 가 아니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핍박에 대해서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내가 실수해 놓고 어려움 당하면 핍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여기서 말하는 핍박이 아닙니다. 내가 반대했기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도 여기서 말하는 핍박이 아닙니다. 내가 까다롭게 굴기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도 여기서 말하는 핍박이 아닙니다. 내가 지혜가 너무 부족해서 어리석음을 당하는 핍박도 여기서 말하는 핍박이 아닙니다. 이런 일반적인 핍박 때문에 복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핍박은 “의를 위하여...”입니다. 엉뚱한 일을 저질러 놓고 잘못되어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거나,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핍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15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 했습니다. ‘누구든지 나쁜 일을 저지르고, 실수해서 당하는 고난은 핍박이 아니다 그러니 이런 일로 고난을 당하지 말라’ 라는 뜻입니다.
(이번에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뇌물을 받은 죄로 대법원 전원일치로 구속이 되었는데, 증가가 너무나 명백한데도 야당탄압이라고 몰아붙이고, 민주주의가 죽었다고 하면서 옛날 유신독재가 되살아날려고 한다고 하면서 한 기독교인이 핍박 받는 것처럼 성경책 위에 손을 올리고 양심선언을 하고,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당당하게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아주 기독교인이 핍박을 받는 것처럼 연출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핍박이 아닙니다.)
또 “대의명분을 위해서 핍박을 받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핍박이 아니라는 겁니다. “대의명분을 위한 핍박”은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속을 들여다 보면 자기의 고집과 주장을 관철시키려고하는 뜻이 더 많이 담겨 있습니다. 대의명분을 위해 자기주장을 꺾을 수 없고, 양보할 수 없어서 핍박을 받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핍박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나라는 자기의 대의명분을 위해서 고집을 꺾지 못하고, 자기 주장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정치를 위해서, 반정부운동을 하다가 핍박을 받고 감옥에 가는 것, 이것도 여기서 말하는 핍박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핍박, 성경이 말하는 핍박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본문 11절에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1절과 12절의 말씀은 팔복 중에 최고의 복이 여덟 번째 복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복”이기 때문에 이 최고의 복에 대해서 부연 설명을 해 놓은 것입니다. 다른 복들에 대해서는 부연 설명을 하지 않고 있지만, 이 여덟 번째 복에 대해서만은 부연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만큼 여덟 번째 복이 최고로 귀한 복임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위해서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핍박도 예수와 관계 없는 핍박은 “의를 위한 핍박”이 아닙니다. 11절에서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해답입니다. “나로 말미암” - “예수로 말미암아”입니다.
또 “핍박-박해” 라는 말도 정확하게 말하면 아무 때나 사용하는 게 아닙니다. 어려움 당한다고 다 핍박이 아닙니다. 사업을 잘못해서 부도나 놓고 핍박받는다고 하면 안 됩니다. 내가 실수 해 놓고 핍박 받는다고 하면 안 됩니다. 세상의 일, 직장의 일, 내 육신의 일을 하다가 사람들에게 미움 받는다고 핍박을 받는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핍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핍박은 뭐냐하면, 11절에 나와 있는 그대로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 쉽게 표준새번역성경으로 읽으면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핍박이라는 것은 우선 예수님 때문에 어려움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어려움은 핍박이 아닙니다. 우선 예수님 때문에 어려움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어떻게 어려움 당합니까? “예수님 때문에 욕을 얻어먹고, 박해 받고(여기서 박해라는 말은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육신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을 받는 것을 말한다), 터무니 없는 거짓말로, 악한 말로 온갖 비난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요15:18-20)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왜 이렇게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습니까? 예수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에 속해 있는 게 아니고 예수에게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는다는 말은 내가 예수를 닮았다는 증거입니다. 예수에게 속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분을 닮은 사람은 항상 핍박을 받습니다.
(딤후3:12)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왜 이 복이 팔복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큰 복입니까? 예수를 위해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기 때문에 핍박을 받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 때문에 핍박을 받고 있습니까? 예수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온갖 미움을 받으며, 욕을 먹고, 거짓말로 온갖 악한 말로 비난을 받고 있습니까? 이런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최고의 복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3-14절에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아벨은 형 가인에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모세도 격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엘리야와 예레미야와 많은 선지자들도 핍박을 받았습니다. 다니엘의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그 하나 때문에 격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사도바울은 예수님 때문에 수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고후11:23-27)에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교회의 역사를 보면 수 많은 성도들이 핍박을 받았습니다. 수 많은 순교자들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증인” 이라는 말과 “순교자” 라는 말은 헬라어로 같은 말인 ‘마르투스’(martus)라는 말로 쓰여졌습니다. 왜냐하면 이 시대의 증인이었던 사람들은 다 순교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2장 13절에 사도요한이 버가모교회에게 편지하면서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마르투스)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했습니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들은 누구에게 핍박을 받습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습니다. 예수 모르는 사람들에게 비방을 받습니다. 그런데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는 게 아닙니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는 게 아닙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습니다. 같은 직장 동료들에게 핍박을 받을 수도 있고, 같은 동네에서 핍박을 받을 수도 있고, 같은 집안의 친척들에 의해서도 핍박을 받을 수도 있고, 한 집안 식구들에게도 핍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같은 교회 안에서, 또는 기독교 안에서 핍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보거나, 교회사를 보면 핍박은 멀리 있는 자가 핍박 하기보다 가까이 있는 자가 핍박을 더 많이 했습니다. 초대교회 때는 유대인들이 교인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유대인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을 핍박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다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또 중세시대에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기독교를 핍박한 자들이 누구입니까? 로마 카톨릭교회였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죽였는지 모릅니다.
또 청교도들이 누구에게 핍박을 받았습니까? 영국국교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핍박이 일어납니다. 정말 의롭게 살려면 핍박이 생깁니다. 정말 성경대로 신앙생활하면 핍박이 일어납니다. 성경대로 하면, “목사님, 집사님, 뭐가 그렇게 어렵게 힘들게 합니까?” 라고 반발합니다. 다 제자훈련을 받고 제가가 되자 라고 하면 “다른 교회도 안하는데, 꼭 그렇게 해야됩니까? 요즘 누가 그렇게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 라고 반발합니다. 성경대로 할 것 같으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믿으면 다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며는 누구든지 다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게 됩니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은 뭔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미워한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의를 위하여” 즉 “예수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이 복은 최고의 복입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천국은 맨 처음에 나오는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어지는 복”인 “천국”하고 다른 천국입니다. 무슨 천국이냐 하면, 12절에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는 이 천국을 말합니다. 첫 번째의 복의 천국은 천국에 들어가는, 즉 천국에 발을 들여 놓는 천국입니다. 그러나 여덟 번째 복의 천국은 천국의 모든 것을 소유하는 천국입니다. 궁전으로 말하면 임금님의 초청을 받아 이제 막 궁전 안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덟번째 복의 천국은 궁전에 들어가 임금님과 함께 앉아 식사도 하고 선물도 받고 높은 벼슬도 받고 궁전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면서 구경도하고 특권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팔복은 천국으로 시작해서 천국으로 끝납니다. 천국 안에서 이루어지고 얻을 수 있는 것이 팔복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첫 번째 복은 복의 시작이지만,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마지막 복은 최고의 복입니다. 이것을 계단으로 그림을 그려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팔복의 단계>
⑧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 → <천국>
⑦ 화평케 하는 자 → <하나님의 아들>
⑥마음이 청결한 자 → <하나님을 봄>
⑤긍휼히 여기는 자 → <긍휼히 여김 받음>
④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배부름,만족>
③온유한 자 → <땅을 기업으로 받음>
②애통하는 자 → <위로를 받음>
①심령이 가난한 자 → <천국>
팔복은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는 복입니다. 팔복은 천국을 소유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예수를 믿고 천국을 소유한 성도가 처음 가지는 마음이 “심령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마음을 가진 자가 애통하게 되고, 애통하는 자가 온유하게 되고, 온유한 자가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긍휼히 여기게 되고, 긍휼히 여기는 자가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고, 마음이 청결한 자가 화평케 하는 자가 되고, 화평케 하는 자가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를 믿고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천국을 내 마음에 소유하게 되면, 애통이 일어납니다. 죄에 대한 애통이 일어납니다. 하나님 몰랐던 것에 대한 애통이 일어납니다. 진작 일찍 예수 믿지 못한 것에 대한 애통이 일어납니다. 애통하고 회개한 자가 온유해지는 것입니다. 온유해지면 더 의에 대하여 갈급하게 되고, 목말라집니다. 더 깊이 은혜 속으로 들어가고 싶고, 영적 세계의 신비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더 갈급해 집니다. 성경말씀에 더 갈급해지고, 영적세계의 깊이에 더 갈급해 지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더 깊이 있는 신앙으로, 더 깊이 있는 축복의 세계로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는 것입니다. 결국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능력이 생기는 수준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최고의 수준은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수준”입니다. 순교자는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가 순교자입니다.
신앙의 최고 수준은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박해 하였느니라”(마5:11-12) 이것이 최고수준의 신앙입니다. 이것이 최고수준의 복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5-38절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여러분! 예수님을 바르게 믿으면 반드시 핍박이 옵니다. 미워하는 자들이 생깁니다. 대적자가 생깁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멸시합니다. 비아냥 거립니다. 나를 모르는 멀리 있는 자들이 미워하는 게 아닙니다. 제일 가까이에 있는 자들이 싫어합니다. 대적합니다. 내가 예수만 믿지 않는다면 핍박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멸시받고 비난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 예수 때문에, 예수 믿는 것 그 하나 때문에 비난받고, 미움받고,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마10:35-38)에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오늘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미워하는 사람도 없고, 예수 믿는다고 비방하는 사람들도 없고, 핍박하는 사람도 없고, 여전히 세상 사람들과 친하게 잘 지내고 있으며, 사람들이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인지 모르는 것은 내가 성도인지 의심해 봐야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느냐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할 때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도 거짓 선지자들에게 그와 같이 행했다”(눅6:26) 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예수 믿는다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자가 아닙니다. 그들이 우리 주님을 칭찬하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날도 우리 주님을 닮은 사람은 칭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칭찬 받고 우리를 좋아하게 하려면 예수 잘 믿으면 안됩니다. 예수 잘 믿으면 칭찬받지를 못합니다. 오히려 욕하고 비방합니다. 승진도 잘 안되고, 손해도 받습니다.
여러분! 내가 진짜 예수 잘 믿으면 핍박이 옵니다. 핍박이 바로 내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임을 알리는 시금석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이 원하시는 게 무엇일까요? 끝까지 주님과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려움 과 핍박 때문에 중간에 그만 두고 포기하는 게 아니고 끝까지 잘 달려가는 겁니다. 끝까지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끝까지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는 것입니다. 최고의 단계인 핍박도 받으면서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팔복이 요구하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찬송가 -----> “예수 나를 오라 하네”(360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