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산상복음18]세상의 소금
주일설교(2015/09/13) - 산상설교(18)
세상의 소금
마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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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팔복을 지나 산상복음의 본론에 들어갑니다. 누구든지 나사렛 예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고 그의 가르침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산상복음을 알고 있고,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이 복음의 말씀은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심오하고 신비한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매력에 빠져 이 말씀을 탐구하고 이 진리의 풍부함에 감동을 받아 이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이 산상복음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또 가장 순종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 산상복음은 예수님의 선언서와 같습니다. 예수님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며, 어떻게 행동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친히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기독교인에게는 “기독교적인 대항문화(Christian counter culture)”가 있습니다. 이것을 잘 나타내 보여 주고 있는 말씀이 이 산상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이 산상복음을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주시면서 “세상을 대항하라. 너희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세상의 문화를 향하여서 어떻게 대항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서는 이 세상문화 외에 또 다른 신비한 문화가 있음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무언가 의미 있는 삶을 찾고, 행복과 사랑과 성공을 찾고 있지만 잘못된 곳에서 찾고 있습니다. 가장 의지해야할 하나님과 말씀을 떠나 살고 있습니다. 인류역사의 모든 비극은 어디서 출발하느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고, 세상 문화를 의지한 것에서 출발합니다.
오늘날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향한 대항문화를 잃어버리고, 세상문화에 순응하면서 교회공동체와 세상공동체가 사람들의 눈에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면, 교회는 무너지고 맙니다. 기독교는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지난 2천년의 역사 속에, 더 나아가 구약시대부터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게 일어나게 하시고, 오늘날도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변화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은 기독교가 이 세상과 싸워 이기고, 이 세상 문화와 대항하여 다름을 지켜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처음부터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선언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세상을 향한 선한 영향력을 말합니다. 기독교인은 고립되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이 세상에 속해 있지는 않으나 그래도 세상 안에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세상과 관계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성경은 기독교인의 이 두 가지의 위치를 항상 강조합니다. 기독교인은 세상에 속해 있지는 않으나 기독교인은 세상과 관계를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인은 항상 그 정신을 하나님의 나라에 두고 늘 내세적(來世的)이어야 하고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살 동안에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선한 영향력을 행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2장 9절에서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인이 이 세상에서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자세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이 세상에서 소금의 기능을 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예수 믿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이 세상과 분리되어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에서 거룩하게 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전히 이 세상에서 부딪치면서 사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도 이 세상에서 직장생활하면서,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키우면서 비기독교인들과 똑같이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소금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삶의 성격이 다릅니다. 존재가치가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오늘 본문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첫째는, 이 말씀은 기독교인을 가리키는 말씀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한마디로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시대 시대마다 그 진리를 그대로 증명해 내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마다 성경의 진리가 증명되어지지 않는 시대는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만큼 성경이 더 정확하게 진리를 증명하고 성경대로 되어지지 않는 시대는 없습니다.
하나의 예를들면,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서 오늘날 이 세상의 보이지 않는 깊숙한 세상의 내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로마서1장 29-32절에 “29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나쁜 죄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이 외에도 성경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 이 세상의 모습을 자세히도 설명하고 있는 말씀이 많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이 세상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고, 겉으로는 발전적이고, 살기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속에는 부패하고, 죄악이 가득하고, 평화와 행복과 안식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점점 갈수록 부패와 죄악이 넓게 넓게 퍼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특이한 것이 하나있습니다. 바로 DMZ입니다. 일명 비무장지대라고 합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에 따라 설정된 군사분계선이 바로 지금의 휴전선, 비무장지대입니다. 군사분계선은 서쪽으로 예성강과 한강 어귀의 교동도에서부터 개성 남쪽의 판문점을 지나 중부의 철원ㆍ금화를 거쳐 동해안 고성의 명호리에 이르는 248㎞(155마일)의 길이로 한반도를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군사분계선으로부터 남북으로 각각 2㎞씩 분할된 지역이 비무장지대로, 약 6천 4백만 평의 광대한 구역입니다.』
지금 정부는 DMZ에 세계평화공원을 조성할려고 합니다. DMZ를 남북이 협의해서 손상시키지 않고, 잘 살리면 정말 세계적인 자연공원이 될 수 있습니다. 65년동안 사람의 발길이 없었기 때문에 정말 세계적인 원시림 자연공원이 되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 너무 평화롭고,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매력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너무 너무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DMZ 안에는 200만개가 넘는 지뢰가 묻혀있다는 것입니다. 대인지뢰, 대전차지뢰 등등 종류도 다양합니다. 제일 무서운게 대전차지뢰입니다. 대인지뢰는 발목만 절단하지만, 이 대전차지뢰는 사람을 산산조각 냅니다. 그리고 지뢰 탐지기로도 탐지할 수 없는 지뢰가 너무 많다는 겁니다. 그 지뢰들을 제거하는데도 오랜 세월이 걸리고, 비용도 어마어마하게 든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산사태 나고, 홍수에 떠내려가고 해서 온 산천에 구석 구석 땅속 깊숙이 묻혀 있는 겁니다. 단 한 개만 있어도 그 지역은 지뢰지역이 되는 것입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어디에 몇 개가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사람이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지금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가 군대생활 할때는 DMZ내에 수색대는 생명수당을 하루에 100원 받았습니다. 할달 월급이 3,000원 이었는데, 월급만큼 생명수당을 받았습니다)
DMZ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롭고 아름답고,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지뢰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며, 위험지역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도 내면을 들여다보면 지뢰밭과 같습니다. 청년들이 처음 사회에 진출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어른들로부터 상처를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대학생들이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부딪치는 것은 어른들의 정직하지 못한 것과 불의와 속임수와 일한 만큼 댓가를 받지 못하는 불이익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부터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고, 세상에 대한 환별을 느끼기도 한답니다.
이 세상은 인간의 죄와 타락의 결과로 이 세상의 삶은 썩어져가는 상태에 있습니다. 점점 갈수록 타락해 가고, 사악해 갑니다. 세상은 겉으로는 더 좋아 보이는 것 같지만, 더 향상되어 가는 것이 아니고, 더 더러워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라는 말 속에는 오늘의 이 세상의 내면의 상태는 부패하고 환별을 느낄 정도로 죄악으로 썩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라는 말은 “너희, 너희만이 소금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소금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희만이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 누구도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제력가도, 정치가도, 지식인도, 어떤 지역의 유지도, 그 누구도 이 세상을 구원하는 소금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복음을 체험하고, 복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만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절대 분명한 것은 기독교인은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소금은 어디에 갔다 놓아도 다른 모든 물질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소금과 똑같은 물질, 성질, 소금과 같은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소금의 능력은 다름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너희는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소금이 다른 물질과 같아져 버리면 아무 의미도 없고, 존재가치가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어버리면 아무 쓸 데 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사람입니다.
셋째는, 기독교인은 달라야할 뿐 아니라 이렇게 다른 것을 영광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자기의 말씀을 듣고 있는 모든 무리를 향하여 열변을 토하면서 외치고 있는 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다르다’ 그런데 그 다르다는 사실을 영광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2천년의 역사 속에 기독교인들의 특징 중에 하나가 “내가 기독교인이다” 라는 대단한 자부심과 기독교인이 된 것을 영광으로 받아들이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소금이 자기가 소금이라는 독특성, “나는 소금이다”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벌써 소금의 구실을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 기독교인들은 자기가 소금이라는 것을 잊어 버렸습니다. 미운 오리 새끼처럼 나는 백조인데 백조인줄 모르고 오리새끼인줄 압니다. 그런데 어느날 맑은 물가에 물 속을 들여다 보니 거기에 비친 자기의 모습이 백조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여기서 물 가는 바로 성경입니다. 성도는 성경을 들여다 보면서 내가 누구인지 정체성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은 내가 영광스러운 예수의 제자요,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소금의 맛을 잃어버렸습니다. 소금의 기능을 잃어버렸습니다. 짠 맛을 잃어버린 발에 밟히는 버려진 소금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다르다라는 독특성을 잃어버릴 때, 기독교인의 영광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넷째는 소금의 기능입니다. 소금은 생명을 줍니다. 소금은 방부제 역할을 합니다. 소금은 맛을 냅니다.
이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어떤 동물도 소금을 먹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소금이 몸에 들어가지 않으면 몸을 유지하지 못하고 병이 들고 결국은 죽습니다. 소금은 보이지 않게 조용히 생명을 유지시킵니다.
또 소금은 방부제 역할을 합니다. 소금이 들어가면 병균이 침투하지 못하고, 곰팡이가 붙지 못하고, 썩지 않습니다. 옛날에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음식에는 다 소금이 들어갑니다. 특히 오래 두고 먹어야 하는 음식은 다 소금이 들어갑니다. 소금이 들어가면 모든 썩어가는 부패를 방지합니다.
또 소금은 맛을 냅니다. 음식이 맛이 없으면 뭔 재미가 있겠습니까? 맛없는 음식은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소금이 맛을 내게 합니다. 아무리 먹음직스럽고 화려하게 보여도 먹어보고 맛이 없으면 안 먹습니다. 음식의 맛은 오직 소금입니다. 소금이 없으면 삶의 재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이 있고, 모든 행복의 조건을 완벽하게 다 갖추었고 하더라도 소금 없으면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잖아요? 어느 왕국에 딸만 셋이 있는 왕이 있었는데, 다 지혜롭고 다 훌륭한 공주입니다. 첫째와 둘째는 총명하고 지혜롭고 거기다 얼굴까지 예뻐서 미인입니다. 그런데 셋째는 얼굴도 못 생겼는데다가 하는 짓이 항상 엉뚱한 짓을 합니다. 하루는 왕이 딸을 셋을 불러 놓고, 너희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찾아 오는 자에게 왕위를 물려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공주는 1년동안 온 나라를 다니면서 가장 귀한 것을 찾아서 가지고 왔습니다. 첫째공주는 너무너무 값지고 희귀한 보석으로 장식된 왕관과 왕복을 만들어 왔습니다. 둘째는 아주 값지고 희귀한 보석으로 된 손잡이가 달린 보검을 가지고 왔는데, 이 검은 너무 너무 가벼워서 휘둘러도 힘이 전혀 들지 않고 살짝 스치기만 해도 모든 것을 베는 그런 검입니다. 왕은 너무너무 만족하면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셋째는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고 단지 항아리에 소금을 넣어서 가지고 왔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 소금이 가장 귀한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왕은 화를 내면서 ‘너를 나를 무시했다고 하면서 꼴도 보기 싫으니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합니다. 그때 이 셋째 공주가 말합니다. “아버지는 이제부터 소금을 먹을 자격이 없습니다. 소금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무시했으니 소금을 먹을 자격이 없으니 먹지 마십시오” 라고 합니다. 그때 왕이 “그래 소금, 소금이 뭔데, 소금이 대단하냐, 이제부터 소금을 안 먹으면 되지” 하면서 셋째공주를 쫓아내 버렸습니다. 셋째 공주는 주방의 왕의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에게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음식에는 소금을 넣지 말라’고 합니다. 이때부터 왕은 소금 없는 음식만 올라옵니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시간이 흐를수록 왕은 삶이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음식이 맛이 없으니 삶이 재미가 없는 겁니다. 왕궁에는 모든 것이 다 있는데도 재미가 없는 겁니다. 살 맛이 안나는 겁니다. 그 때야 왕은 깨닫습니다. “소금 없이는 살 맛이 안나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살아가는데서 제일 재미있고, 살맛이 나게 하는 것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소금은 생명을 주고, 부패를 방지하고, 인생의 삶을 맛깔나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소금이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기독교인이 세상을 향하여 해야할 기능이 무엇입니까? 세상에 생명을 주고, 부패를 방지하고, 사람들의 삶을 맛있게, 맛깔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인은 세상에서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과 똑같으면 세상은 우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에 온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면서 교인들에게 다르게 살 것을 가르쳤습니다. “세상 풍속을 따르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담배 피우지 말라, 술 마시지 말라, 도박하지 말라, 첩을 두지 말라, 종을 해방하고 종을 부리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그리고 부지런히 자기 손으로 일해서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라” 라고 가르쳤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존경 받으려면 우리가 달라야 합니다.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저 소량의 소금만으로도 큰 덩어리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소금의 본질 때문에 소금은 언제든지 소리없이 속으로 스며듭니다. 그리고 썩지 않게 합니다. 맛을 냅니다. 이것이 우리시대에 우리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큰 사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