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고난과 금식
<마가복음 묵상⑬>
13. 고난과 금식
막2: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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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2: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사람은 고난이 있을 때 은혜를 안다. 기쁠 때는 기쁨 가운데 은혜를 알고, 은혜로 산다. 슬플 때는 슬픈 대로 은혜를 알고 은혜로 산다. 그러므로 성도는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항상 은혜로 사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변화된 삶을 얻기 위해 절박하게 외치는 사람들의 몸부림을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절박하게 고난 속에서 금식하며 몸부림치는 것을 주님은 들으신다. 그래서 금식은 좋은 것이다. 내 힘으로 살지 않고, 내 힘으로 버티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산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주님이 은혜 주시기를 갈망하는 비움의 자세요, 낮은 자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는 금식할 수 없다. 내 힘으로 산다는 사람은 금식하지 않는다. 만약에 금식을 자랑하기 위해서, 금식함으로 자기를 높이고, 자기의 힘을 과시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금식이다.
“(사58:4-5)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성경에는 금식할 때가 있고, 금식하지 않을 때가 있다. 예수님도 금식하셨다. 특히 공생애 시작하시면서 40일 금식하셨다. 그러나 예수님도 금식할 때가 있고, 금식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성경에 보면 금식은
1)전쟁 때나 위험이 있을 때 했다.
2)병들었을 때 했다.
3)애곡할 때 했다.
4)회개할 때 했다.
5)위험이 임박할 때 했다.
6)기근이 있을 때 했다.
7)재앙을 기념할 때 했다.
한 마디로 금식은 고난이 있을 때 했다. 그래서 즐거움이 있을 때는 금식하지 않았다. 즐거움이 있을 때는 최대한 즐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특징 중에 하나가 즐거움을 가지는 것이다.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예수 믿는 목적 중에 또 하나가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이다. 즐거움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리스도와 사귐은 행복하기 위한 열쇠요, 즐거움의 출발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19절).” 고 하신다.
유대인들은 결혼식 후에 둘이서 신혼여행을 떠나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집에 머물렀다. 일주일 정도 집을 개방하고 잔치를 열어 즐거워했다. 고된 노동에서 결혼 주간만은 생애에 가장 행복한 주간이었다. 이 행복한 주간에 신랑 신부의 가까운 친구들을 초청하여 즐겼다.
“(살전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결혼 잔치의 손님으로 초대된 “혼인 집 손님들”이라고 말씀한다. “랍비의 규칙”에는 “신랑에게 시중드는 사람은 모두 그들의 즐거움을 감소시킬 모든 종교상의 관계에서 해방되었다” 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엄격한 유대인들에게는 금식은 규칙적인 습관이었다. 유대인들은 일 년에 하루만 금식하는 날이 있다. 그날은 속죄일이다. 백성들이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는 날이다. 그날은 특별히 금식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러나 엄격한 유대인들은 매주 이틀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했다. 금식은 오전 6시부터 오후6시까지이다. 그 후로는 정상적인 식사를 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들의 금식이 전시적이었고, 위선적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선행에 대해서 사람들의 주위를 끌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할 때 창백한 얼굴을 해 가지고 더러운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와 그들이 금식하고 있음을 한 사람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없도록 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보고 신앙심을 존경하도록 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 금식에 대한 질문을 제기했다. 18절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고 했다. “금식하고 있는지라.”는 말은 “금식하고 있는 중인데” 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 집에 들어가 식사하실 때가 금식하는 때였다. 그래서 실제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하고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금식했다. 그러나 요한의 제자들은 지금 자기 선생님인 요한이 감옥에 갇혀 사형선고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금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예수님은 세리 마태 집에서 마태의 친구들과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초대받아 식사를 제공받고 있었다. 이 때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라고 질문 겸 비판을 했다. 여기서 “사람들이” 누군지 모른다. 바리새인이지 알 수 없다. 아마 바리새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아니면 예수님의 일행을 지켜보며 무언가 꼬투리를 잡을 만한 게 없나를 찾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하여튼 예수님의 일행을 못 맞당하게 여긴 어떤 사람일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이런 사람들이 있다. 교회를 향하여, 그리고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무언가 꼬투리를 잡으면 물고 늘어진다. 인터넷에 올리고, 언론은 난리법석을 떤다. 그러면 댓글부대들은 온갖 욕을 하면서 거기에 더 보태서 욕을 한다. 그리고 인터넷 전체로 퍼 나르면서 거기에 더 보태서 처음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몰고가 공격하게 만든다. 아주 마귀적인 악랄한 수법을 쓴다. 그 당시 예수님시대에도 악랄한 방법으로 온갖 거짓과 술수를 사용하여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19-20절)
예수님의 말씀은 금식할 때가 있고, 하지 않을 때가 있음을 말씀하신다.
금식할 때가 언제인가?
1)신랑을 빼앗길 때,
그러면 금식하지 않을 때가 언제인가?
2)신랑과 함께 있을 때 – 혼인잔치 때.
사람이 살아가노라면 기쁠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다. 좋을 때도 있고, 반대로 고난이 닥칠 때도 있다.
“혼인잔치” 때는 기쁠 때를 말한다. 유대인들은 혼인잔치를 일주일 동안 한다. 일주일 동안 신랑의 손님들은 신랑과 함께 있으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그리고 유대법에는 신랑과 함께 하는 잔치 때에는 금식기간이라도 금식을 하지 않아도 된다. 혼인잔치는 기쁠 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랑이 신부에게 들어가게 되면 잔치는 끝난다. 이후부터는 금식해야 한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신랑을 빼앗길 알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고 한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계실 때는 금식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임재는 기쁨의 삶을 가져온다. 예수님의 임재와 기쁨의 삶이 가득할 때는 금식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생활, 우리에게 예수님이 계시면 혼인잔치 집처럼 기쁨이 늘 있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로 하나님과 새로운 연합을 갖게 하노라. 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연합시키는 신랑이도다. 내가 선택한 제자들이 신랑의 친구들이니라. 결혼은 기쁜 것이지 금식을 요구하는 슬픈 상황이 아니니라. 나의 임재는 나를 따르는 자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지 슬픔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니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매일매일 그분의 임재를 의식하게 되면 삶의 기쁨이 넘친다. 예수님은 삶의 신비이시며, 기쁨이시다. 삶이 얼마나 어둡든지 간에, 혹은 사람이 스스로 고독하다고 느껴지든 간에 예수님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마음에 기쁨을 가져다준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15: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16:11)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12:3)
또 예수님의 임재가 사라질 때도 있다. 내 심령에 예수님이 함께 하지 못하고 떠나갈 때도 있다. 신랑을 빼앗길 때이다. 나의 삶에 심하든 적든 고난이 올 때가 있다. 시련이 오고, 역경이 온다. 늘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쁨이 사라지고 고난이 온다. 이때가 신랑이 빼앗긴 때이다. 이때는 금식을 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고 했다. 다윗은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라고 했다.
또 “신랑을 빼앗길 때는”는 십자가와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때는 금식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 때 금식하라고 하신다.
다시 정리해 보자. 우리가 언제 금식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임재가 사라질 때이다. 또 고난당할 때이다. 삶이 힘들고 어렵고, 잘 풀리지 않을 때이다. 또 십자가 앞에 서야 할 때이다. 십자가를 져야 할 때이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약4:8). 고 했다. 우리 믿는 성도에게는 예수님의 임재하심이 특별히 필요할 때가 있다. 주님이 나에게 찾아와 주시지 않으면 고통의 연속이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가 있다. 금식이나 열정적인 기도로 믿는 자들은 하나님과 더 가까이 하게 되고, 또 도움이 필요하고 도움을 갈망하는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만나주신다. 나에게 찾아와 나의 심령을 만져 주신다.
(마17:21)“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종류)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
(KJV 에는 있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고난을 겪게 된다. 그러므로 경건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매우 특별한 임재가 필요하다. 늘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아니하면 그 고난으로부터 이겨내지를 못한다. 이러한 특별한 임재를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금식도 해야 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6-18). 고 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5:13) 라고 했다.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 도다.“ (시34:17-19) 라고 했다.
성도의 삶에는 기쁨이 있어야 한다. 예수 믿으면 기쁨이 온다.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다. 기쁨과 기도와 감사는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서로가 맞물려 있다. 기쁨이 넘치면 기도가 넘치고, 범사에 감사가 넘친다. 기도의 재미가 붙으면, 기쁨과 감사의 연쇄반응이 일어난다. 감사가 넘치면 기도와 기쁨의 연쇄반응이 일어난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항상 생활 속에 기쁨이 있어야 한다. 예수 믿는 생활은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집 같아야 한다. 예수 모시고 있는 사람, 가정은 항상 기쁨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죄악 중에 출생하여 죄악 가운데 살기 때문에 늘 기쁨만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죄악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간다. 또 악한 세력인 마귀가 우리의 마음하게 하지 못하게 흔들어 놓는다. 그래서 슬픔이 온다. 고난도 온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은 공기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죄악이 덮여 있다.
그래서 슬픈 일이 많이 생긴다. 고난도 오고, 역경도 오고, 시련도 오고, 실망과 실패도 온다. 왜 우리가 어려움을 겪는가? 왜 우리에게 문제가 생기는가? 왜 눈물을 흘려야 하며, 괴롬을 겪어야 하는가? 이 땅의 죄악과 나쁜 구조적인 악 때문이다. 그리고 유혹받아 주님을 떠나기 때문이요, 믿음에서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떠나고 세상을 향해 얼굴을 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돈이 없기 때문에 어렵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요, 실패 때문이요, 계획대로 안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왜 어려운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어려운 때를 보내고 있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고, 온 나라가 온 세계가 다 어려운 가운데 있다. 이럴 때 기도해야 하고, 금식해야 하고, 하나님을 사모해야 한다. 주님을 더 갈망하고 찾아야 한다. 말씀을 더 사모하고, 예배를 더 귀하게 여겨야 한다. 바로 지금이 고난의 때이고, 시험의 때이다. 주님을 더 가까이 해야 할 때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각이 열려 있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원망과 포기의 삶을 산다. 하나님을 떠난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예배를 멀리하고 교회를 떠난다. 지각이 무너진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이 코로나19 사태로 오히려 더 선명하게 하나님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쭉정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지금은 사순절 고난의 때이다. 이 고난의 때가 지나면 반드시 부활의 때가 온다. 생명이 다시 싹트고 기쁨의 혼인잔치가 다가옴을 기억하자.
고난은 기도하는 때이다. 고난은 금식하는 때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때이다. 은혜를 사모하고 은혜를 발견하는 때이다. 잃었던 신앙, 잃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회복하는 때이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