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산상복음26]살인하지 말지니라.
주일설교(2015/11/15) - 산상복음(26)
살인하지 말지니라.
마5: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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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하나님의 나라에 목표를 두고 삽니다. 우리 주님은 그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였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던 세례요한도 광야에서 외친 첫 번째 외침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였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초점을 하나님 나라에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경영도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이 오신 목적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나라가 목적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목적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성경이 우리를 이끌어서 눈동자를 고정시키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성경이 지목하는 마지막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우리가 배우고 있는 산상복음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게 합니다. 예수님은 산상복음을 통하여 우리의 관심과 눈동자를 세상에 두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을 가지게 하고, 우리의 삶의 목표를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 하나님에게 고정시키게 합니다.
구약의 모든 율법은 세 가지의 효력을 발생시켰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께로 이끌어,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만나게 해서 거듭나게 해서 하나님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믿어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거룩하게 하고 성화시키는 효력을 발생시킵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어 구원 받아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아직 세상에 붙잡혀 육적인 삶을 살기에 이들을 성화시켜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셋째는 성화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고 큰 상급을 일으키기 위해서입니다.
지난 주일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더 낫은 의”는 “예수님과의 관계의 의(義)” 라고 했습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절). 목표는 천국입니다. 예수님과 관계가 없는 의는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아무리 깨끗하고, 선하고, 착해도 예수님과 관계가 없으면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과 깊은 관계의 의(義)를 가진 자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21절부터 7장 마지막까지는 “더 낫은 의”, 즉 “예수님과의 깊은 관계의 의”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에게 준 율법은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의 율법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열어 놓으실 의의 길을 예표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예수님과 관계없는 의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노력해서 만든 의요, 이기적인 의요, 극도의 자기 중심의 의입니다. 여기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희생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주님과의 애절한 관계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자기가 쌓은 의만 드러나고, 자랑만 있고, 교만만 있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향하여는 정죄만 있습니다. 자기의 영광만 드러내려고 하고, 자기를 향한 관심을 극대화시키고, 교만과 이기심과 정죄만이 가득하게 만듭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정죄하는데 선수였습니다. 무조건 잘못하고 실수하면 정죄했습니다. “율법을 모르는 자들은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7:49) 하면서 정죄하는데 선수였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21절부터 자세히 보십시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형식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 21절에서 48절까지 여섯 개가 나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런 형식으로 예수님이 말씀하는 것은, 예수님이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있는 말씀 중에서 십계명에서 두 개, 그리고 일반 계명에서 네 개를 무작위로 뽑아서 샘플로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섯 개의 샘플을 가지고 구약 전체의 율법을 문자 그대로 보지 말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영적인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 원리를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고린도후서 3장에서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3:6)...... 그들은 마음이 완고하여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에 수건이 마음을 덮어서 율법 조문을 제대로 몰랐다”고 했습니다. “이 수건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없어지는데, 언제든지 예수님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진다(고후3:14-16)“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모든 율법은 예수님 안에서만 바로 풀릴 수 있고, 예수님 안에서만 완고한 수건이 벗겨진다는 것입니다.
살인에 있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 않는 한, 율법을 완전히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의 내적인 문제, 영적인 것을 빠트렸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을 중심에 놓고,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구약의 율법을 해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율법을 재해석하면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는 말을 강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율법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자가 바로 나다, 나만이 율법의 참된 해석자요, 모세의 율법의 책임을 지고 있는 자가 바로 나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 라고 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이 변질되지 않은 원조를 말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아 내려온 원래의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율법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서기관들이 변질시킨 율법이 아닌 원래의 원조 율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아 내려온 원래의 율법에서 세월이 흐르면서 계속 덧붙였습니다. 예를들면 원래의 율법에다가 해석을 덧붙여 놓으면, 세월이 흐른 후에 그것이 원래의 율법으로 취급하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에다가 또 해석을 덧붙여 놓습니다. 그러면 또 한참 세월이 흐르고나면 또 그것이 본 율법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또 거기에다가 해석을 붙입니다. 이렇게 해서 계속 한 세대 한 세대를 흘러가면서 율법은 자꾸 자꾸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613개의 율법 조문이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율법들이 모두 히브리어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후부터 서서히 그들은 히브리어를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온 후부터 사용한 언어는 아람어였습니다. 예수님시대에도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고대헬라지역에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헬라어만 말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기록된 히브리어는 고어가 되어 버렸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히브리어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쳐 주고, 읽어주는 율법지식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가 들었으나..” 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은 모두 서기관들이회당에서 율법을 읽어주고 해석해 주는 것을 그냥 들을 뿐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하시는 겁니다. 반대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직접 대할 때는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 하셨습니다.(마12:3,5,19:4,21:16,42, 22:31)
성경도 고대 히브리어로 기록해 놓았지, 율법도 고대 히브리어로 기록해 놓았지, 회당에서는 히브리어로 그냥 읽어 버리지, 그래서 일반 평민들은 회당에서 서기관들이 그냥 읽고 해석해 주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율법인 줄로 믿고 그냥 받아 드리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율법을 연구해서 계속 덧붙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율법의 원래의 원조가 어느 것이 원조인지 분간이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덧붙인 것을 합쳐서 모든 율법이 다 모세의 율법으로 간주해 버린 것입니다.
꼭 옛날에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의 카톨릭과 같습니다. 종교개혁 이전의 카톨릭은 사제들만 성경을 읽었습니다. 성경은 고대 로마어인 라틴어로 기록이 되어 있어서 성도들은 아무도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예배할 때 사제가 라틴말로 성경을 읽으면, ‘아, 저것이 천국 방언이구나!“라고 생각하고 그냥 듣는 겁니다. 아무도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발달한 것이 그림입니다. 성화입니다. 예수님의 일대기, 제자들의 모습, 성경의 내용을 설명하는 성화를 성전 벽마다 붙여 놓고 그 그림을 보고 상상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제들만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1517년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모든 성도들이 성경을 자기나라 말로 번역하여 읽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이야 말로 성도들에게 성경을 돌려 준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가지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해석하는 것을 “그것은 틀렸다. 내가 해석하는 것이 바른 해석이다“ 라고 하면서 율법을 재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율법 조문 그대로만 보지 말고, 율법 조문 뒤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살인은 말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21-22절)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그것도 좋은 말이 아니고 나쁜 말입니다. 나쁜 말 중에도 특히 욕, 저주, 멸시하는 말, 분노입니다. 왜냐하면, 말은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12:34-35).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마15:18-19)
예수님은 악한 생각을 항상 살인과 함께 포함시켰습니다. 다툼과 원한과 속임과 멸시, 경멸, 조롱, 기타 우리가 그처럼 무섭고 더러운 죄로 여기지 않는 많은 것들을 포함시켰습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궁극적으로 살인으로 유도하는 바로 그 악한 영(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라가”는 ‘쓸모 없는 놈, 속이 텅 빈 놈’ 이라는 뜻이고, “미련한 놈”(모레)은 ‘바보, 얼간이, 바보 멍청이, 돌대가리’ 라는 뜻입니다. 이것들은 유대식 욕설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증오를 품고 욕설을 퍼붓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욕 문화라고 합니다. 욕을 입에 달고 있습니다. 그만큼 마음이 깨끗하지 않고 더럽습니다. 말 한 마디에 사람을 찔러 죽입니다. 아파트 아래 위층 간의 소음 때문에 험한 말이 오고가고 결국 분을 못 이겨 칼로 찔러 죽이는 일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는 좋은 말을 해야 합니다. 부드러운 말을 해야 합니다. 욕설을 퍼부으면 안됩니다.
오늘 예수님은 말이 어떤 형태로 발전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나쁜 말을 하면 그것 때문에 첫 번째는 “심판”을 받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심판은 지방재판소의 심판입니다. 두 번째는 “공회에 잡힌다”고 합니다. 이것은 중앙 법원인 공회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심판 받고 지옥에 갇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쁜 말 한 마디 때문에 1)지방 재판소-지방법원, 2)공회 재판소-고등법원, 3)하나님 앞에서의 심판 - 지옥-대법원, 이렇게 3단계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심판받아 지옥 가는 게 더 무서운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살인은 잘못된 말에서 시작되고, 살인은 그 다음 단계로 관계가 깨어진 단계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23-25절은 살인으로 발전하기 전에 관계를 빨리 회복하라는 말입니다. 인간들의 나쁜 마음들은 마지막 관계를 끊을 때는 마지막 심한 말, 인격을 무시하고, 가슴을 찌르는 말과 같은 결정타를 날리고, 관계를 끊어 버립니다. 인간 죄악의 극악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25절에 보면,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고 합니다. 여기서 “길에 있을 때” 라는 의미는 뭡니까? 물론 문자적으로는 ‘재판 받기 위해 가고 있는 도중’을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이 세상에 있을 때” “우리가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이 세상을 걷고 있을 때, 언젠가는 재판장 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가 올 텐데, 그 재판장 되신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 이 문제를 즉시 해결하라“ 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일이면 여기에 있지 않을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영원을 향하여 가고 있지 않습니까?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너의 말로 인하여 상처를 받아 이를 갈고 있거나, 너로 인하여 마음에 상처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서게 되기 전에 관계를 회복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세 번째는, 말은 반드시 한 푼도 남긴 없이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12:36-37)
사람이 말한 것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특수 전파로서 이 우주 공간에 그대로 남아 떠돌아 다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 말을 녹음기에 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대로 연구가 진행되면 언젠가는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도 녹음기에 잡아서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는다” 라는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말을 다 아시고 계시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우리가 과거 언제, 어디서, 누구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를 들려주면서, 그 말에 대해서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롬14:10-13)에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예수님은 살인은 육체적인 생명을 파괴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이상으로 그 사람의 영과 혼(정신)을 파괴하며, 어떤 모양, 어떤 형태로든지, 어떤 말로라든지 그 사람을 파괴하여 실족시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거나, 멸시하거나 욕하는 자는 심판을 받아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