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산상복음28]이혼에 대한 가르침=기독교인과 이혼
주일설교(2016/1/24) - 산상복음(28)
이혼에 대한 가르침=기독교인과 이혼
마5: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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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혼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이혼에 대한 말씀은 앞의 27절의 간음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혼을 간음과 관련시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이혼문제의 말씀은 현대인들에게 전혀 인기가 없는 말씀입니다. 요즘은 젊은이들의 이혼도 급증하지만, 황혼 이혼도 급증하고 있습니다. 교회에도 이런 이혼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이런 설교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듣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교인들이 듣기를 싫어하는 설교는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듣기 싫은 설교를 하면 교인들이 다른 교회로 옮깁니다. 그래서 오늘날 목사님들은 성경의 구석 구석의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상황이 성경시대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기록되던 옛날에는 주로 이혼문제는 남자가 여자에게 이혼을 강요했습니다. 남자가 살다가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이혼을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여자가 남편에게 이혼을 강요합니다. 아무 말없이 그냥 살아주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간 큰 남자는 밥 세끼 받아먹는 삼식이고, 부인을 향하여 ‘어디 가느냐’ ‘어디 갔다 왔느냐’ 라고 묻는 남자들이라고 합니다. (‘저도 요즘 세 끼 꼭 다 먹어야 되느냐’ 라고 압박이 오는 것을 느낍니다)
이런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지 말라”는 이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도 맞지 않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여차하면 여자가 ‘이혼하자’ 그러고, 이혼하게 되면 재산을 분할해 줘야 되는 이런 시대라는 것입니다. 부인이 바람 피워도 남자는 이혼하자고 그럴까봐 겁이 나서 말도 못한다는 겁니다. 이런 시대에 오늘 같은 성경의 말씀은 죽은 말씀이고, 필요 없는 말씀이고, 시대에 맞지 않다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3장에서는 창세기 1장부터 세상을 창조하시고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이나,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나 “동일한 하나님” 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말씀하셨던 그 말씀이나, 오늘의 이 말씀이나 “하나님의 동일한 말씀” 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동일하신 하나님이요, 말씀도 동일하신 말씀이라면, 오늘의 말씀도 죽은 말씀이 아니고, 살아있는 말씀이요, 필요 없는 말씀이 아니고, 시대에 맞는 말씀이요,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것입니다. 의미 있는 말씀이요, 꼭 필요한 말씀이요, 이 말씀이 내 말씀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이혼은 단순한 육신적인 남녀의 관계의 이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의 이혼까지를 내다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간음도 마찬가지로 육신적인 간음도 말하지만,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의 의미로 하나님을 떠난 간음을 말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혼도 남녀의 이혼을 말하면서 이것은 그림자일 뿐이고, 하나님과의 이혼을 말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과 이혼함으로 망했습니다. 그들이 살던 땅, 하나님 주신 땅 가나안 땅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이방인들이 들어와 다 차지해 버리고, 그들은 쫓겨나 2,000년 동안 온 세계를 떠돌아 다녔습니다. 육신적인 이혼이든 영적인 이혼이든 이혼은 결국 망한다 라는 것입니다. 이혼하면 안된다 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영적세계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이혼문제도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 안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래 이혼은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혼은 경건한 것이고, 하나님이 정해 주신 것이고, 남자(아담)와 여자(하와)를 만드시고, 하나님이 여자를 이끌어 남자에게 붙여 주시면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요, 영과 육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과 같은 목적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혼에 대한 것을 이해하려면 세 부분으로 나누어, 1.모세의 율법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가르치고 있느냐 하는 것과, 2.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가르쳤는가 하는 것과, 그리고 3.예수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셨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먼저 첫째는, 모세의 율법에서는 이 이혼 문제를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대답은 신명기 24장 1-4절의 말씀을 보시면 됩니다. 다 같이 보십시다.
『(1)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4)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
그리고 이 말씀을 예수님이 해석해 놓으셨는데, 예수님이 해석하신 말씀을 찾아 비교해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3-9절까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3)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5)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7)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서 생각해야 할 것은 모세시대의 율법에는 간음문제로 이혼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구약시대에는 간음을 범한 사람은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결혼은 끝장났습니다.
그리고 이혼에 관한 모세 율법의 목적은 함부로 남자들이 이혼을 하지 못하게 하는 틀이었습니다. 옛날 고대사회에는 여자의 생계는 오직 남자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당시 남자들은 아무 이유 없이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내를 마음대로 버렸습니다. 특히 가나안의 이방인들은 전적으로 100% 남자가 권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내를 마음대로 버렸습니다.
지금도 이슬람교에서는 여자들에게 권리가 없습니다. 모든 권리는 남자가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가 구약시대의 이방적인 문화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문화에 젖어 사는 것을 가장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혼생활은 이방인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이 만드신 독특한 방법의 결혼생활을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이혼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가나안 문화와 종교에 젖어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자를 철저히 보호하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여자를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로 이혼에 대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별 온갖 구실을 붙여서 이혼을 했습니다. 특히 못 땐 버릇을 가진 나쁜 남자들은 온갖 방법, 온갖 이유와 구실을 대면서 이혼을 해서 여자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에는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혼증서를 써 주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야 버림받은 여자는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자가 처음 아내를 버린 후 이 여자 저 여자를 바꾸어 가면서 살다가 옛날 버린 부인이 생각이 나서, 다시 그 여자를 찾아 와서 같이 살려고 하는 경우는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것으로 여겨서 그렇게 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버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찝쩍거리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의 모세의 율법에서 이혼에 대한 문제는 철저히 나약한 여자들을 보호하는 법이라 것입니다.
둘째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이혼 문제를 어떻게 가르쳤는가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모세가 이혼을 허락했다라고 해석했습니다. ‘이혼해도 된다’라고 가르쳤습니다. 단지 조건은 이혼하고 싶으면 이혼증서만 써주면 된다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시대에도 남자들은 아내에게 조그마한 불만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으면 이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이혼증서만 써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혼을 아주 가볍게 생각하고 이혼증서만 써주면 그만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이방인들처럼 이혼을 마음대로 했습니다. 수 많은 아내들이 소소한 이유, 아주 시시한 이유 때문에 이혼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이혼증서를 주면 그만이었습니다.
셋째는 그럼 예수님은 이 이혼문제를 어떻게 말씀하셨는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혼에 대한 가르침을 잘 해석해 놓은 것은 조금 전에 읽은 마태복음 19장 3절 – 9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예민한 이혼의 문제를 가지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설명을 듣고,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하였습니까?” 라고 따졌습니다. 이 말은 모세도 이혼하고 싶으면 이혼증서를 주면 그만이다 라는 의미로 이혼을 허락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것은 너희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허락한 것이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8절) 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뭡니까? 왜 예수님은 이혼을 허락하지 않으십니까?
첫째는 결혼은 신성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위해 하와를 만드셨을 때, 이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법은 사람이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결혼은 남녀가 부모를 떠나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한 몸은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런즉 이제는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마19:6) 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전6장 16절에서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 와 한 몸인 줄 알지 못하느냐 ‘창2:24에서 둘이 한 몸이 된다’ 라고 했기 때문이다” 라고 강조했습니다.
결혼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2장24절에서 부부를 만드시고 분명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하나님 만드신 신성한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아무데서도 이혼을 명하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이혼을 허락한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딱 한 군데 예외 구절이 있기는 합니다. 고전 7장 12-16절에 보시면, 함께 찾아 읽읍시다.
『12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13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16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이런 말씀입니다. 한 가정의 남편과 아내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날 남편이 혹은 아내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 믿는 사람은 개종하지 않은 이방인, 세상 신을 섬기는 이방인과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아내는 “내가 이제부터 이방인 남편과 사는 것은 불가능해, 나는 이제부터 새 피조물이 되어서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야 돼, 이제는 남편과 이혼해야 돼” 남편도 마찬가지로 “내가 이제는 기독교인이 되어서 나는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야 돼, 그래서 나는 이제 이방인인 아내와 이혼해야 되겠어..”
그런데 사도 바울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런 경우에라도 이혼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이혼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믿는 남편 때문에 믿지 않는 아내가 구원받을 수 있으며, 반대로 믿는 아내 때문에 믿지 않는 남편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되게 하신 것은 “화평 중에 너희를 부르셨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외상황이 뭐냐하면,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갈라서기를 원하면 갈라서라는 것입니다(15절). 성도는 이런 일에 구애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도저히 예수 믿는 너하고는 못산다. 그래서 이혼하자’ 라고 하면 갈라서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경우는 믿지 않는 자를 구원하기 위해 참고 인내하고 기다리고 모범을 보여 ‘남편은 아내로 인하여, 아내는 남편으로 인하여 예수 믿게 해라’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 동기 목사님이 직장을 다니다가 어느날 신학교를 가서 목회의 길을 가려고 합니다. 자기 부인을 아무리 아무리 설득을 해도 반대를 합니다. 신학교 가서 목회자의 길을 갈려면 이혼하자는 겁니다. 몇 년을 두고 이것 때문에 하나가 안됩니다. 결국 이 목사님은 직장을 사표내고 신학교를 갔습니다. 이 부인은 자식을 5남매 버리고 집을 나갔습니다. 그 길로 영원히 오지 않았습니다. 자식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리고는 세월이 흘러 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의 큰 교회의 전임전도사가 되었습니다. 그 교회에 피아노 학원을 하던 노처녀 선생님이 그 기회를 포착하여 이 전도사님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전처의 아이들, 5남매와 자기가 낳은 2남매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아 주고 잘 길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부산에서 목회를 잘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어느 것이 정답입니까?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조금 전에 읽은 고전7:15이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 성도가 이혼 문제에 대해서는 꼭 새겨 넣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라서기를 원하면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가, 즉 우리 성도가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 일을 하기를 원하고, 예수님을 위해 살기를 원하고, 복음을 위해, 일생을 받쳐 섬기면서 신앙 생활하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예수 믿는 나하고 죽어도 못 살겠다고 반대하면, 갈라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이혼해도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도 안 믿고 교회도 안 나오면서 예수 믿는다고 늘 괴롭히고 힘들게 하면서도 “나는 너하고 살겠다. 너 없이는 못 산다” 하면서 같이 살기를 원하거든, 인내하고, 참고 견디면서 그를 구원시켜 예수님 믿게 해야 되겠다 라는 굳은 마음을 품고 같이 살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에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걸 보면 동기 목사님은 자식 버리고 떠나가는 그런 여자하고는 잘 헤어진 거예요. 그런 여자하고 살아도 목회가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목사님을 목회의 길을 가게 할려고, 여자를 바꾸어 더 좋은 배필을 붙여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말씀 붙잡고 살고, 복음대로 살려고 하고, 주님의 일을 하면서 살겠다고 하면, 하나님은 더 좋은 사람을 붙여 주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길을 열어 주시는 겁니다. 예수 믿으면서 믿음으로 살겠다고 발버둥치는데 하나님이 왜 버리시겠습니까?
그런데 이혼할 수 있는 조건 중에 “음행”이라는 조건을 넣었습니다. 본문 32절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음행한 이유 없이는 ...” 이라는 단서 조항은 <마태복음>에서만 나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이 말이 없습니다(눅16:18, 막10:11-12을 본문과 비교).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유대인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항상 의식 속에 간음, 음행 이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을 섬길 때도 간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예를들면, 예레미야 3장 1절과 8절을 보면 “그들이 말하기를 가령 사람이 그의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그에게서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남편이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아니하겠느냐 하느니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절)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8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의 신을 섬기며,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고, 이혼증서를 써서 이스라엘을 앗수르에 주어 버리고, 유다도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고, 이혼중서를 써서 바벨론에 주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유대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다른 나라에 붙잡혀 가서 고생하다가 이제 와서는 눈물 흘리면서, 후회하면서 회개한다고 하면서 다시 오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유다를 향하여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 오려느냐, 본남편에게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 자가 다시 돌아오면 받겠느냐? 그렇게 되면 그 땅만 더러워지지 않겠느냐?(1절)”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하시는 말씀은 꼭 음행을 했다고 이혼할 권리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특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하나님을 떠나 음행하지 않았느냐? 너희는 하나님 앞에 간음죄를 짓지 않았느냐? 하나님은 너희가 간음죄를 짓고,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떠나 배반하고 하나님을 버렸을 때도, 돌아와 회개하기만 하면 다 받아 주지 않았느냐? 너희는 하나님 앞에 간음죄 지은 게 없느냐? 그런데도 하나님은 다 받아 주시고 버리지 않았잖느냐, 그러므로 음행을 했어도 아내를 버리면 안된다. 즉 이혼하면 안된다.” 라는 의미의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우리는 다 용서 받은 자들입니다.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우리는 주님 앞에서는 깨끗한 자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 간음한 자들이요, 주님을 떠났던 자들이요, 우상을 숭배한 자들입니다. 지금도 어쩌면 우상을 끼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다 용서받은 자들입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의 모든 은혜 아래에는 들추어내고 비판하고, 정죄하고, 내 마음에 안들면 버리는 삶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내 이익과 내 정욕의 삶은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여, 나에게 빛을 비추어 주옵소서.
주여, 나에게도 용서의 영을 주옵소서. 포용의 마음을 주옵소서.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