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원고/산상복음

29.[산상복음29]맹세에 대한 가르침=기독교인과 맹세

☆ 주님의 머슴 2021. 4. 5. 11:16

주일설교(2016/1/31)-산상복음(29)

맹세에 대한 가르침=기독교인과 맹세

마태복음5:3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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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본문은 맹세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맹세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하고, 맹세를 남발하고, 호언장담하는 풍조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런데 맹세해 놓고 맹세를 지키지 않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호언장담하며 맹세해 놓고 지키지 않는 것, 이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죄의식이 없었습니다.

하나의 예를들면, 구약성경에서는 고르반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고르반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드리게 되었다 라는 뜻인데, 부모님께 드리거나, 부모님을 부양해야 하는 소유물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었다라는 의미로 고르반이라고 맹세하고 선언해 버리면 하나님의 것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자기 소유로 가지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의무를 피해가는 도구로 고르반제도를 활용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마가복음 710-13절에서 아주 강하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 맹세에 대한 교리를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잘못 가르친 것을 정정해서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시대에 사람들은 자기의 명예를 지키고, 자기의 불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맹세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 위기가 지나가거나,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 맹세한 것이 허지부지해져 버렸습니다. 큰 소리 치면서 호언장담해 놓고 지키지 않는 것을 오늘 꼬집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과장되게 말하는 것, 과장되게 허풍을 쳐 놓고 지키지 못하는 것, 진실이 없는 거짓을 꼬집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모 일간지에서 1, 2부로 나누어 우리나라의 예약을 지키지 않고, 예약을 해 놓고 아무 연락도 없이 오지 않는 우리나라의 예약문화에 대해서 시리즈로 다루었습니다. 예약부도를 노쇼(no show)’ 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예약부도로 연간 45000억원 정도의 매출 손실을 본다는 겁니다. '노쇼(no show)'가 최근 들어 점점더 심해진다는 것입니다. 작년 추석명절에 역에 직접 나가서 예매한 것을 빼고, 인터넷으로 예매한 코레일 열차 승차권 인원은 모두 1354000여명이었는데, 이들 가운데 36%(481400여명)가 예매 취소를 하지 않은 채 발권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는 별개로 예매했거나 발권까지 마친 후 출발 당일 취소한 고객도 35%(471000여명)에 달했다는 겁니다. 둘을 합치면 무려 95만여개(71%)에 달하는 예약 승차권이 출발 당일 '예약부도(不渡)''막바지 취소'된 셈입니다.

 

노쇼(no show)란 예약한 손님이 미리 취소하거나 통보하지 않고서 나타나지 않는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가장 많다는 겁니다. 그 외에도 호텔, 식당, 병원 등 다양한 업종에서 이 no show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뭘 말하느냐 하면 우리나라는 약속 문화가 안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국민 전체가 약속을 안 지킨다는 겁니다. 예약부도가 제일 많은 곳은 관공서의 단체예약이나 기업의 단체예약, 교회 같은 이런 곳의 단체예약이라고 합니다. 사회 모든 전반에 사람들의 의식에 약속을 안 지킨다는 것입니다. 약속을 등한시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예수님시대에도 사람들이 약속을 잘 안 지켰다는 겁니다. 특히 거짓말을 잘 했다는 것입니다. 위기가 오면 그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고 그 맹세를 잘 안 지킨 것입니다.

 

오늘 읽은 이 마태복음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록되어졌고, 유대인들을 전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정확하게 알리기 위해 기록되어 졌는데, 그 당시 초대교회 때에 그리스도인 된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다르다. 너희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의미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이 산상복음(5-7)은 세상에 믿지 않는 자들과 다름을 요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본문 말씀도 너희는 그렇게 하지 말라 라는 의미로 주시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혹 이렇게 말하지도 모릅니다. ‘이 바쁜 세상에, 머리 쓸 일도 많고, 골치 아픈 일도 많고, 복잡한 일이 많은데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 이렇게 생각하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약속과 관계가 있습니다. 신뢰와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탓하지 말고, 사회와 국가를 탓하지 말고, 내가 신뢰를 쌓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약속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겠지만, 약속을 했으면 철저히 지키는 신뢰를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복음의 핵심이 뭡니까? 믿음이잖습니까? 믿음은 신실한 것, 믿음은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맹세는 약속이요, 신실한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인은 신실해야 됩니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진실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이 요구 하시는 맹세는 진실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함부로 약속하지 말고, 함부로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맹세했으면, 약속했으면, “반드시 지켜라라는 것입니다.

찬양 -->“신실하게 진실하게”(D,54)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본문의 내용을 다시 보면,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구약성경에서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라고 이렇게 정확하게 표현한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구약의 말씀을 근거해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구약의 말씀을 왜곡시켜 놓은 것을 꼬집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실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특히 맹세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신실해야 하며, 맹세에 대해서 분명하게 지킬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만든 이 너희가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라고 하는 이 규율은 원래 구약성경의 세 구절을 근거해서 만든 것입니다. 첫 번째 구절은 출애굽기 207에 있는 제3계명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말씀과, 두 번째 구절은 신명기613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그리고 세 번째 구절은 레위기 1912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런 구약말씀에 정통했습니다. 이런 구절들에서 이런 가르침을 뽑아내어서 너희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라고 만든 것입니다. (세 구절을 합치면 헛 맹세가 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망령되게 하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거짓 맹세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그런데 문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말씀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헛 맹세를 하고 맹세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부분은 구약의 모세 율법에서는 어떻게 말씀하고 있느냐 하는 것과, 둘째는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어떻게 해석했는가 하는 것과, 셋째는 예수님은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구약의 모세의 율법에서는 어떻게 말씀 하셨는가입니다.

 

맹세에 있어서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모든 것을 하나님과 관계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출발은 신실하고, 진실한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서 맹세는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하는 것과 사실이 아닌 것을 고의로 말하는 것을 못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또 하나는 맹세를 남발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소한 일에도 맹세를 하고, 아주 작은 문제만 생겨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했습니다. 일단은 맹세함으로 위기를 모면해 보려고 했습니다.

구약의 모세의 율법에서 맹세의 목적은 부분별하고, 말 뿐인 맹세에 종지부를 찍고, 맹세는 매우 엄숙하게 하고, 개인이나 국가의 어떤 특별한 위험이나 비상시에만 맹세를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613절이하를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원래 맹세는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변치 않을 사실을 말하면서 내가 너에게 반드시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겠다라는 것을 맹세로 보증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맹세는 모든 일의 최후의 확정이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구약의 모세의 율법의 정신에서 가져 온 것입니다. 맹세는 아무 때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맹세는 마지막 보루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맹세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들은 헛 맹세하지 말고, 맹세한 것은 하나님께 지켜라 라고 가르치면서 그들은 맹세를 남발했습니다. 맹세를 하나님과의 관계는 생각하지 않고, 영적인 것은 생각하지 않고 문자적으로만 강조하면서 내가 이렇게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속에서 그들이 어떻게 맹세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때 그 때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자기들이 불리하면 그 때 그 때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는 방법으로 맹세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늘로도 맹세하고, 땅으로도 맹세하고, 예루살렘으로도 맹세하고, 심지어 자기들의 머리로도 맹세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맹세한 그 맹세의 문제점을 마태복음2316절이하를 보면, 예수님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하면서 책망한 말씀 가운데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16)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7)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9)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이요

(21)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이요

(22)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이니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안 지켜도 되지만, 성전의 헌금으로 맹세하면 지켜야 된다라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제단으로 맹세하면 안 지켜도 되지만, 제단위의 제물로 맹세하면 지켜야 된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하는 것이요,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하는 것이요,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에게 맹세하는 것이 된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그 때 유대인들은 맹세를 얼마나 남발했으며, 맹세에 대해 모르고 맹세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비해 세 번째로 예수님은 이 맹세에 대해 어떻게 가르쳤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시면서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율법을 주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사실 율법을 만드신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율법의 권위자가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34-37)

 

왜 주님이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하십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맹세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맹세하는 사람이 문제인 것입니다. 맹세가 위선적이고,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자기의 이기심과 자기를 드러내고 남에게 돋보이게 하기 위해, 그리고 위기와 실수를 모면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서 맹세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37)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는 성도들의 신앙생활 중에 맹세를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 경건생활의 하나였습니다. 맹세를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 중에 하나였으며, 율법주의에 빠져있는 유대인들과 구별된 삶의 하나였습니다.

이것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말씀이 야고보서 512의 말씀입니다.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

 

초대교회 성도는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 신실하게 살았습니다. 진실했습니다. 신뢰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은 어디든지 달랐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힘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제국 전체에 빠른 속도로 기독교가 전파되어 갔습니다. 결국 1%정도 되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을 보면, 첫째는 예수님은 맹세나 저주하는 일에 항상 성스러운 호칭,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만물은 다 하나님께 속해 있음으로 피조물로도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으로나 자기 자신을 두고서도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무엇입니까? 큰 임금, 즉 예수님의 성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나라 새예루살렘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새예루살렘이 반드시 있으며, 그 새예루살렘의 큰 임금은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새예루살렘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므로 주권자가 계시는 예루살렘으로도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발등입니다. 또 우리의 머리로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내 머리카락 하나 희거나 검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권한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전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입니까?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가 일어나는 곳이요,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 머물러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맹세는 아주 거짓된 것이고, 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평상시 대화에서도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토론할 때도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고, 자기를 드러내려고 맹세하지 말라고 합니다. 특히 무언가 일을 진행할 때, 호언장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큰소리치면서 호언장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옳으면, ‘옳다’, 아니면 아니다라고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은 나약하고, 마음 속이 깨끗하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본래부터가 죄 투성이 이고, 죄악 세상에 거하기 때문에 자기가 한 맹세를 지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키지도 못하는 맹세를 그 당시에는 꼭 지킬 것 같지만, 지나고 나면 환경이 바뀌고, 마음이 바뀌면 지키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키지도 못할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정치인들이 맹세하면서 공약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말하면 거짓말하는 인생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아래 있는 성도는 거짓 인생을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맹세를 못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거짓말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세상이 우리를 다 보고 있기 때문에 헛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 아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존전에 있습니다. 우리는 늘 주님과의 교제의 관계로 살아 갑니다. 성령이 내 속에 내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맹세하고 그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 성령의 감동으로 실천해 가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성령의 이끄심의 삶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