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산상복음30]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기독교인과 보복
주일설교(2016/2/7)-산상복음(30)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기독교인과 보복
마태복음5: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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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보복하지 말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보복하지 말라.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십니다(히10:30).”
구약성경에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라는 말씀이 세 군데 나옵니다.
출21:23-25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레위기24:20에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신명기19:21에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
오늘 이 말씀도 구약의 모세오경의 정신과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정신과 예수님의 정신을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먼저, 이것은 구약의 모세오경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규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지역의 이방인들은 무조건 죽였기 때문입니다. 고대사회의 그 당시로 돌아가서 이 율법을 보면 이방인들의 법에 비하면 굉장히 자비로운 법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모세오경의 이 율법은 너무 지나친 것을 통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특히 이 말씀은 분노와 폭행과 복수에 대한 욕망을 통제하는 데 있습니다.
원래 인간은 본능적으로 나에게 어떤 해를 가할 때에 즉각적으로 본능적으로 되받아치는 본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본능에 순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소한 것에도 분내고, 성 내고, 보복하는 인간성을 멈추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되는 말씀은 39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이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이 율법의 정신이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라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세오경의 율법은 철저한 혼란 상태를 줄이고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한 것입니다. 구원의 창시자이신 하나님, 죄의 속박과 횡포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길을 만들어주신 하나님은 동시에 죄를 제어할 수 있는 길도 열어 주셨습니다. 은혜의 하나님이 동시에 율법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악과 죄와 그 모든 작용들을 파괴하고 끊어 버릴려고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은 죄와 악함으로부터 인간의 횡포, 인간의 포악함을 끊어버릴려고 주신 것입니다. 동등과 공평의 원리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을 빼어 냈다면, 그가 그것으로 해서 죽임을 당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냥 “눈은 눈으로”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다른 사람의 이를 부러뜨렸으면 피해자는 그 하나를 부러뜨릴 권리만 있습니다. 형벌은 거기에 부합되는 것이라야 하며 그것을 초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법의 정신입니다. 공평의 원리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과도한 복수, 보복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 법은 개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개개인은 내가 그렇게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보복할 수 없습니다. 피해를 입은 사람은 법에 호소를 해서 재판장이 그렇게 판결을 내렸습니다. 일반백성들은 분쟁과 문제거리가 있으면 재판관에게 그 문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재판관은 그 문제를 가지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고 더 이상이 되지 않도록 중재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 법은 사실 재판관에게 주어진 규율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예수님시대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개개인들이 그렇게 보복을 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본래의 모세오경에서 가르친 그 정신대로 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아주 잔인하게 보복해야 한다는 것과, 개개인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고, 개개인에게 보복의 정신을 길러주는 것으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그마한 양보도 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댓가를 지불해 주는 형식으로 아주 알차게 보복을 했습니다. 처음 모세가 율법을 줄 때의 그 정신에서 완전히 비켜 가버리고, 잔인하게 보복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어 졌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가나안 문화에 젖어 사는 이방인들과는 구별된 삶, 구별된 정신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더 지독하게 보복을 하는 것으로 사용되어진 것입니다.
이 법은 결국 한번 보복은 상대방으로 더 강한 보복을 하게하며, 사람의 감정을 더 상하게 하고, 더 원수의 원수를 만들어 갔습니다. 악한 사람을 보복함으로 용서가 아닌 더 악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사회는 더 혼란해 졌고, 사람들은 더 악해져 갔습니다. 철저한 보복정신은 더 원수를 만들고, 더 사람을 악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도 보면, 죄를 짓고 교도소에 들어가면, 더 강한 범죄자가 되어 나오는 겁니다. 한번 범죄를 저지르고 교도소에 가면, 초범이 재범되고, 계속 3범, 4범 계속 이렇게 범죄자가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강력한 범죄자가 되고, 범죄 조직과 연결되어 집니다. 법의 정신이 살리는 법이 아니고, 죽이는 법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기독교 교도소가 생겼습니다. 뜻있는 분들이 모여 교회가 돈을 대고해서 법부부와 협의해서 기독교 교도소를 만들었습니다. 기독교교육으로 그들에게 접근하고, 말씀으로 그들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결과를 보면 90%이상이 재범율이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늘 산상복음에서 특이한 점은 옛 모세의 율법을 다시 가르치면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는 말씀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22,28,32,34,39,44절에 계속 강조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구약의 율법이 기준이고, 성전이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신 후부터는 예수님 자신이 기준입니다. 지금까지 있은 구약의 모든 율법, 성전은 그림자일 뿐이었습니다. 오실 예수님의 모형이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것이 예수님이 기준입니다.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 운동장에서 줄을 설 때 제일 앞의 중앙의 한 학생이 손을 들고 ‘기준’ 이라고 하면 모든 학생은 그 학생을 기준으로 줄을 쭉 섭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기준입니다.
오늘 이 시대가 왜 혼탁합니다. 오늘의 문화가 부패한 문화가 되어 갑니다. 오늘의 지식이 높아가기는 하지만, 왜 사람을 힘들게 하고, 사람을 부패하게 만드는 지식으로 발전합니까? 왜 사람은 배우면 배울수록 더 부패합니까? 왜 사람이 가지면 가질수록, 부해지면 부해 질수록 강퍅해지고, 이기적이 되고, 마음이 더 공허해집니까? 예수가 인생의 기준이 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회, 정치,경제, 문화, 모든 것에 예수가 기준이 안 되어 있으면, 길이 안 열리고, 혼탁하고, 이기심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분명히 말씀합니다. “내가 기준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라는 말씀도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예수님이 기준이 되는 새로운 말씀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신은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내가 중심이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가 중심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인류를 위해 십자가 지신 그 십자가 정신입니다. 그래서 보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오해하면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산상복음을 보면서 자꾸 무저항주의, 비폭력주의를 강조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여기서 무저항주의, 비폭력주의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말하시려고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은 폭력을 행사하고, 저항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무저항주의, 비폭력주의를 말할려고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여기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의 원리는
첫째는, 이 가르침이 국가나 세계를 위한 것이 아니고,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에게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기독교인 된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는 이런 식으로 살아서는 안된다” 라는 말씀입니다. 원래 산상복음은 앞의 팔복이 오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오지 않는 사람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다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온 자는 그렇게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팔복을 가진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철저히 자신의 무능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교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죄인이며,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가망이 없는 자이었다는 것을 잘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 때문에 애통해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온유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영과 정반대되는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의에 주리고 목말라합니다. 이들은 긍휼히 여기는 자들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화평케 하는 자들입니다. 의를 위해 박해까지도 각오하는 자들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심령이 가난한 자, 거듭난 자, 그리스도의 영이 온 자에게 의미있게 받아 들이고, 그 말씀이 생명의 양식이요, 보약이요, 인생의 길잡이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인, 즉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살 수도 없고,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은 마귀에게 붙잡혀 살고, 지옥에 연결되어 살기 때문에 이 말씀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기독교인의 삶을 산다는 것은 그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형식적인 신앙, 형식적인 행위가 구원을 얻는 다면 기독교의 칭의(稱義)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오기까지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사람들은 다 이렇게 삽니다. 이렇게 살아야 되는 줄 압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해 주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은 이 세상 모두에게 요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온 사람, 팔복이 온 사람만이 가능한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육신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마음, 정신을 더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매우 영적인 가르침입니다.
42절에 나오는 말씀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꾸어 주는 문제”하고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는 것이나, 되돌려 치지 않는 것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가? 결국 여기서 우리 주님은 우리의 ”자아“, 우리 자신에 대한 태도, 즉 우리 마음의 자세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말씀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가 정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요, 거듭난 성도,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지배 받는 자라면, 너는 세상과 다르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그렇게 살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영이 문제이다. 영이 거듭나야 한다. 영이 죽어 있으면 안 되고, 영이 살아 있어야 한다. 이것은 너의 태도, 너 자신에 대한 태도이다. 진실한 예수님의 제자는 성질이 죽어야 하고, 태도가 부드러워야 하고, 영이 살아 있어야 하고, 온유해야 된다’ 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가 왜 이렇게 혼란합니다. 사랑이 식어가고, 배신이 판을 치고, 신의(信義)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사람들의 마음은 날로 날로 공허해져 갑니까? 왜 만족이 없고, 끊임없이 이기적입니까? 사람들의 마음은 거칠어지고, 여유가 없고, 모두가 신경질적이고, 부드러움이 없는 시대를 삽니까?
왜 이렇게 교회까지 침투해 들어와, 기독교 정신을 갉아먹는 이 지경까지 되었습니까? 우리는 말씀을 잃어버린 시대를 삽니다. 기독교사상, 기독교정신을 잃어버리고 삽니다. 옛날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가난하고 어려운 가운데 살았어도 기독교정신을 가졌습니다. 기독인의 자존심이 있었습니다.
요즘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목사가 13세된 딸을 때려서 죽이고 시신을 11개월 동안 방치한 사건입니다. 딸을 5시간 동안 빗자루, 빨래건조대, 쇠봉으로 때려서 죽였다고 합니다. 누구든 5시간동안 맞아서 안 죽을 애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한국교회가 무너지지는 소리가 나는 겁니다. 이런식으로 가다가 50년 안에 한국에 교회가 존재하겠습니까? 사람이 인간성이 중요합니다. 이제 목사도 신학교만 나와서 신학공부만 했다고 다 목사가 아닌 겁니다. 신학공부하면 뭐합니까? 박사면 뭐하고, 석사면 뭐합니까? 기독교 정신, 기독교 사상을 잃어버리면 안되는 겁니다. 오늘 세상은 정신 빠진 인간처럼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에도 침투해 들어와 기독교정신이 빠져 버렸습니다.
기독교정신, 기독교사상은 인간성을 바꾸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인간으로, 예수 정신을 가진 인간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고 하면 인간성이 바뀌어야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경이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악한 행동을 하지 말고, 악한 마음을 품지 말고,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과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달라야 한다. 악을 모양이라도 버려라. 이제 예수 믿었거든 변하여 새사람을 입으라.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은 산상복음을 통하여 기독교정신이 있다. 기독교적인 삶이 있다. 그리스도인 된 우리에게 ‘너희는 다르다. 너희는 다르게 살아라.’ 하시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