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산상복음31]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주일설교(2016/2/14) - 산상복음(31)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마태5: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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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산상복음에서 보복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보복의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문제와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의 영적인 문제, 또는 자아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교회가 생기는 곳마다 실재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내다보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복음 때문에,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더 심하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대적하고, 압박하는 자들이 의도적이고 계획적이든, 모르고 하는 짓이든 여러 방법으로 성도들을 힘들게 할 것을 미리 내다 보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악한 마음으로 얼굴을 때리기도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성도들의 물건이나 재산을 빼앗기 위해 법정에 고소하기도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섬김을 강요하기도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돈을 빌려 달라고 하여 손해를 입히기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성도들은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이런 저런 피해를 보고, 이런 저런 고난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재로 예수님은 얼마 있지 않아,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유대인 경비대가 예수님께 침을 뱉었고, 그의 눈을 가렸고, 얼굴을 때렸고, 그 다음에 로마 군인들이 그대로 따라했고, 그들은 예수님께 가시관을 씌웠고, 왕이 입는 자색 옷을 입히고 갈대 홀을 주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라고 야유했고, 조롱하고 무릎을 꿇고 절하면서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고, 손으로 얼굴을 때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항하지 않았고, 말 없이 침묵했습니다. 무한한 사랑으로 마음에 평강을 유지했습니다.
이것을 이사야 선지자는 미리 예언했습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으니라”(사50:6).
후에 사도 베드로는 이 장면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2:21-23) 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 말씀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매우 불편한 말씀일 것입니다. 그의 불가능에 가까운 말씀일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시대의 성도들에게는 이것이 가능했습니다. 우리나라 초창기 기독교가 들어오던 시대에도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나라 초대교회 때도 이 말씀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과 삶을 비교해 보면, 우리는 너무나 멀리 성경의 말씀에서 멀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39절에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라는 이 ‘대적하다’ 라는 말은 (안티스테미), '대적하다, 대항하다, 거역하다, 저항하다, 반대하다‘ 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에, 혹은 누구에게 저항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성경은 보통 하나님의 뜻, 그분의 진리, 그분의 권위 앞에 저항해서는 안된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마귀에게는 저항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사도바울도, 베드로도, 야고보도 모두 특히 악한 자, 그리고 모든 악의 권세 앞에 대적하라(엡6:13,벧전5:9,약4:7) 고 말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왜 “대항하지 말라” 라고 하십니까? 절대로 예수님의 명령은 죄와 타협하라. 마귀와 타협하라. 악과 타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라는 이 “악한 자”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 “악한 자”라는 원어 (포네로스)는 무엇에 의해 ‘나쁜 상태에 있는 자, 병든 상태에 있는 자, 나쁘게, 악한 상태가 되어 있는 자, 너희에게 몰라서 잘못하는 자’ 등의 뜻입니다.
우리가 대항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은 악 그 자체, 마귀를 의미하는 악한 자가 아니고 악하게 된 사람, 혹은 몰라서 나에게 잘못하는 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가 악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여기라거나, 그의 악한 행동을 너그럽게 보아주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악에 붙잡혀 있으니 악한 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시고자하는 말씀의 핵심은 우리가 보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잘못을 하는 누군가에게 보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4개의 짧은 실례는 모두 보복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원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영적인 자아가 죽어야 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실례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다양한 상황에서 나온 생생한 실례들입니다.
여기에는 우리에게 손상을 입히려고 하는 “악한 사람”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어떤 사람은 우리의 얼굴을 때립니다. ‘신체적인 자극, 신체적인 아픔과 모욕’을 주는 문제입니다. 다양한 신체적인 차원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이 느닷없이 오른편 뺨을 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즉각 되받아 쳐서 보복해야 합니다. 인간은 얻어 맞는 순간 보복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너희는 그렇게 하면 안된다” 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세상의 악한 자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일제시대 때에 김익두 목사님의 일화 중에, 김익두 목사님은 예수 믿기 전에는 유명한 깡패였다고 합니다. 장날만 되면 읍내 장터로 다니면서 돈 빼앗고, 국밥 사먹고 돈 안주고, 그래서 읍내에서는 ‘안악산 호랑이’ 라고 소문날 정도로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사람들이 '오늘 호랑이 익두인지 억두인지 만나지 않게 해 줍소서' 라고 성황당(城隍堂)에 빌었고, 만나는 사람마다 강제로 돈을 빼앗아 "김내라"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한 다음 맨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고장을 돌렸습니다. “김익두는 죽었다.”
사람들은 깡패 김익두가 죽었다는 부고장을 받고는 모두들 기뻐했습니다. 평소에 그 분이 얼마나 잔인하고 못된 일을 많이 저질렀기에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했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사람들이 많은 시장 한복판에 그 죽었다던 김익두가 나타났습니다. 목사가 된 그의 손에는 시커먼 성경책 하나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의 등장에 사람들은 놀라기도 했지만 어떤 사람은 변화된 그를 시험해 보려고 지나가는 김익두 목사님에게 물 한 통을 뒤집어 씌었습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물을 툭툭 털고는 물 끼 얻은 사람을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옛날 김익두가 죽었다는 그 사실을 기뻐해라. 살았다면 너는 요절이 났을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로마서 6:11).” 이 말씀을 늘 마음에 품고 살았습니다.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 어느 날 김익두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려고, 고개 너머의 교회로 가는데, 너무 너무 더워서 산꼭대기에 올라가서는 웃옷을 벗고 나무 그늘에서 평안히 쉬고 있는데, 그 때 맞은편에서 술이 건아 하게 취한 사람이 비틀거리면서 올라 왔습니다.
그 사람이 김익두 목사님께 오더니,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왜 당신이 여기 먼저 올라 왔느냐?" 말 같지 않은 소리로 자꾸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말대꾸를 안 하니까 이 술 취한 사람이 김익두 목사님을 장작 패듯이 그냥 패는 것입니다.
이때 김익두 목사님은 한마디 말없이 다 맞았습니다. 얼마동안 때리더니, 이 사람이 그 때리던 것을 멈추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이 묻기를 "형님 다 때렸소?" 그랬더니, 이 사람이 "다 때렸다 왜?" 하고, 또 때리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 김익두 목사님이 정색을 하고, 그 사람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 그랬더니 이 사람이 눈이 휘둥그래 지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김익두라는 사람이요." 그랬더니 이 사람이 김익두라는 말을 듣더니, 얼굴 안색이 변하여 그냥 초죽음이 되었습니다. 이때 김익두 목사님이 하는 말이, "내가 예수 믿기 전이라면 당신은 오늘 장례식 날이야, 내가 예수 믿은 덕에 당신이 오늘 산 줄을 알라"고 했더니, 이 사람이 그냥 머리를 땅에다 대고 "형님, 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무얼 어떻게 해, 따라와.“ 그래서 자기 부흥회 하는데 데리고 가서 자리에 앉혔습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예수 믿고 훌륭한 장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법정에서 고소, 고발하는 문제입니다.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 까지도 가지게 하며”(40절)
주님은 내 속옷을 요구하며 법정으로 끌고 와서 송사하는 사람의 실례를 드셨습니다.
구약율법의 유대법에는 속옷을 요구하며 송사하는 것이 합법이지만, 겉옷을 요구하며 송사할 수는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에게 ‘너희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은 법정으로 끌고 가서 재판해서 자기 권리를 주장할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너희는 법정으로 끌고 권리를 주장하는 일을 자제하라’는 것입니다.
대검찰청의 ‘2015년 형사사건동향’ 이란 통계에 의하면 지난해 1월~11월 접수된 형사 사건은 178만6757건으로 전년 동기대비 5.8%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중 고소·고발 사건은 47만229건으로 전체 28.3%를 차지했습니다. 해마다 고소, 고발 사건이 20%씩 증가 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가지고 고소하고, 아주 사소한 것 가지고 고소하고, 고소, 고발을 남용하는 일이 너무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경찰서에는 요즘 차량에 블랙박스가 설치되어 있으니까, 차에서 담배꽁초 버리고, 침 뱉고, 차선위반, 신호위반 등등 여러 가지 교통위반 건수들을 블래박스에 촬영된 것을 증거물로 가지고서 고발하는 사건이 너무 많다는 겁니다.
오늘 이 세상은 진짜 문제가 되는 자기 의무는 등한시 하면서 자기 권리만 주장하는데 지칠줄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점점 인심이 흉악하고, 삭막한 시대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정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그리스도인이니 이런 방법으로 살지 말라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권리를 이용해서, 그리고 남의 약점을 이용해서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이런 아주 이기적인 정신을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10리를 가주는 문제입니다.
섬김을 강요당하는 문제입니다. 5리를 가자고 요구하던 일은 고대 사회에는 매우 흔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로마와 같은 지배국에서 군수물자나 권력자가 짐을 어느 지점까지 운반할 때, 사람을 징발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한 장소에서 다음 장소까지 짐을 운반해야 할 때, 주위에 있는 아무 사람이든 불러서 5리를 지고 가게 했습니다. 그런 다음 또 다른 사람을 붙들어 그것을 다음 장소까지 지고 가게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억지로라도 5리를 지고 가야 합니다. 거부할 수 없습니다. 거부하면 채찍에 맞거나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억지로 지고 가는 것입니다.
“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41절)”
그들이 요구하는 그 이상으로 해 주라, 10리를 가주라는 것입니다. 짜증내지 말고, 신경질 내지 말고, 기분 나빠하지 말고, 억지로 하지 말고, 상대방이 감동을 받도록 적극적으로 해 주라는 것입니다. 이왕 해야 한다면 억지로 기분 나쁜 마음으로 하지 말라라는 것입니다. 내가 기쁨으로 10리를 가주면 일을 시키는 사람에게도 감동을 줄 것이고, 내 다음에 5리를 지고 가야 하는 한 사람에게 짐을 덜어 주는 일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해 줄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의 정신에 따라 그 이상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정부가 요구하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분개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즉 우리가 싫어하고 반대하는 법에 대하여 불쾌하게 여기고 시위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회생활 하다가 보면 억울한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특히 직장생활에서 내 일이 아닌데다 어쩔 수 없이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국가의 법적용이나, 세금 문제 같은 것에도 적용됩니다. 기독교인은 탈세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많이 낼려고 합니다. 기독교인은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합니다. 기쁨으로 합니다. 일을 해 주어도 더 많이 해 주어버립니다.
베드로전서 2장 18절부터 보면, 직장생활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우리는 불평하지 말자라는 것입니다. 요구한 그 이상으로 더 열심히 해 주자라는 것입니다.
이상의 문제들은 결국 우리의 자아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아가 살아 있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에 내 자아를 죽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을 대적하고 말씀을 거역하려는 “견고한 진”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견고한 진을 깨뜨려야 된다는 것입니다(고후10:4).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자입니다. 우리의 영은 예수를 몰랐기 때문에 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었던 자들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다시 살았습니다. 그래서 생명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 13절에서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몸을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라” 라고 말씀합니다.
고후4: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즉 거듭나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이나 비기독교인들에게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들은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합니다. 오직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만이 이해할 수 있고, 그리스도인들만이 받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거듭나지 아니라고는, 아무도 성령을 받지 않고는 이런 삶을 살기를 소망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만이 기독교인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고상하고 고귀하고 신성한 가르침을 거듭난 기독교인들에게만 주시는 것입니다. 산상복음은 세상을 향하여 대항하면서 대안을 제시하며 허다한 무리를 따를 것인가, 예수를 따를 것인가, 세상 바람에, 풍류에 흔들리는 갈대가 될 것인가, 예수의 말씀에 지배를 받을 것인가, 기독교인의 삶이 이런 것이다 하고 보여 주면서 살아야 한다. 너희는 다르다, 다르다, 다르다 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