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산상복음32]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름
주일설교(2016/2/21) - 산상복음(32)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름
마태복음5: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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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만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니라 나도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나도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실 때에 나도 부활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고, 이제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고백의 신앙이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 구석구석에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갈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롬6:11,13)에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고후4:10-11)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놀라운 고백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은 ‘내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다’는 말입니다.
언젠가 어떤 연기자에 관한 기사를 읽어 보니 제일 어려운 연기 중 하나가 죽는 연기라고 했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죽은 자는 자아가 없습니다. 죽은 자는 욕심도 없습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바로 나의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었다고 했는데 도대체 나의 무엇이 죽었다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와 함께 나의 죄가 못 박혀 죽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우리는 더 이상 죄에 대해 살아있는 자가 아니라 죄에 대해 죽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지은 과거의 죄, 현재의 죄, 앞으로 지을 미래의 죄까지 모두 사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와 함께 죽으면 죄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나의 자아가 못 박혀 죽은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죄뿐 아니라, 내 자아도 죽었습니다. 나의 이기심, 나의 주장, 나의 욕심, 정욕도 죽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갈2:20) 는 문장을 보면 시제가 현재완료형입니다. 지금까지 죽어 있는 것입니다. 2000년 전 주님이 갈보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우리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주님이 죽으심으로 우리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현재도 죽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내가 믿음 안에서 주님과 하나가 됩니다. 나도 십자가에 죽은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동일시’ 또는 ‘연합’ 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과의 ‘죽음과의 연합‘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을 때 새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 이제는 나만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여기서 ‘살다’는 모두 현재형입니다. 우리가 계속 죽으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속 사십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끝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음으로써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신앙은 결국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나도 십자가에 죽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 수 있습니다. 이 신앙의 고백으로 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다시 사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2장 24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했습니다. 또 마태복음16장24절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했습니다.
자기 자아를 죽여야 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앞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은 늘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이기 때문에 자기를 내려 놓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져야 된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육체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고후4:11).
성경은 ‘겉사람’과 ‘속사람’에 대해 말씀합니다. 겉사람과 속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롬7:22에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엡3:16에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 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고후4:16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 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성경은 ‘겉사람’과 ‘속사람’으로 나눕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그 사람의 영은 ‘속사람’이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그 사람의 밖은 ‘겉사람’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우리 사람의 영이 바로 ‘속사람’이고, 보통사람들이 감지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겉사람’입니다. 우리 ‘속사람’은 옷 한 벌을 입은 것 같이 ‘겉사람’을 입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과 생명을 두신 곳이 바로 ‘속사람’ 입니다.
이 ‘속사람’ 밖에는 우리의 생각, 감정, 의지, 즉 지,정,의를 가진 혼이 있으며, 그리고 가장 밖에는 우리 전체의 육체인 몸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입니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영, 혼, 육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생각, 감정, 의지, 이것이 내 ‘겉사람’ 인 것입니다. 이 ‘겉사람’ 이 내 육신과 짝을 이루어 나쁜 습관을 만들어가고, 나쁜 생활을 반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가 되어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것,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교회를 섬기고, 주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 믿음생활을 한다는 것은 ‘속사람’이 흘러나오는 사람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믿음생활이 바로 안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속사람’이 ‘겉사람’을 뚫고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속사람’은 ‘겉사람’이 뚫릴 때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16장24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라고 하신 이 말씀도 우리의 ‘겉사람’이 깨어지고 파쇄되어 ‘속사람’이 흘러나온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든 일의 첫 번째 문제가 상대편에게 있지 않고, 내 겉사람이 깨어지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옥에 갇힌 것처럼 감금되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의 영을 덮개로 덮어 놓은 것과 같이 나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 겉사람을 뚫고 밖으로 흘러나올 때, 우리가 제대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고, 진정한 섬김이 일어나고, 순종이 일어나고, 신실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우리의 영, 우리의 속사람이 출구를 얻도록 우리의 겉사람을 파쇄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이 예수를 믿고, 성령이 역사하면 이 성령님은 내 속사람, 즉 내 영을 건드리고, 내 영과 연합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내 영과만 상대하려고 합니다. 성령님은 내 속사람과 하나 되어 역사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님은 내 영, 즉 내 속사람과 연합하여 밖으로 분출해 내어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고, 내 삶 전체를 주도해 가고, 나의 정신, 나의 마음, 나의 생각, 감정, 의지를 사로잡아 내 육신까지도 붙잡아서 내 전 생애를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역사하는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믿음이 역사하는 그리스도인! 믿음이 겉사람을 뚫고 밖으로 분출하는 그리스도인! 성령이 나의 겉사람을 깨고 밖으로 흘러나와 성령이 충만한 그리스도인! ........할렐루야!
요한복음12장24절에서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은 밀알 안에 있습니다. 밀알 밖에는 상당히 두꺼운 한 겹의 껍질이 있습니다. 이 껍질이 갈라지지 않는 한, 밀알은 싹이 날 수 없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이게 중요합니다. 이것은 죽음을 말합니다. 껍질이 갈라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속에서 싹이 나옵니다. 겉사람이 파쇄 되어야 속사람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14장3절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마가복에서는 여기에 “순전한” 이라는 단어를 추가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향유는 순전한 나드 기름이고, 진실로 신령한 것입니다. 그러나 옥합이 깨어지지 않으면 결코 순전한 나드 기름은 흘러나올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순전한 향유보다는 옥합을 더 아름답게 보고 귀하게 여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옥합은 겉사람입니다. 옥합이 깨어져야 순전한 나드가 흘러나옵니다.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옥합을 더 귀하게 여깁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겉사람을 더 귀하게 여깁니다. 겉사람을 가꾸기에 온 마음을 쏟아 붓습니다. 돈을 투자하고, 시간을 투자하고, 정성을 드립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총명을 귀히 여기고, 어떤 사람은 자기의 생각, 자기의 감정, 자기의 의지를 귀히 여깁니다. 현대인들은 육체를 가꾸기에 몰두하고, 겉사람을 높이고 드러내느라고 지혜를 짜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살리는 것이 영이니”(요6:63). 사람을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 “육은 무익하니”, 육체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영만이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영이 잘못되어 있고, 영이 부패해 있으면, 내 생각도, 내 감정도, 내 의지도 부패해 있고,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자는 영이 살아 있는 자입니다. 영이 살았는 자는 겉사람을 깨뜨리고 속사람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가 말하는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십자가라는 말을 많이 듣고 사용하지 않습니까? 나무로 만든 십자가 모양의 조형물, 목걸이에 달았는 십자가 모양 그것입니까?
십자가는 겉사람을 파쇄하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여러분의 겉사람을 다 헐어버리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내 생각을 죽이고, 내 의지와 감정을 죽이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고린도후서 10장4,5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견고한 진”을 처단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이론,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교만, 나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는 곳입니다. 내 겉사람이 ‘견고한 진’이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의 모든 이론이요,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교만이요, 나의 모든 생각입니다. 이것을 십자가에 못박아 처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겉사람과 속사람의 싸움이 두 번 있었습니다. 하나는 광야에서 40일 금식후 마귀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을 때이고, 또 하나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한 때였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겉사람을 깨뜨렸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자기의 겉사람을 죽음에 넘기셨습니다. 갈보리 십자가는 결심한 겉사람을 내 맡긴 곳일 뿐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이후,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의 심문, 빌라도 총독의 재판, 이후의 모든 고난들,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까지 모든 과정의 일들은 예수의 겉사람을 하나님의 뜻대로 내 맡기고 넘겨 버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39-42절을 다시 보십시다.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이 말씀을 악한 자, 내 오른편 뺨을 치는 자, 나를 법정에 끌고 가서 고발하고, 고소해서 나를 힘들게 하는 자,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는 자, 나에게 사기성을 가지고 속이고 무언가 구하고 돈을 꾸고자 하는 자,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너무 너무 많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상대해야 하는 이 세상은 다 이런 자들일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 내 지혜로는 이런 세상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구석에서 이런 자들을 만날지 모릅니다. 이런 자들을 내 능력으로 싸워 이길 수도 없습니다. “너무 속상해 하지 마라, 너무 아까워하지 마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 버려라. 때리려고 달려들면 맞아주고, 빼앗으려고 달려들면 주어버리고, 억지로 섬기라고 하면 섬겨주고, 빌려달라고 하거든 빌려 주라. 안 주면 할 수 없는 것이고, 주면 받는 것이고, 너무 안달하지 말고, 안타까워하지 말고, 신경질내지 말고, 오히려 영적인 자유를 누려라”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TV에서 “서민갑부” 프로그램을 봤는데, 5일장을 다니면서 좌판을 벌려 생선을 파는 분인데, 한 달에 2,000만원, 3,000만원을 버리는 겁니다. 사람들이 좌판 앞에서 살까 말까 망설인다든가, 비싸다고 따지면, 덤으로 한 두 마리 더 주어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외상으로 다음에 주겠다고 하고 그냥 가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라’고 하면서 덤으로 더 주어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PD가 물었습니다. ‘그러다가 못 받으면 어떡하느냐?’ 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못 받으면 할 수 없는 것이고, 안 주면 못 받는 거지 뭐,’ 그런데 신경 안쓴다는 겁니다. 사람이 열심히 살고, 게으름 피우면 안되지만, 너무 돈에 대한 욕심이 있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너무 따지고 계산하고 이기적이고, 내것 하나라도 잃어 버리지 않으려고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수 많은 생선가게가 수두룩하게 있었지만, 그 집 가게 앞에만 북적북적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고,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에 있습니다. 우리의 행함이 중요합니다. 왜 우리의 행함이 중요합니까? 그것이 우리의 사람 됨됨이를 나타내 주기 때문이고, 우리가 그리스인인가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 자신을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즉 자아를 죽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땅을 살면서 관심를 가지는 것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입니다. 인정받으면 기분이 좋고, 살만 납니다. 또 하나는 비난 받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비난 받으면 기분 나쁩니다. 살맛이 다 떨어지고 우울해 집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십시오. 무엇에 인정받고 싶고, 비난받는 것이 싫습니까? 육입니까? 영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비난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편으로 예수 때문에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고, 비난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기쁨만을 위해 살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땅의 영광을 취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연예인들도 대중의 인기에 목말라하고 인기에 영합해서 인기에 흔들려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면 연예인 생활이 짧다고 합니다. 오히려 자기가 하는 연기 그 자체에 몰입하고, 연기가 좋아서, 연기를 위해서, 인기에 신경 쓰지 않고 연기를 하면 그 인기가 오래 간다는 겁니다.
우리는 왜 예수 믿습니까? 예수가 좋아서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살려 주셨기 때문에, 예수가 좋아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연기자가 연기가 좋아서 연기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가 좋아서 예배하고, 성경 읽고, 기도하고, 말씀 듣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 건강, 축복, 성공, 병을 고쳐 주시는 것, 돈을 잘 벌게 해 주시는 것, 여기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이것을 목적으로 예수 믿는 게 아니잖습니까? 이것은 예수 믿는 자들에게 덤으로 주시는 것이고, 안 주셔도 그만이고, 주시면 더 좋고, 안 주시면 현재 있는 것으로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가 있어서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아를 죽이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