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산상복음33]원수를 사랑하라
주일설교(2016/2/28) - 산상복음(33)
원수를 사랑하라
마태복음 5:43-48
======================================================================
우리는 지금 주일마다 마태복음 5장-7장에 있는 산상복음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전하신 말씀 가운데 산상복음의 말씀보다 더 위대하고 꼭지점에 있는 말씀은 없습니다. 산상복음의 말씀은 정말 신비롭고, 위대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분명히 말합니다. 산상복음의 말씀대로만 살면 이 땅에 전쟁이 없고, 평화가 지속되며, 유토피아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그러나 사람들은 이 산상복음대로 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이 말씀대로 살 수 없도록 만들어 갑니다. 이것은 바로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세력이 인간이 아니라, 공중의 권세 잡은 흑암의 세력, 즉 사탄의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모두 이 말씀대로만 살면, 이 세상은 평화가 이루어지고, 유토피아가 이루어집니다. 글자 그대로 온 세상이 에덴동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마음속에는 이기심과 욕심, 지배하려는 강한 욕망, 폭력성, 이러한 것들이 인간 속에서 분출해 낼 때마다 평화를 만든다고 하면서 부수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괴롭히고, 섬기며 봉사한다고 하면서 내 뜻대로 내 의지대로 하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 방식대로 하고, 심지어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 하는 것, 예수 믿는 방식도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내 방식대로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현상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사탄의 세력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만유를 회복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산상복음대로 사셨습니다. 그 결정체가 십자가입니다. 산상복음은 십자가로 연결됩니다. 산상복음이 위대한 것은 십자가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독교가 위대한 것은 십자가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 정신입니다. 산상복음은 십자가 정신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의 정신, 십자가의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라고 하시는 것이지요.
인간은 다 연약한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 힘이 없습니다. 인간이 대단한 것 같지만, 대단한 것이 없습니다. 인간이 십자가 정신을 가질 때 오히려 강해지는 것입니다. 산상복음으로 들어 갈 때 오히려 강해지는 것입니다. 산상복음은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인간의 강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인간은 복음으로 들어갈 때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다같이 복음으로 들어가십시다. 우리 다같이 팔복을 지나 산상복음으로 들어가십시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읽은 본문을 보십시다.
본문 44절을 보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했습니다.
이 구절을 다른 사본들에 보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너희에게 악행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로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 27-28절에도 비슷한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아마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는 다른 사본들에 있는 것이 더 이해하기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가르침대로 하면 43절 말씀대로 “네 이웃을 사람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43절) 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 어디에도 이런 말씀이 없습니다. 레위기19장17-18절에 보면, “(17)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18)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구약율법에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있어도,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네 이웃은 사랑하지만, 네 원수는 미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구약의 율법을 왜곡시켜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했습니다. “화 있을진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왜 이렇게 책망했습니까? 그들은 구약의 율법을 왜곡시켜 가르쳤을 뿐 아니라, 바르게 가르치는 선지자들을 배척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왜 이렇게 가르쳤을까요? 그들은 이 “이웃”이라는 개념을 달리 해석했습니다. 이 “이웃이 누구냐?” 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 중에서도 이 “이웃”이라는 개념을 놓고 첨예한 대립을 이루었습니다. 율법학자들 중에서도 이 “이웃”에 대한 개념을 놓고 열띤 공방을 벌리고, 싸움도 했습니다.
누가복음10장 29절 이하에 보면,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찾아 와서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 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해 줍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는데, 강도들이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은 것을 버려두고 갔는데,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을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그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바르고 그를 싸매어 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 갚겠습니다’ 하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그 율법학자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누구가 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누구가 이웃이냐?” 라는 것입니다. “예,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그럼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고 했습니다.
“누구가 이웃이냐?” 예수님 당시 이 이웃에 대한 개념이 혼미했습니다. 아마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마 우리도 “내 이웃이 누구인가?”라는 이 개념이 분명하지가 않을 겁니다. 오늘 예수님은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내 이웃에 대한 개념을 분명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웃”을 유대인들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유대인들을 사랑하라고 가르쳤지만, 동시에 유대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원수로 여기라고 가르쳤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선택 받은 자들이고, 유대교에 입교한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요, 순수혈통의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한 혈통이요, 한 이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다 저주 받은 자들로 원수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개(犬)로 여겼고, 이방인들을 멸시했습니다. 저주받은 자들로 취급했습니다.
이와 같이 열심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가운데는 유대인 아닌 모든 사람들을 멸시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신앙이 좋은 것이고, 그들을 원수로 생각하고 미워하는 것을 그들의 임무요, 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상은 구약 성경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한번 적용해 보십시다. 우리는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이웃으로 생각합니까? 원수, 사탄, 마귀라고 생각합니까? 지옥 갈 인생들, 저주받을 인생들로 생각합니까?
잘 믿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중에, 그리고 신앙이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나는 구원 받았다. 나는 선택 받았다’ 라고 자만심으로 꽉차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믿지 않는 자들을 보면서 ‘저주 받은 인생, 지옥 갈 인생, 원수, 사탄’ 이라고 생각하고 아주 멸시하고 천대하는 교만으로 똘똘 뭉쳐져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옛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똑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례요한이 이런 자들을 향하여 뭐라고 했습니까?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3:9-10).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찍어 불에 던져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이웃이라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방인들이 이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특히 원수도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을 이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원수가 아니고, 구원 받아야 할 대상이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수들도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원수 까지도 적극적으로 이웃으로 만들어라는 것입니다.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사람들을 그들의 신분에 따라 취급을 다르게 하거나, 그들이 우리에게 행하는 바에 따라 좌우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대하는 상태에 따라서 우리의 태도가 달라지고 좌우되는 삶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악하고 더럽고 불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사심(私心) 없이 대하신다 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앞에 있는 말씀보다 더 적극적인 말씀입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5리를 가자하면 10리를 가주고, 속옷을 요구하면 겉옷까지도 주고, 가지기를 요구하거든 주어 버리라” 이것은 자기에 대해서는 죽고, 자기의 이익을 죽이고, 자아를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여기서 훨씬 더 앞으로 나아가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정신, 예수님의 심정이 나에게로 그대로 이사 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유의 삶을 사는 비결은 우리가 철저히 초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 앞에 우리는 초연한 자세, 초연한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의 행위에 지배를 받지 않아야 하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초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위해 살게 되고,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고, 삶의 목표와 목적이 자기 자신이 되면, 자연히 본능적으로 민감해 지고, 경계하게 되고, 시기와 질투가 많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늘 시기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즉시 반응합니다.
우리가 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고, 주님을 위해 살게 되면, 세상에 대해 민감해질 필요가 없고, 다른 사람을 경계하거나 시기가 일어나거나 다른 사람의 행동에 즉시 반응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은 초연한 위치에 있으며, 보다 차원이 다른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보는 눈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말이 다른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또 다른 나라에 속해 있기도 합니다. 기독교인은 새 사람,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 때문에 기독교인은 만사를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봅니다. 그리고 다른 모양으로 반응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세상에 지배를 받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지배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TV조선을 보니까, 북한의 성도들이 가정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았는데, 예배를 드릴 때, 벽에 걸어 놓은 김일성, 김정일 사진을 보자기 같은 것으로 가리거나, 아니면 아예 방바닥에 내려놓고, 엎어 놓든가, 보자기로 덮어 놓고 예배를 드리는 동영상을 본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북한 땅에, 그들의 체제 속에 갇혀 살지만, 그들의 지배를 받지 않겠다.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않겠다는 정신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에 대해 초연한 위치에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행하는 일에 지배를 받지 말자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나를 돌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가장 비극적인 것 중에 하나가, 우리가 세상과 다른 사람에 대해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고 지배를 받으며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세상의 변화에 따라 춤추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보조를 맞추고 살다보니 세상에 지배를 받는 처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 여기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기독교인이 이 세상에서 다르다 라는 것입니다. 다르다 라는 의식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다르다 라는 의식을 가질 때에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좋아하는 단계와 사랑하는 단계는 다릅니다. 좋아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은 전혀 다르다는 말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좋아하는 사이였다가 그것이 발전하여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야 결혼하게 되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보다 한 단계 더 발전해야 사랑하는 사이가 됩니다.
그런데 좋아하지 않는데 사랑하는 사이가 될 수 있습니까? “나는 사랑하기는 하는데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말이 안 맞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이 소극적이라면, 사랑하는 것은 적극적인 것입니다. 좋아하는 단계를 넘어 적극적인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기도한다는 것은 적극적인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사랑과 기도를 동격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좋아하는 단계를 넘어 원수를 사랑하는 단계로까지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세리는 악인의 대명사로 쓰였습니다. 세리는 반역자, 매국노, 죄인, 악인으로 취급 받았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46절) 악한 죄인들도 자기들끼리는 서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악인들끼리도 서로 사랑하는, 이 끼리 끼리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예수님처럼 나를 대적하고, 나를 없애려고 하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사랑이 식어져 가는 시대에 삽니다. 악인들도 자기들 끼리는 사랑하는데, 이제는 사랑이 식어져서 성도들 끼리, 서로 서로 끼리 끼리도 사랑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시대에 산다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 교회끼리도 장벽으로 가로막고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한 술 더 떠 교인 교인끼리도 보이지 않는 장벽을 쌓고 좋아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그 이상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내 힘으로는 실패합니다. 내 능력으로는 안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 붙잡고, 신실하게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약1:17).
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요일1:9)
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44-45절)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되는 비결,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비결, 이것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 끼리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그 사랑인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