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산상복음38]하늘의 보물, 땅의 보물
주일설교(2016/4/24) - 산상복음(38)
하늘의 보물,땅의 보물
마태복음6:19-21
2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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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전반부인 1-18절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하고, 후반부인 19-34절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회생활, 즉 신앙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어떤 마음의 자세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종교적인 책임과 세상적인 책임을 잘해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두 개를 분리시키면 안됩니다. 이 신앙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을 분리시켜 신앙생활은 신성한 것이고, 세상적인 것은 세속적인 것이기에 무족건 불경건한 것이라고 부정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세상적인 일이라 하더라도 – 예를들어 직장의 일, 쇼핑, 운동, 요리, 전반적인 사회활동 등 –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내 욕망을 채우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면, 신성한 것이고, 경건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두 영역, 곧 개인적인 신앙행위와 사회생활의 영역, 즉 종교적인 책임과 세상적인 책임에 대해 똑같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두 영역에 대해서 예수님은 똑같이 명령하십니다. ‘세상 문화를 대할 때도 다르게 대하라.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위선적인 사람들처럼 하지 말고 다르게 하라. 물질적인 것에도 세상 사람들처럼 하지 말고 다르게 대하라. 종교적으로는 바리새인들처럼 하지 말고, 세상의 삶에는 이방인들의 가치관과 이방인들처럼 하지 말라’ 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도 두 보물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보물과 하늘에 있는 보물,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19-21절).
그러면 둘 중에 하나를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인간에게 세상적인 야망과 물질적인 야망은 대단히 매력적으로 다가 옵니다. 특히 물질의 욕망, 물질의 매력은 끊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잘 선택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인간은 잘못된 길로 가고, 잘못된 것을 선택하고도 어리석고, 지혜가 없어서 오랫동안 그것을 잘 모릅니다. ‘아, 그것이 잘못된 길이구나,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구나!’ 하는 것을 알 때는 한참 후가 됩니다. 인간의 야망에 대한 부분도 마찬가지여서, 오늘 예수님은 거짓된 것과 참된 것을 비교해서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깨닫도록 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늘 절박감으로 살아갑니다. 삶의 위기들이 피부로 느낄 정도로 우리 앞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기에는 늘 불안합니다. 세계의 인구는 점점 팽창해 가고 있음에도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인구가 줄고, 노인 인구는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일 할 인구는 줄고, 놀고 먹는 인구는 늘어만 갑니다. 그런데 일 할 인구는 줄어드는데, 일 자리도 또 줄어듭니다. 즉 취업이 잘 안됩니다. 실질 청년 실업률을 30%가 넘어갑니다. 국가 통계는 못 믿는 겁니다. 경제는 점점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집니다. 부자는 계속해서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 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조선업계의 불황, 미래의 금융시장의 불안, 자동차업계의 불황)
그리고 사회의 도덕적 지수가 무너지고 있다고 합니다. 사회적 양심도 무너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제는 알면서도 못 본 체하면서 살아갑니다. 기독교인들도 이제는 신앙의 양심보다 자기의 만족을 위해 불의를 눈 감아 버리고, 책임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그 자체가 마음에 심한 불편을 느끼면서 무반응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 근심, 걱정. 두려움을 없애고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네 마음을 하늘에 두라는 것입니다. 네 마음을 이 땅에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이 땅에 빼앗기지 말고, 하늘에 두고 살려면, 하늘에 보물을 쌓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요? 내 보물이 있는 곳에 내 마음도 따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부터 34절까지는 한 마디로 물질과 관련된 삶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질만을 추구하며 사는 인생의 어리석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탐욕스러운 부자들만을 향해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은혜와 거리가 멀기 때문에 이 말씀에는 아무런 해당이 안됩니다. - 물질을 땅에 쌓기를 바라며, 물질에 붙잡혀 물질을 최고로 여기고, 탐욕스런 물질의 욕망과 물질을 나의 최고의 안전한 처소로 삼고, 물질 뒤에 숨어 평안을 얻으려고 하는 자들, 누가복음 12장 16절에 나오는 욕심 많은 부자처럼, 그냥 자기의 장래를 위해 쌓기만 하는 부자는 이 말씀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가난한 사람을 향하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사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물질 때문에, 땅의 보물에 욕망을 가지고 살다가, 하나님의 나라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먼저 집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소유 자체에 대하여 금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사유재산을 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저축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증권도 사 모으고, 보험에 가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개미가 여름에 겨울에 필요한 양식을 저장해 놓는 것을 지혜롭다고 하면서 칭찬했습니다(잠6:6이하).
그러므로 재산을 가지는 것도, 미래를 위해 대비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좋은 물질을 가지고 좋은 일하며 누리는 것도 멸시 받을 일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땅에 보물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19절, 20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너희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자기 자신 만을 위하여, 탐욕스러운 욕망으로, 땅에 쌓지 말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20절에 “너희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라고 하십니다. “너희 자신을 위하여”라는 말을 두 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질은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인데, 이왕에 그렇다면, 너 자신을 위해 땅에다가 쌓지 말고, 너 자신을 위해 하늘에 쌓으라 는 것입니다.
왜 보물을 하늘에 쌓아야 합니까?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는 땅에 쌓은 보물은 결국 내 것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땅에 보물을 쌓는데,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에서는 다양하게 말씀합니다. 좀도 먹고, 동록도 먹고, 도둑이 도둑질해 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옛날 고대 사회는 요즘처럼 은행이 없으니, 은행이 있어도 안전하지가 않으니, 돈이 생기면, 항아리에 넣어 땅에 묻어 놓습니다. 결국 오래두면 녹이 쓸게 됩니다. 녹슨 동전은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좀이 먹는다는 말은 창고에 넣어둔 곡식이 해충, 기생충, 쥐 등등에 의해서 먹어 치우고, 오래되면 곰팡이 피고 해서 먹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전쟁이 일어나거나, 도둑이 들어와서 빼앗아 가는 일이 많으니, 이래 저래 다 빼앗기고 내 것이 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내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이 가 있다” 라고 하십니다. 땅에만 보물을 쌓으면 땅에만 마음이 가 있습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으면 하늘에 마음이 가 있습니다. 내가 쌓은 곳에 마음이 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보물을 쌓은 자는 마음이 하나님 나라에 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는 자는 내 보물을 하나님 나라에 심은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없고, 마음이 거기에 가 있지 않고 이 땅에 온통 다 가 있는 자는 이 땅에 내 보물을 쌓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평생 양복 한 번 입어 보지 않고, 구두 한번 신어 보지 않고, 외식 한번 해 보지 않고, 온갖 잡일을 다 해서 억척 같이 돈을 모아 땅을 삽니다. 계속 억척 같이 돈을 모아 또 땅을 삽니다. 옷도 늘 거지처럼 입고 다닙니다. 남을 위해서 밥 한 끼 사는 일이 없습니다. 계속 돈을 모아 땅만 사 모읍니다. 그러다가 보니 땅이 많아 땅 부자이기는 한데, 늘 가난하게 삽니다. 세금 낼 돈도 없고, 공과금 낼 돈도 없을 때가 더 많습니다.
자녀가 5남매가 있었는데, 고등학교까지만 공부시키고 더 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비싼 등록금내서 대학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돈을 벌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5남매가 변변한 직장 하나 없이 이 직장, 저 직장 이 일, 저 일 하면서 안정적이지를 못합니다. 5남매 마음 속에는 아버지만 죽기를 바랍니다. 아버지가 죽으면 그 부동산을 다 차지하겠다는 마음만 가지고 삽니다.
이 할아버지는 억척 같이 온갖 일을 해서 억척 같이 돈을 모아 땅만 싸놓았기 때문에 현금이 없어서 늘 가난합니다. 밥을 먹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시내 버스비가 없어서 걸어 다닐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암이 들었습니다. 병원에서 수술해야 한다고 하니 수술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듭니다. 그 수술비용 아까워서 수술도 못했습니다.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죽고 난 후 그 자식 5남매는 아버지의 부동산을 놓고 머리 뜯고 싸웁니다. 서로 더 많이 차지할려고, 다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 재산은 순식간에 다 사라졌습니다. 다 허랑방탕하게 써버렸습니다. 이것은 내가 만든 이야기가 아니고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오래전에 신문에 났는 이야기입니다.
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산림청 공무원으로 계셨던 분인데, 평생을 산림청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강원도 어느 아주 위치 좋은 곳에 수 십만평의 산을 사서 잣나무를 심었습니다. 평생 돈을 모아 산을 또 사고, 산을 또 사고해서, 그 산에다가 평생을 바쳐 잣나무를 심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그리고 좋은 일 한번 해 보지 못하고, 오직 돈만 생기면, 산을 사서 잣나무를 심어 가꾸었습니다. 50년 동안 그 일만 했습니다. 그리고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그 아들이 아버지가 평생동안 투자한 그 잣나무 산을 한번도 가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단돈 일억에 팔아 버렸습니다. 지금은 그 산은 50억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땅이 랍니다.
여러분, 위의 이 두 분을 어떻게 평가하겠습니까? 잘 살았다고 보십니까?
문화부장관을 하셨던 이어령 교수님의 따님인 이민아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이민아 목사님은 미국의 명문대학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미국의 검사로, 변호사로 활동하던 분입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님을 만난 후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이민아 목사님은 2012년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 느헤미야코리아 다음학교를 위해서 헌신했습니다. 이민아 목사님이 쓴 간증집 “땅끝의 아이들” 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는데, 이 학교에 “민아의 방”이라는 도서관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전 재산을 투자해서 탈북 청소년, 오갈 때 없는 아이들, 즉 땅 끝에 있는 아이들을 위해 투자했습니다.
여러분, 어느 삶이 아름다운 삶입니까?
여러분, 무엇이 하늘의 보물이고, 무엇이 땅의 보물입니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8절에서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 보물을 어디에 쌓고 있습니까? 하늘에 쌓고 있습니까? 땅에 쌓고 있습니까? 이것은 내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21절) 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우리는 내 마음이 어디에 가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내 마음이 가 있는 곳에 내 보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특히 사도바울은 서신서에서 “육신” 이라는 말과 “세상” 이라는 말을 동격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마음을 두고 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삶은 세상에 마음이 빼앗긴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고 하십니다. 이것은 꼭 돈과 관련해서만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보물”이라고 했지, “돈을 쌓아 두지 말라” 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보물”은 포괄적인 용어입니다. 이 말은 돈도 포함되고, 그러나 돈만 아닙니다. 이 말은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우리의 소유물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소유물에 대한 태도에 더 관심을 가지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가 자기의 부(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에 대한 그의 태도가 어떠한가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부를 소유하는 것이나, 부(富) 그 자체에는 나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매우 나쁜 것은 부에 대한 잘못된 태도, 부에 대한 그의 잘못된 관계입니다.
부(富)에 마음이 다 빼앗겨 있고, 부(富)가 없으면 살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내 생명처럼 생각하고, 부(富)에 모든 마음이 다 빼앗겨 있습니다. 모든 만족을 이 세상에서만 찾으며, 부(富)의 소유에만 만족을 찾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땅에 보물을 쌓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돈이 아니더라도 보물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어떤 모양, 어떤 형태로든지 보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보물입니다. 내 보물이라고 생각하고 소중히 여기는 거기에 내 마음이 온통 다 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보물은 무엇입니까? 그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거기에 마음이 가 있습니다. 그것이 하늘에 속한 것이냐? 땅에 속한 것이냐?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을 위해 지금 열심히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땅에 속한 보물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눈 앞에서, 하나님 쪽으로, 우리의 영원한 소망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이 세상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 세상을 통과하여 하나님 나라 속으로 들어간 후에 우리가 지나 온 뒤안길을 돌아보면서 후회하고, 한탄하는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살았던 믿음의 영웅들의 이야기입니다. 저 믿음의 영웅들은 오직 한 가지 목적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행하였습니다. 그들은 “땅에서는 이방인과 나그네로” 일컬어졌으며, 그들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시는 터전이 있는 성”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내실 때 그는 즉각 응답했습니다.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기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땅, 가나안으로 떠나 갈 수 있었는 것은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것”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애굽 궁전에서 앞날이 밝은 모세를 불러, 그에게 그 모든 것을 버리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을 치는 자가 되게 하시고 때가 되었을 때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는 지도자,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이것을 순종했습니다. 왜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보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는 항상 이 큰 원리 위에서 시작해야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내가 노력하고, 내가 소유하는 모든 것은 다 내 것인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영구적으로 내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내 것인 줄 알고, 이 땅에 내 보물을 쌓아도 결국 내 것이 안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다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은 꼭 돈 많은 부자들, 이 세상의 보물을 많이 가진 자들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나하고는 관계없어, 나는 가진 것이 없고, 집 한 칸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자 이기 때문에 나한테는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가 자기의 육신을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자기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자기의 이익만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오직 자기의 영광을 만들고 모든 영광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기 위해서, 자기가 조명을 받으려는 이기심, 자기의 자존심이 꾸기면 용납할 수 없고, 자기의 만족만을 위해 사는 인생들은 모두가 땅에 보물을 쌓는 자들입니다.
그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양보한 자리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자기 몸뚱아리 하나를 위해, 내 몸의 만족을 위해, 내 이 몸뚱아리 하나를 주님을 위해 드리지 못하는 자들이 다 보물을 땅에 심는 자들입니다. 내 마음 전체가 이 세상에 다 가 있다면, 내 보물을 이 세상에 쌓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늘에 내 보물을 쌓을 수 있습니까?
첫째는 주일성수입니다.
모든 시간 중에 거룩하게 뽑은 이 주일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첫출발입니다. 세상일에 바빠서 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한다면 지금 땅에 보물을 쌓고 있습니다.
둘째는 예배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예배는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의 제물이 되는 것이요,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요, 내 마음이 하나님께 있다는 표시요, 하나님과 관계를 이어가고자 하는 갈망이기에 하나님을 사모하는 표시요, 내 마음이 하나님 나라에 있다는 표시입니다.
셋째는 십일조와 다른 헌금들입니다.
헌금이 없는 헌신은 형식적입니다. 내가 아무리 몸과 마음으로 헌신하지만, 헌금이 없는 헌신은 그만큼 책임감이 적고, 내 마음이 거기에 가 있지 않습니다. 특히 오늘날 같이 돈을 자기 생명처럼, 자기 핏방울처럼 여기는 이 시대에 헌금 없는 헌신은 겉치레 헌신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넷째는 섬김입니다.
섬김은 희생입니다. 자기 몸을 희생하여 수고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사회를 향한 기부도 해당됩니다. 내 은사를 기부하고, 내 능력을 기부하는 것입니다. 돈이 있는 자는 돈을 기부하고, 돈이 없는 자는 내 재능을 기부하는 것입니다. 내 기술을 기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희생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섬김은 낮은 자세입니다. 섬김으로 이 땅에서 보상 받겠다는 섬김은 교만이지 섬김이 아닙니다. 섬김은 하늘에 심는 것이기에 이 땅에서는 보상이 없는 것입니다.
위의 모든 것들은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내가 누구냐?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냐? 내가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느냐? 내가 지금 어느 길로 가고 있느냐? 나는 어떤 존재이냐? 무엇을 하면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가? 자기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내가 살아가는 방향이 달라지고, 모습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도 내가 선택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나를 이 세상에 가져 온 게 아닙니다. 그리고 내가 가는 것도 선택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갈지도 모릅니다.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기 전에, 이 세상을 통과하고 있을 때, 하늘에 내 마음을 쏟고, 하늘에 보물을 쌓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