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원고/산상복음

41.[산상복음41]인간 존재의 가치

☆ 주님의 머슴 2021. 4. 26. 17:17

주일설교(2016/5/22) - 산상복음(41)

인간 존재의 가치

마태복음6:25-30

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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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성경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기독교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사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사람이 제일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사람에게 맞춥니다. 사람이 중심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해결 안 되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사람 때문에 일어나는데, 사람으로부터 시작하니까 문제가 해결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문제, 나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께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비뚤어져 있으면 다 비뚤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잡아 놓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이라는 것을 배우는데, 조직신학의 제일 먼저가 신론, 즉 하나님에 대해서 먼저 배웁니다. 그 다음이 그리스도론 예수님에 대해서 배웁니다. 그 다음이 인간론입니다. 그리고 성령론, 그 다음이 교회론, 그 다음이 종말론, 이런 순서로 배웁니다. 제일먼저 하나님부터 시작합니다. 세상은 나 중심이지만, 기독교는 하나님부터입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풀려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며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은 여기서부터 출발합니다. 인간은 자기를 먼저 생각하고, 자기로부터 시작합니다. ‘목숨을 위하여, 몸을 위하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시작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것은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33)고 하십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나 자기에게 집착해 있습니다. 조금만 자존심이 상하면 못 견딥니다. 조금만 자기 마음에 맞지 않으면 못 견디고, 화를 내고, 분풀이를 합니다. 너무나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에게 맞추려고 합니다. 모두가 자기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다 여기에 초점을 맞춥니다. 여기에 초점을 맞추면 맞출수록 더 문제는 해결이 안 되고, 점점더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염려할 일이 더 많이 생기고, 더 문제가 꼬이고, 더 문제 속으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빨리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라. 빨리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로부터 시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내가 누구냐?”하는 것입니다. 나의 존재가치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자기가 누군지를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하나님을 알면 자기를 압니다. 하나님이 보이면 자기가 보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나는 하나님이 만드셨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라는 것을 압니다.

 

오늘날은 우울증 환자가 많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대부분 우울증 증세가 다 있다고 합니다. 우울증은 자기를 잃어버렸을 때, 자기 존재가치를 잃어버렸을 때 옵니다.

 

여러분,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자기를 못 찾는 것입니다. 자기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것은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도 인간가치를 회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가치를 상실하고, 인간 존엄성을 잃어버린 것은 물질에 빠져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만 관심을 가지고, 여기에 빠져 땅에 것에 염려하며 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에 의해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신 분이 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의 삶 속으로 들어오셨습니까? 이 우주의 자연을 살리기 위해서입니까? 이 우주의 가축과 짐승을 살리기 위해서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오직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우리 인간의 생명, 마귀에게 빠져 죄악에 매여 있고, 세상에 매여 있고, 사람에게 매여 사는 인간, 염려와 근심에 매여 살고, 먹는 문제, 마시는 문제 같은 물질에 매여 사는 인간에게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 우주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 되는 말씀이 26절의 마지막에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입니다. 그리고 30절의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입니다. 그 만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가치를 깨닫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첫째는 우리 주님은 우리의 존재가치를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서 공중의 새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을 예를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생존하고 존속할 수 있고, 생명을 유지하는 문제는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는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 중에도 가장 작고 약한 새를 말합니다. 성경 다른 곳에서는 참새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10:31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누가복음12:7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이 참새와 같은 말입니다.

들풀도 식물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식물입니다. 아궁이의 불쏘시개 정도로 사용하는 들풀입니다. 이것들도 하나님이 먹이시고, 키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를 다스리시면서 두 가지의 섭리로 다스리십니다.

하나는 일반섭리입니다. 하나님이 비를 내리시고, 햇빛을 비추시고, 새들이 먹이를 구하고, 식물들이 자라고, 우주의 모든 피조물들이 골고루 해택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은 일반섭리입니다. 또는 일반 은혜라고도 합니다.

마태복음 545절에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사도행전1417절에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일반섭리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만물의 조물주시오, 창조주시며, 보존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뿐 아니라 온 세상을 일반적 섭리로 배려하시고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26절에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특별섭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짐승과 공중의 새와 들풀에게는 하나님이 아버지가 아니십니다. 단지 창조주 일뿐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일반적인 섭리로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이렇게 다스리신다면, 하물며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들에게는 얼마나 더 하시겠느냐는 것이다.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택한 우리들에게는 특별섭리로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택한 성도들을 특별섭리로 다스리십니다. 특별한 은혜가 주어집니다.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시면서까지 택하시고, 구원하시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하신 그 자체가 벌써 특별섭리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가치, 특별히 성도의 가치, 성도의 존재의 가치가 어디서 드러납니까? 예수님의 마굿간의 탄생과 십자가에서 입니다. 예수님이 왕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마굿간 구유에 뉘어졌다는 것입니다. 마굿간에 오셨다는 것은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의 존재 가치, 택함 받은 하나님의 사람의 존엄성, 존재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세상은 인간의 존엄성, 인간존재의 가치가 왕궁에 있을 때, 높은 자리에 있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성공하고, 출세하고, 크게 되었을 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으려고 하고, 자기의 영광을 확대시키려고 하고, 높아지려고 하고, 성공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거기에 인간의 존엄성이 있고, 인간존재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존재의 가치가 높아질 때가 언제냐? 예수님이 마굿간에 오셨을 때이고,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실 때입니다. 낮아짐, 겸손, 희생, 사랑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가치가 생기고, 존엄성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굿간에 오심, 예수님의 갈보리 십자가가 인간 존재의 가치를 높인 것입니다. 인간이 왜 귀합니까?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떠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시하고 부인하면, 인간은 존재 가치가 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낮아지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마귀가 가야할 무덤에까지 내려가시고, 지옥까지 내려가셨다가 다시 회복하시고, 부활, 승천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존귀해지고 인간 존재의 가치가 회복한 것입니다.

 

원래 인간이 태초에 지음 받을 때에는 존재의 가치의 순위가 삼위일체 하나님 다음이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제일 위고, 그 다음이 아담(인간)이고, 그 다음이 천사고, 그 다음이 자연 만물이고, 그 다음이 타락한 천사, 사탄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고, 사탄에게 속은 후에, 인간은 자연만물보다도 못하고, 사탄 보다도 못한 가장 천한, 전적 타락한 인생, 제일 밑바닥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대신 낮아지시고, 우리의 존재 가치를 바꾸치기 해 주셨기 때문에,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회복된 자들은 다시 존재 가치가 삼위일체 하나님 다음으로 다시 회복되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예수 떠나고, 예수 무시하고, 예수님 십자가를 무시하면 존재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자연만물보다도 못하고, 마귀보다도 못한 존재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둘째는, 인간에게 무익함이 뭡니까? 인간의 기초가 무너지는 것이 뭡니까? 키를 키우는 것입니다.

27절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라고 하십니다. 키가 길이를 말합니다. 또는 높이를 말합니다. 키를 키운다는 말은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육신의 키를 키우는 것을 말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키가 작은 것에 대한 고민이 많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키를 키우기를 원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외모지상주의시대에는 더 말할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외모, 겉모양, 겉치레, 겉모양의 화려함에 매여 사는 인생을 말합니다. 모든 것을 외모에, 겉치레에, 눈에 보이는 현실에 매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는 생명의 길이를 말합니다. 생명을 연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육신의 건강만을 추구하며, 이 세상에서 오래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영은 죽어 가고, 마음은 악해가고, 화인 맞은 양심, 죽은 양심으로 살면서 육신의 건강만을 위해서, 음탕하고, 정욕적인 삶을 추구하기 위해 육신의 강건함을 추구하며, 이것에 모든 관심과 초점을 맞추어 사는 것을 말합니다.

장수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 영육의 건강을 동시에 가지면서, 주님께 감사 하며 영광을 드러내는 삶은 장수해도 복된 장수요, 영광스러운 장수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정욕을 채우고, 주님 없는 삶, 자기의 만족만을 위한 장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죄악된 장수의 삶은 비극적 삶입니다. 죄악된 삶입니다. 오래 산다고 다 좋은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난 생명연장은 즐거움이 아니고, 행복이 아닙니다. 더 강퍅해지고, 더 이기적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기심을 가진 생명연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남을 밟고 한 단계라도 더 올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명예를 추구하고,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만을 키우는 것, 명예를 키우는 것, 영광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겨 집중시켜 모든 시선을, 관심을 자기에게로 끌어 모우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키를 한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할 때, 한 자는 18인치 정도를 말합니다. 45cm 조금 넘습니다. 사람은 염려한다고, 사람은 자기의 힘으로, 능력으로 키를 한 자를 더 연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면 존재가치가 없어집니다. 포도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지면, 이미 죽은 것과 같습니다. 존재가치가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면 죽은 인생입니다.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30) 들의 들풀은 잠간 있다가 지나가 버립니다. 옛날에는 들풀을 베어다가 아궁이를 지피고, 밥을 해 먹었습니다. 저도 시골에서 산에 가서 나무도 자르고, 풀도 베고, 갈쿠리로 나뭇잎도 끌어 모으고, 낫으로 풀을 베어서 땔감을 했습니다.

 

들풀은 잠간 있다가 지나갑니다. 이스라엘에는 사람들이 들풀을 베어다가 말려서 연료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빵을 구울 때 말린 풀을 아궁이에 넣고 불을 지폈습니다. 그런 다음 그것을 헤쳐서 반죽을 만들어 넣었습니다. 그러면 맛있는 빵이 구워져 나왔습니다. 이렇게 들풀들은 잠시 있다가 가버립니다.

 

그러나 성도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불멸입니다. 영원한 존재입니다. 지금은 시간 속에 있는 시간의 영향을 받는 존재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영원에 소속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는 오늘 여기에 있다가 내일이면 없어져 버리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심령 속에 영혼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사람은 잠시 이 땅에 살다가 죽어 없어져 버리는 존재가 아닙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지니라는 말은 우리의 육신을 향하여 한 말씀이지, 영혼에 대하여 한 말씀이 아닙니다. 성도는 주님의 존전에서 영생합니다. 우리가 신앙고백할 때마다 사도신경 제일 마지막에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와 같은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와 같이 작정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껴야 합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6)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