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산상복음49]좁은 문
주일설교(2016/7/17)-산상복음(49)
좁은 문
마태7:13-14
448, 5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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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베들레헴에는 예수님이 마굿간에서 탄생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마굿간이 있던 그 곳에 “예수탄생기념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 “예수탄생기념교회”에는 특이하게 출입구가 하나 있는데, 출입구가 아주 작습니다. ‘좁은 문’ 또는 ‘겸손의 문’ 이라고도 한답니다. 높이가 1.2m 정도인데, 누구든지 허리를 숙이고,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들어갈 수 있게 해 놓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좁은 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좁은 문이 어떤 문인지에 대해서도 설명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요, 문이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도 적다라고 하십니다.
본문의 말씀은 기독교가 무엇인지, 기독교적인 삶이 어떤 삶인지를 깨닫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의 성격, 기독적인 삶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기독교의 삶의 특색이 “협착함”입니다. 이 말은 기독교는 폭이 좁고 한정된 삶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고,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다 하면서 사는 삶이 기독교의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가 중심이고, 자기 뜻대로 살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지만, 기독교인의 삶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폭이 좁고, 한정된 삶입니다. 그래서 “좁은 문, 좁은 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극적인 표현으로 기독교인의 삶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길을 따라 걸어가다가 문득 두 개의 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왼 쪽은 매우 넓고 광대한 문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 큰 무리가 그 문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른 쪽에는 한 사람씩만 겨우 들어 갈 수 있는 매우 좁은 문이 있습니다. 넓은 문을 통해서 들어가면 계속 넓은 길로 연결되기 때문에 수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따라 파도처럼 밀려가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나 오른쪽 문은 처음에만 좁은 것이 아니라 그 문을 들어서면 길도 계속 좁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걷는 사람도 별로 없어 보입니다.
예수님은 이 장면을 선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두 문 앞에서 직접 이 두 문의 상황을 보면서, 오른 쪽의 좁은 문을 선택했고, 이 좁은 문을 들어서서, 이 문에 연결된 좁은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이 두 문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오른쪽 좁은 문을 선택하면서, 이 문이 멋 있어 보이고, 고상해 보이고,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으니 특별해 보이고, 이 길은 뭔가 거룩해 보이고, 한적하고 조용해서 좋은 것 같고, 때 묻지 않고, 성결해서 이 길을 선택해서 걸어갑니다. 그런데 힘이 듭니다. 재미가 없습니다. 친구도 별로 없습니다. ‘내가 잘못 선택했나? 사람들이 많이 가던 저 쪽 길로 가야되는 것 아닌가? 이 길이 맞긴 맞나?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계속 가지니 힘들고,,,’ 이러면서 갈등을 하면서 힘들게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좁은 문으로 들어 온 그 오묘함, 좁은 길을 걷고 있는 그 조용함과 신비로움, 예수님이 앞서 길을 인도하고 있으며, 여러 믿음의 선진들이 앞서 들어간 그 길을 걷고 있다는 그 짜릿한 즐거움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운전을 해서 도로를 달려 보면, 옛 날에 아주 좁았던 그 길이 넓은 4차선, 6차선 도로로 확장해서 시원스럽게 길이 뚫렸습니다. 온 통 산을 깎고, 자연을 파괴해서 길을 넓혀서 아름답고, 신비롭고, 운치있는 모습은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저 시원스럽게 빨리 갈 수 있고, 편안하다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길은 꼬불꼬불하고, 굽이굽이 돌고,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길 옆에는 굽이굽이 강이 흐르고, 좌우에는 높은 산이 스쳐 지나가고,,,, 이런 길은 힘들지만, 또 가고 싶고, 아름다움과 마음의 즐거움을 줍니다.
오늘 예수님은 “내가 기대하고 싶은 것은 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저 좁은 길로 걸으라. 그러면 그 길로 내가 앞서 가면서 너희를 도울 것이다. 내가 이 땅에 와서 세우고자 하는 나의 왕국은 이 좁은 문을 들어서서, 이 좁은 길로 걸어야 내가 세운 나의 왕국으로 들어 갈 수가 있다. 힘들고 어려워도 이 좁은 문을 통과해서 이 좁은 길로 끝까지 걸어가라. 그러면 내가 세운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오늘 주신 말씀을 중심으로 기독교의 특징, 기독교인의 삶의 특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삶은 시작부터 좁고 협착한 삶입니다.
길이 갑자기 좁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제법 넓다가 계속 가면서 점점 좁아지는 삶이 아닙니다. 이 문 자체부터, 이 삶에 들어가는 입구부터 좁은 길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 성도들은 예수 믿는 순간부터 길이 넓어지고, 일이 잘 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예수 믿으며 교회 다니니 만사가 형통하고 길이 활짝 열리고 만복이 내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대로 할 것 같으면, 그게 아니고, 처음부터 좁은 문, 좁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 믿는 순간부터 사업이 잘 되고, 돈도 그냥 굴러 들어오고, 아들 못 낳는 사람 아들 낳고, 공부 못하는 자식 공부도 잘하게 되고, 만사가 그냥 바로 형통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난도 심하고, 어려움도 더 많고, 시험꺼리도 더 많다는 것입니다. 글자 그대로 좁은 문이요, 좁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자체가 좁은 입구, 좁은 문으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길로 가려고 하는 자들이 많지 않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 문으로 들어가려면 우리에게 있는 이 세상의 것들을 다 가지고 들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남겨두고 들어가야 합니다. 이 세상 것들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까닭은 문이 좁고 길이 협착하기 때문입니다. 즉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은 한 번에 한 사람씩만 겨우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이 문은 너무 좁기 때문에 무거움 짐이나, 세상의 어떤 것도 가지고 들어갈 수 가 없습니다. 오직 빈 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 내가 세상에서 좋아하던 모든 것을 이 문 앞에서는 다 내려놓고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이 문으로 들어가려면 내려 놓아야 하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첫 번째가 세속적(世俗的)인 것입니다. 천국 가는 길에 걸림돌이 되는 것, 세상적인 문화, 세상지식, 세상의 많은 친구, 세상의 직위, 세상의 성공, 모든 세상의 삶을 내려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다 가지고는 이 문으로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또 설령 이 문으로 들어갔다 하더라도, 계속 이어지는 좁은 길로 짐을 가지고는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넓은 문과 넓은 길로는 많은 짐을 가지고 가기가 쉽고 편하지만, 좁은 길은 많은 짐을 지고, 많은 물건을 가지고 가기가 너무너무 힘듭니다. 옛날 보부상들이 많은 짐을 둘러메고 산 길, 언덕 길, 골짝 절벽 길을 걸어가다 보면 실족하여 절벽에 떨어져 죽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시골에서 겨울에는 산에 가서 뗄 나무를 많이 했습니다. 지게에 뗄 나무를 해서 짊어지고 좁은 산 길을 내려 오다가 미끄러져서 넘어지기도 하고, 나무를 한 짐 해서 좁은 산 길을 내려 오는 것이 너무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세속적인 많은 짐을 가지고 좁은 문, 좁은 길로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세상에서 살아오면서 몸에 밴 관습, 습관, 전통입니다.
나의 습관, 나의 버릇을 버려야 합니다. 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뭡니까? 환경이 바뀌어도 몸에 밴 습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힘든 것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해 주시던 음식, 입맛을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틀에 박힌 듯이 닮아가는 오래된 습관, 버릇, 풍습,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성도가 좁은 문, 좁은 길로 들어가려면, 이런 세상으로부터 가지고 있던 옛 습관, 풍습, 관습, 옛 버릇, 심지어 입맛까지도 버려야 되기도 합니다. 나를 기쁘게 했던 술, 담배, 친구, 세상의 대중적인 문화와 놀이를 다 문 밖에 남겨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 지워있는 그 더러운 죄 짐을, 하나 없이 벗어 놓고 힘써 들어갑시다. 구원으로 인도하는 그 좁은 문 들어가, 영생으로 인도하는 그 생명 길 갑시다.”♬
세 번째는 더 중요한 것입니다. 나의 ‘자아’를 바깥에 남겨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다가 우리가 가장 잘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 즉 실족(失足)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자아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이 길을 가면서도 이 자아 때문에 시험 들고, 잘 실족합니다. 기독교는 이 문으로 들어오는 것이 기독교의 시작입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이 문으로 들어와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으로 들어서기 전에 나의 자아를 내려 놓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아는 옛 아담 때부터 타락한 성품입니다. 인간의 자아는 에덴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을 때부터 생긴 불순종의 씨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아는 인간 타락의 성품인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22절에서 사도바울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성도들이 이 문으로 들어 올 때, “옛 사람”을 남겨 두지 않고 짊어지고 들어왔기 때문에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 옛 사람 때문에 신앙생활이 어려운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세상과 같은 생각, 같은 삶을 살고 싶은 것입니다. “넓은 길로 갈 껄” 하면서 계속 갈등의 연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을 뒤에 두고 떠나야 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자아와 교만을 부끄러워합니다. 산상복음은 처음부터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치고 심령이 가나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천성으로 이것과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모두 교만한 성품으로 태어났고, 세상은 출생시부터 우리의 교만을 북돋우기 위해 할 짓을 다 합니다. 가난한 심령은 교만을 부끄러워합니다. 가난한 심령은 좁은 문 앞에 서면 자연히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립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좁은 문입니다. 이 좁은 문 앞에 서면 큰 글씨로 “여러분 자신을 밖에 남겨 두시오” 라고 벽보가 붙어 있습니다. 가난한 심령은 이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문 밖에 벗어 던지고 그 문으로 들어 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좁은 길을 가는 동안 멸시와 천대와 환란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란 받는 자, 멸시 받는 자, 어려움 당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손을 잡아 주고, 함께 이 좁은 길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지니라.” 하시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인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기독교의 문은 좁습니다. 기독교의 시작은 좁은 문입니다. 그 문을 들어가도 계속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에 들어가기 전에 이전에 것들은 다 내려 놓아야 합니다. 세속적인 모든 것은 내려놓고, 관습과 옛 습관과 옛 버릇과 세상에서 몸에 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의 자아를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좁은 문과 이 좁은 길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큰 두 번째로, 이 문은 좁고, 이 길이 협착하다는 것은 기독교인의 삶은 어렵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어렵습니다. 이 세상은 한 가지만 이라도 열심히 잘해야 성공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삶은 두 가지를 잘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삶도 잘해야 하고, 교회 생활, 신앙생활도 잘해야 합니다. 한 가지만 잘 하기도 어려운데, 우리 기독교인은 두 가지를 다 잘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길이 아닙니다. 이 길 마지막에는 너무나 화려하고, 영광스럽고, 축복의 전당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화려하고 영광스럽고 놀라울 정도로 쉬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좁은 문을 들어서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숭고한 길이요, 거룩한 길이요, 영광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감사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안이한 것만을 원하고, 어려운 것을 피하는 사람은 이 길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문으로 들어오기 전에 옆에 있던 넓은 길,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던 그 길이 생각나고 그리워서 늘 그 길을 생각하느라, 이 길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이 문이 좁고 이 길이 협착하다는 것은 이 길에는 항상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참되게 예수 믿고, 참되게 살면 반드시 박해가 따르는 것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니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5:11-12)
역사 이래 세상은 항상 기독교인을 박해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어디를 가든지 배척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가는 곳마다 배척을 받고,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3:12) 고 했습니다.
하지만, 박해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가혹하게 비판을 받거나 취급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좋게 평가 받고 싶고, 미움 받고 비판 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이 길을 들어서면 우리가 미움 받고, 비판 받게 됩니다.
여러분, 이 길은 협착하고 좁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을 들어서면 고난과 박해가 있음을 알아야 하고, 각오해야 합니다. 그것도 나를 잘 알고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오해를 받고, 미움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4-36)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에게 복음이 들어오면 가장 가까운 식구들이 나를 미워하고 박해한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참 정직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좁은 문은 가족단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개인별로 들어가기 때문에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분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어 이 문을 들어설 때, 한 가족이 마음이 하나 되어 이 문으로 들어가자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분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식구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자고 할 것이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가 싫다고 할 것이고, ‘세상의 많은 사람이 저 넓은 길로 들어가는데, 왜 너는 하필이면 이 좁은 문, 좁은 길로 들어가고자 하느냐’ 하면서 어리석다고 하면서 식구들 끼리 분열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과 아버지가,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딸과 어머니가 불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가족이 이 넓은 문, 좁은 문 때문에 의견 충돌이 일어나고, 분열이 일어나고, 예수 믿는데 가장 어렵게 하는 박해자가 집안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좁은 문, 넓은 문 앞에서는 갈라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면 멸망의 길이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생명의 길로 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끝까지 양보할 수 없고, 타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 때문에 남편과 아내가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아들과 아버지가 갈라서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는 것입니다. 혹 육적으로는 갈라설 수 없어서 같이 살지만, 영적으로는 갈라서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정직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숨기지 않습니다. 그대로 진리를 드러내고, 그대로 오픈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넓은 문을 통해 넓은 길로 갈 것인가? 좁은 문을 통해 좁은 길로 갈 것인가? 결정해야 되고, 결정해서 각자가 넓은 문, 좁은 문으로 들어 섰다면 이제부터는 영원히 멸망과 생명의 길로,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기독교인의 삶은 시작부터 좁습니다. 그러나 시작에만 좁은 것이 아니고, 계속 좁은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좁은 문을 선택해서 좁은 문으로 들어서면, 이제부터 넓은 길로 열리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좁은 길인 것입니다. 문만 좁은 것이 아니고 길도 좁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시작부터 끝까지 좁습니다. 이 삶의 길은 끝까지 “믿음의 싸움”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처음에는 어려워지다가 나중에 가서는 쉬워진다가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 가르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계속 어렵습니다. 항상 오솔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 않기 때문에 고독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합니다. 아무도 안 알아 줍니다. 오히려 어리석게 봅니다. 기독교인의 삶의 길에는 넓은 길이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설교하면서 기독교인은 처음에는 힘들지만 나중에는 계속해서 서서히 넓어지고, 평탄해 진다고 설교한다면 잘못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거짓선지자인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시작부터 끝까지 좁은 길입니다. 성도가 가는 길은 좁은 길인데다가 좌우에 원수가 많습니다. 들짐승이 많습니다. 신앙을 포기하고 넘어지게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보십시오. 바르게 예수 믿고, 바르게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평안하게 살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걸어갔습니다. 그래서 믿음생활은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과 인내는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낙심이 됩니까? 한 숨이 나옵니까?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신앙생활하지 걱정이 됩니까? ‘그럼 이제라도 돌아서서 신앙을 포기하고 넓은 길로 갈까?’ 이런 생각이 듭니까?
그러나 우리가 가는 이 길 끝에는 영광스러운 길이 기다립니다. 성경은 여기에 대해 상세히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길 끝에는 영광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옛날 나폴레옹이 그 추운 겨울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할 때, 군사들에게 ‘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로마로 진군하면, 최고의 술과 아름다운 여자와 황금이 기다리고 있다고 외쳤습니다. 거기에 힘을 얻어 군사들은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진군해 갔습니다. 그 당시의 유럽에서는 이탈리아 로마는 꿈의 나라였습니다. 그들은 오직 황금과 로마의 여자를 취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그 춥고 위험한 알프스를 넘는 것도 참아 냈습니다.
우리가 선택한 좁은 문, 좁은 길 끝에는 이런 로마의 영광에 비교할 수 없는 천국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것들은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은 저 멀리 끝에는 세상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하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영광을 사모하며 그 좁은 길을 걸어 간 것입니다.
여러분, 이 길은 좁은 길이기에 내 힘으로, 내 의지로는 갈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 길을 안내해 주시고 도와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믿음만 잃어버리지 않으면 우리 주님이 함께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