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예수를 만난 사람들
<마가복음 묵상(16)>
16.예수를 만난 사람들
막 3: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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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3:8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3:9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3:10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3: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3:12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이 세상은 만남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연의 역사가 그렇고, 인간의 역사가 또한 그렇다. 하늘과 땅이 만나고, 산과 강이 만나고, 초목과 기암괴석이 만나는데서 자연은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만남이 없이는 이루어지는 것이 무엇 하나 없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을 만남으로 과학이 창조되고, 인간이 미와 만남으로 예술이 창조되고, 인간이 인간을 만남으로 삶을 만들어 간다. 가정도 만남으로 만들어지고, 교육도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비극적인 만남도 있다. 인생을 망치는 만남도 있다. 사람을 잘못 만나 평생을 슬퍼하며 눈물로 인생을 보내는 자도 있다. 잘못된 만남은 한 개인의 일생도 좌우하지만, 한 나라의 역사도 바꾸어 놓는다. 우리나라는 조선 말기에 대한제국시절에 열강들이 들어왔고, 일본은 조선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웃는 얼굴로 들어와 결국 국권을 찬탈하고 36년 동안 압제하고 말았다. 일본과의 잘못된 만남은 나라를 빼앗기고, 핍절한 삶을 살게 하고, 식민지 정책의 수모를 가져 왔다. 더 나아가 남북이 나누어지는 고통을 겪고, 전쟁의 참사로 연결되었다. 지금도 분단의 아픔 속에 살아간다.
1986년 4월 26일 소련의 우크라이나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했다. 수십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어 갔다. 지금도 그 영향으로 2세들이 병으로 고생하거나 죽어간다. 이후 100년 동안은 사람이 살 수 없을 것이라고 본다. 알지 못하고 복구 작업에 투입되었던 사람들은 지금 거의 다 죽었고, 2세들에게도 병세가 나타나 고생하고 하고 있다. 그 당시 멀리서 구경했던 사람들도 서서히 병이 나타났다. 심지어 사고 지점으로부터 180km 떨어져 살았던 사람들도 서서히 병세가 나타났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공산주의를 잘못 만났다. 소련을 잘못 만났다.
북한 주민들도 공산주의를 잘못 만났다. 정부를 잘못 만났다. 김일성을 잘못 만났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잘못 만났음을 확연히 드러났다. 똑같이 정부를 세웠는데, 70년이 넘는 동안 남한은 경제대국 세계 12위에 오르고,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빈국이 되었다. 똑같은 민족이요, 똑같은 강산이요,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인데, 어떻게 이렇게 차이가 날까? 그들이 IQ가 나쁜 것도 아니고, 교육수준이 낮은 것도 아니고, 그들이 미개인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굶주리는 나라가 되었을까? 공산주의를 잘못 만난 것이다. 지도자를 잘못 만난 것이다. 잘못된 이념을 만난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잘 만나면 인생이 바뀐다. 부부가 잘 만나고, 친구를 잘 만나고, 스승을 잘 만나고, 등등,
잘 만나서 인생이 바뀐 자가 많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 만난 것이 최고의 만남이다. 예수 만나서 인생이 바뀐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오늘 읽은 본문을 보자.
사람들에게 미친 예수님의 영향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불과 몇 달 안에 온 민족이 약속된 메시야, 나사렛 예수라 불리는 청년을 따르려고 일어났다. 또 예수님을 바로 만난 자들은 모두가 변화되고 바뀌었다.
7절에 보면, “큰 무리가 따르며....” 했다.
8절에도 보면,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했다.
이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기 때문에 회당에서는 가르칠 수가 없었다. 바닷가로 나가 해변에서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께로 몰려 온 사람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다.
1)갈릴리 전 지역으로부터 왔다(7절). 갈릴리 전 지역은 1,5000명 이상의 인구를 지닌 200개의 이상의 도시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지역으로부터 예수님께로 몰려왔다.
2)유대와 예루살렘으로부터 왔다(8절). 그것은 거리가 160km나 되는 먼 거리를 걸어서 왔다.
3)아리비아 사막이 인접해 있는 훨씬 남쪽 지역인 ‘이두매’로부터도 왔다. 이두매는 야곱의 형인 에서의 후손들이 사는 땅이다.
4)요단강 동쪽 편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왔다.
5)북쪽의 페니키아의 영토인 두로와 시돈으로부터도 왔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유대나라 전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웃나라의 사람들까지도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왔다.
진리가 확실하고 우리의 인생을 맡겨도 되고 그런 분을 만나기 위해서는 아무리 멀어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중국에는 기독교인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코로나19 사태로 약간 주춤하기도 했다고 하지만,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당국과 공산당들의 교묘한 방법으로 박해를 하고 방해공작을 하고 있단다. 농촌으로 갈수록, 산골로 갈수록 더욱 교회에 대해 박해가 심하고 노골적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예배 한번 드리기 위해서 몇 시간을 걸어서 교회로 간다고 한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을 만나려는 노력과 열심이 필요하다. 그러면 우리도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까?
1. 말씀을 들어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말씀이 들려져야 한다. 말씀이 들려지지 않는 자들이 많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들을 줄 모르는 자가 많다. 교회에 와서 앉아 있다고 말씀을 다 듣는 게 아니다. 들려지지 않는 자들이 많다. 재미있는 교양적인 이야기나, 웃기는 이야기나, 감동적인 간증 정도는 들려지겠지만, 실질적인 성경의 진리, 우리의 신앙을 성숙시키는 말씀은 듣기 싫어하고, 들려오지를 않는다. 이것은 진리의 말씀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대만의 한 청년은 연모하는 처녀에게 2년 동안 700통의 연애편지를 썼다고 한다. 그는 러브레터 역사상 세계기록을 세웠다. 그런데 연애편지를 700통이나 받은 처녀는 그 편지를 전달한 우편배달부와 결혼했다고 한다. 역시 편지보다 날마다 만나는 우편배달부 쪽이 실효가 더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하루도 빠짐없이 늘 가까이 하자. 성경도 말씀이다. 선포되는 말씀이 내 심령에 들려지려면, 기록된 말씀이 내 심령에 심어져 있어야 한다. 기록된 말씀과 선포되는 말씀이 조화롭게 내 심령에 심어져야 한다. 그래야 설교도 들려진다. 교회는 나오지 않고, 성경만 본다는 자들도 있다. 이 사람은 목사님들이 전하는 설교는 말씀이 아니라고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교회를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을 모른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라고 했는데, 이 진리를 모른다. 교회를 모르면 예수를 모른다. 예수 공동체에 속하지 않으면 예수의 몸에 붙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수와의 연합이 없다. 연합이 일어나지 않으면 진리를 모른다. 진정한 신앙은 예수와의 연합이 일어나야 한다. 예수와 연합은 기록된 말씀인 성경과 선포되는 설교와 몸으로 드리는 예배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5-7).
2.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8절).
소외된 자, 가난한 병자,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괴로워 하는 자들에게 너무나 놀랍고 귀하고 복된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소문을 듣고 놀라워하면서 감동으로 끝나면 안 된다. 감동하는 것으로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를 않는다. 결단이 필요하다. 즉시 일어나 주님께로 가자.
지금도 그 분에 대해서 소식을 듣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일어나 그 분께로 나오는 자들은 적다. 그 분만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절대적인 신뢰와 기대를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진실한 마음으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께 나아가자.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
너무나 수줍음을 잘 타서 여자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 번 못한 청년이 있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들의 이러한 성격이 몹시 걱정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말했다.
“저 오늘 밤 데이트가 있어요.”
그의 부모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너무나 기뻐서 돈을 듬뿍 주면서 말했다.
“그럼 재미있게 놀다 오너라. 애야!”
그러나 아들은 나간 지 30분도 채 안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은 깜짝 놀랐다.
“그렇게 빨리 끝났니? 도대체 여자애를 만나보기는 한 거니?”
“그럼요. 만났죠! 그러나 제가 담 뒤에 숨어 있어는 걸요! 내가 숨어 있지 않았다면 그 여자애도 저를 볼 수 있었을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혹시 자신이 없어서 담 뒤에 숨어서 바라보면서 만나기만을 원하는 자들이 아니가? 우리는 이리 저리 도피하면서, 숨어 있으면서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해 주셨으면 하고 생각만 하고 바라만 보는 자들이 아닌가? 신앙생활에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도전의식이 필요하다. 신앙생활, 말씀생활, 기도생활이 소극적인 것 보다 적극적인 것이 더 낫다. 주님을 더 적극적으로 만나기를 소원하자.
3. 주님을 만져야 한다. 주님을 느껴야 한다(10절).
10절에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고 했다. ἐπιπίπτειν(에피핍테인), 많은 사람들이 고침 받는 것을 보고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서로 예수님을 만지려고 몰려와서 예수님이 피곤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다른 성경 사본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서로 만지려고 소동을 벌렸다고 번역하고 있다.
내 손으로 직접 그를 만지고 체험해야 한다. 다른 말로 예수님을 느껴야 된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의 체험과 고백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것은 될 수 있지만, 나의 구원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성경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졌다(느꼈다). 예수님과 나와의 구체적인 접촉만이 죄로 인한 멸망의 길에서 구원 받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가 주님을 만지고, 주님을 느껴야 한다. 그래야 주님이 우리를 만져 주심을 느낀다. 주님이 만져 주시기만 하면 우리는 안식과 평안을 느낀다. 내 심령의 문제, 내 삶의 문제가 해결된다.
“♬그는 나를 만졌네. 내 영혼을 -, 나는 그를 느꼈네. 그 숨결을 -,
그는 나를 버리지 아니하고 -. 나는 그를 떠나지 아니하리 -
주의 사랑 있으면 나 외롭지 않아, 주의 사랑 안에서 나 두렵지 않네.
그는 나를 만졌네. 내 영혼을 -, 나는 그를 느꼈네. 그 숨결을 .../♬“
그렇다. 우리 예수님은 많은 무리를 긍휼히 여기셨다. 그 영혼들을 사랑하셨다. 버리지 않으시고, 물리치지 않으시고 다 받아 주시고, 말씀을 주시고, 만져 주셨다. 우리는 삶 속에서 주님을 만나자. 만남이 있어야 역사가 일어난다. 만나야 고침 받고, 변화가 일어나고, 역사가 일어난다.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에 구경꾼이 되지 말자. 특히 교회생활에 구경꾼이 되지 말자. 축구경기나 야구경기에 관중석에 구경꾼은 많아도 선수는 적다. 구경꾼은 마음에 안 들면 잘 한다 못 한다 야유를 퍼붓고, 비판만 할 뿐이다. 그리고 잠시 구경하고 그것으로 잊어버릴 뿐이다. 그러나 선수는 몸으로 체험하고 부딪치고, 연구하고, 고민하고, 열중한다. 신앙생활, 교회생활은 필드에서 뛰는 선수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의 감독이요, 코치이시다. 그 지시대로, 가르침대로 열심히 뛰자. 그러면 발전과 축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