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분
<마가복음 묵상(21)>
21.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분
막 4: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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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4: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 들도 함께 하더니
4: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 었더라
4: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 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4: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 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 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마태와 마가,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열두제자를 세우시고, 그 열두제자를 세우신 이유를 말씀하고 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10:1),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10:7-8)고 했다. 마가복에는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3:14-15). 누가복음에는 산에서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그 중에 열둘울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을 데리고 산을 내려오셔서 많은 무리들 앞에서 말씀도 전하시고 모든 병을 고치시고,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사람들을 고치셨다고 했다.(눅6:12-19). 이것은 열두제자를 데리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실제적인 교육을 시킴으로 제자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보여주신 것이리라.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택하신 목적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고 싶어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제자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고 싶어 하신 일을 이루는 자들이다. 본문도 앞으로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을 보여 주시는 사건이다. 앞으로 제자들 앞에 놓여 있는 폭풍이 수없이 많음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폭풍 앞에 두려워하지 말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4장은 비유 장으로, 예수님은 여러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날이 저물 때에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라고 하시고, 말씀을 전하실 때에 물가의 배에 앉으셔서 전하셨는데, 그 배에 앉으신 그대로 그 호수 건너편으로 가기를 원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피곤하셔서 쉬시기 위해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신 것이 아니다. 호수 건너편은 이방인의 지역으로 헬라의 문화가 지배하는 지역이다. 그 지역 이름은 ‘데가볼리’이다. 데가볼리는 ‘열 개의 도시’라는 뜻이다. 호수를 건너면 바로 ‘거라사’라는 동네인데 데가볼리의 지역 중에 하나이다.
예수님은 이 ‘거라사’ 지역으로 건너가셔서 쉬신 일이 없다. 식사하신 일도 없다. 제자들은 몰랐겠지만 예수님이 건너편으로 건너가자 하신 이유는 그 지역에 무서운 군대 귀신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그 군대 귀신을 잡기 위해서였다. 그 지역은 흑암의 권세 아래 사로잡힌 귀신들이 지배하는 지역이다.
모든 복음서가 예수님이 그 ‘거라사’ 지역으로 건너갈 때 풍랑이 일어났다는 것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그 풍랑과 싸워 이기고 그 거라사 지역으로 침투해 들어가신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다.
예수님이 거라사 지역으로 군대 귀신을 잡기 위해 배를 타고 건너가시는 것을 누구보다 귀신은 더 잘 안다. 거라사는 군대귀신의 터전이다. 그동안 구축해 놓은 터전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한꺼번에 무너질 것을 귀신은 더 잘 안다. 그래서 예수님과 열두제자가 호수 건너 거라사 지역으로 접근할수록 풍랑은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이다. 예수님이 탄 배가 거라사 지역으로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마귀는 풍랑을 더 강하게 불어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미리 알고 계신 예수님은 편안하게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실 수 있었고, 이것을 모르는 제자들은 걱정하고 무서워했다. 예수님을 깨우시면서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38절하)
예수님 일행을 거라사 지방으로 건너가지 못하게 방해하던 풍랑이 예수님 말씀 한 마디에 잠잠해 졌다.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39절).
이것과 비슷한 말씀이 막 1:25에 있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가버나움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시는 사건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풍랑을 꾸짖으실 때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는 장면과 같다. “잠잠하라. ϕιμόω(피모오) ”
약간 나아지는 정도가 아니다. 풍랑은 완전히 없어지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고 했다. 이것과 비슷한 사건이 사도행전 27장의 ‘유라굴라 폭풍’이다. 겉모습은 바울 사도가 죄수의 모습으로 로마에서 황제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가는 것이지만, 성경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는다. 바울 사도는 복음 그 자체이다. 복음을 품고 로마로 가는 것이다. 로마로 가야 할 복음이 바울 사도가 풍랑으로 바다에 빠져 죽으면, 복음도 바다에 빠진다. 복음이 로마로 가지 못하고 지중해 바다에 수장되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바다에 빠질 수 없다. 복음은 하나님 뜻대로 로마로 가야 한다. 복음이 유라굴라 폭풍을 만났지만, 조금 지체할 뿐이지 결국 복음은 로마로 들어갔다.
세계 기독교 역사를 보면, 복음이 가는 곳마다 폭풍이 불어왔다. 그러나 복음은 땅끝까지 갔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도 폭풍 앞에 돌아 오지 않고, 그 폭풍을 이기고 ‘거라사’로 들어갔다.
인생에는 폭풍이 많다. 특히 복음을 가진 성도에게는 폭풍이 더 많다. 이기적인 삶에도 폭풍이 있다면, 복음을 위한 삶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폭풍을 이기는 방법은 복음을 품고, 폭풍과 싸워야 한다. 이기적이고, 욕심 때문에 오는 폭풍을 폭풍이라고 하지 말라. 그것은 내 욕심과 이기심과 정욕 때문에 내가 만든 것이다. 이것들은 내 이기심을 없애고, 욕심을 없애면 저절로 없어진다. 교회를 위해, 예수를 위해, 복음을 위해 살려고 하면 폭풍이 온다. 마귀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기게 하신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예수님이 하고 싶어 하신 일을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