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예수님의 능력
<마가복음 묵상(24) - 2021/12/05>
24. 예수님의 능력
막 5: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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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5: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5: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5: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5: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5: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 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5: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5: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5: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5: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우리 성도의 삶은 내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게 되는 것이다(요삼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잘 되는 것과 못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가령 사업이 안 되고 질병으로 인하여 몸이 병의 노예가 되어 할 일을 못 하는 삶은 얼마나 괴롭고 힘든 삶인가? 우리 주님은 그런 삶을 원하지 않으신다. 내 영혼도 잘 되고 범사에 모든 것이 잘 되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모든 은혜를 주시기를 원하신다.
왜 교회에 나오는 것인가? 내가 구원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교회에 나오는 것이고, 내가 주님의 몸 된 교회의 한 지체가 되었기에 교회에 나오는 것이고, 또 앞으로 소망이 있기에 더 잘 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주님이 이렇게 원하시기 때문이다.
교회에는 오늘의 삶보다 더 귀한 미래의 삶에 소망을 가진 자가 나온다. 적당하게 중간에서 편하게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하는 삶은 자기 자신을 주님께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리고 주님은 이런 자들을 이끌어 주시지도 않는다.
저는 무엇이든 물자를 아끼려고 노력한다. 그러다가 보니 물도 많이 아끼는 편이다. 아내는 설거지할 때 물을 세게 틀어 놓고 쓴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설거지를 할 때는 물이 많이 사용해야 기름때나 세제 찌꺼기가 씻겨 나가지 조금 사용하면 찌꺼기가 그대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물을 적게 쓰는 것이 좋은 것만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물을 많이 사용해서 깨끗하게 씻어내는 것도 좋다는 것을 생각했다.
하나님의 은혜도 그렇다. 은혜를 방울방울 받아서 겨우 신앙을 유지하는 것보다 은혜를 받을 바에는 수도꼭지 틀 듯이 확 틀어서 은혜를 받아야 나의 심령이 시원함을 얻고 나의 모든 불의와 죄, 오물이 씻겨 나가 위로부터 오는 은혜에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낄 것은 아껴야 하고, 주는 것에도 인색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받는데 힘써야 한다. 풍성히 받은 다음에는 절제도 해야 하지만, 내가 받은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받지도 아니하고, 받을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줄 줄도 모르는 것은 삶이 풍성할 수 없고, 삶이 발전할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선진국들은 소비를 굉장히 좋게 생각한다. 사고파는 것을 절대로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경제가 활성화되려면 소비를 잘해야 한다. 그래야 발전하기 때문이다. 물건을 사야 시장이 생기고, 사업이 번창해 간다.
우리가 잘 되는 삶은 성경적인 삶이다.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우리의 삶이 시온의 대로 같이 잘 되어 형통하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교만하게 ‘그까짓 것 살면 사는 거지 뭐, 그냥 보통으로 사는 거지 뭐’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 아버지, 나로 하여금 잘 되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한다. 진실함으로 애절함으로 기도함으로 살아야 한다.
<야베스의 기도>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그러면 왜 우리가 잘 되어야 하는가?
고후9:8에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라고 말씀하셨다. 왜 우리에게 은혜를 넘치게 하시는가? 왜 우리가 잘 되어야 하는가? 그 다음 계속해서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했다.
우리는 있으면 더 많이 일을 할 수 있다. 잘 되면 더 잘 할 수 있다. 진정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에 오늘 우리에게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제대로 사용되어지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5:5-9에도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열매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제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포도나무에서 가지는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 사명이요, 잘 되는 길이다.
잘 되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성도는 마치 산을 오르는 사람이 높고 험한 산을 바라볼 때 흥분하는 것처럼, 빙벽을 오르는 사람이 날씨가 추울수록 더 좋아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의 삶이 어떠하든지 우리 앞에 오는 하나님의 축복을 흥분하고 기대하면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은혜를 받아 할 일 많은 이 세상에서 주를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도가 잘 되게 하기 위해서 교회를 세워 주셨다. 예수 믿으면 잘 된다. 교회에 나와 바르게 예수만 믿으면 잘 된다. 어느 누구든지 예수 앞에 나오면 잘 된다. 문제는 어떻게 믿느냐가 중요하다. 우리는 불교식으로 믿어도 안되고, 유교식으로 믿어도 안되고, 미신 섬기듯이 믿어도 안된다. 내가 어려워지면 예수님 떠나고, 편안해지면 예수님 배반하고, 친구 따라 교회 가듯이 믿어서는 안된다. 나에게는 예수 밖에 없고, 하나님 한 분 뿐이다. 무슨 문제든지, 세상살이에 치우쳐 좌로 우로 치우치면서 마음에 변덕이 죽 끌듯하면서 이랬다 저랬다 지조 없는 신앙생활 하지 말자. 한결같은 신앙이 필요하다. 교회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사람들치고 믿음 좋은 사람 없다. 교회도 꾸준히 한결같이 다녀야 한다.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친구 되시니,
그 은혜를 간구하면 풍성히 받으리
햇빛과 비를 주시니 추수할 곡식 많도다
귀한 열매 주시는 이 주 예수“(93장)♬
성도는 정말 잘 되어야 한다. 실패하지 않고 잘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 실패했다 해도 다시 일어서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삶, 더 귀한 삶을 살 수 있는가? 그것은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진리를 좇아가는 삶이다. 세상의 허황된 것을 좇지 말고, 복음의 진리를 따르라. 이것이 더 잘되는 삶, 더 높은 삶, 더 거룩한 삶이다.
요한복음 18:38에서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 라고 했다. 진리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물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 진리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도 말라는 뜻이다. 하기야 세상의 힘만 의지하고, 세상적인 힘이 있어야만 된다고 그 힘만 믿는 빌라도 같은 족속들은 진리를 알 수 없다. 진리 같은 것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진리를 모르니 가는 길이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것이다. 사고방식 자체가 다른 것이다. 진리를 모르면 잘 될 수 없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고 했다.
예수가 진리다. 예수가 전한 말씀이 진리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라고 하셨다.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18:37)고 하셨다. 예수님은 진리를 위하여 오셨고 진리 때문에 사셨고, 진리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진리가 무엇인가? 우리 인간은 오늘까지 진리를 찾았다. 인간은 도덕에서 진리를 찾고, 철학에서 진리를 찾고, 종교에서 진리를 찾았다. 또 과학에서 진리를 찾고, 지식에서 진리를 찾았다.
진리는 참된 것을 말한다. 진리는 영원한 것, 변치 않는 것, 생명이 있는 것, 인간의 모든 질문에, 문제에 대답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육이요, 그 속에 죄악이 가득하기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에,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도 없기에(롬3:10-12), 진리를 찾지도 못하고, 진리를 알지도 못하고, 진리의 길을 가지도 못하는 것이다.
(롬1:22-25)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세상에는 진리가 없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진리로 이 땅을 다스렸건만, 아담의 죄악으로 이 땅에 진리는 사라지고 흑암의 권세만 가득하게 되었다. 이 땅은 죄악의 세력권이요, 인간은 사탄 화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진리를 찾을 수가 없다. 공자도 석가모니도 마호메트도 진리를 찾았고 추구했지만, 헬라의 철학자들도 진리를 찾고 탐구했지만, 후대의 실존주의 철학자들과 많은 학자들이 진리를 추구했지만, 진리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공자는 ”내가 아침에 도(진리)를 찾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했다. 도(진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어느 누구도 진리를 찾았다고 말한 자가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 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진리를 설명하신 분이 아니라, 진리를 가르치는 분이 아니라, 곧 진리 그 자체이시다. 예수님은 진리로 가득차신 분이시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시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세례요한은 이것을 증언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이것을 증언했다. 베드로 사도는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서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였다“고 했다(벧전1:11).
그래서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다(요8:32). 진리를 알아야 한다. 진리를 만나야 한다. 진리를 알고 진리를 붙잡는 자는 예수님의 능력을 소유하고, 예수를 만날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인이 예수님 곁에 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다. 예수님의 능력을 만진 것이다.
(막5:28-30)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능력은 예수에게서 나온다. 진리를 아는 자는 예수 앞에 나올 것이고, 예수의 능력을 만질 수 있다. 예수에게서 능력이 나와 나를 회복시킨다. 변화의 역사가 일어난다.
(눅6:19)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눅8: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원래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
(시편62:11)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는 하늘로부터 능력을 받아 우리를 인도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느니라“(마28:18)고 하셨다. 요한복음 11장 42절에서도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무덤을 막아 놓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고,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셨습니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고 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아들이신 하나님을 통하여 하신다. 곧 예수님이 우주의 모든 능력의 소유자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 외에는 참 능력을 가진 자가 없다.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온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주를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주님의 진리를 붙잡을 때 우리를 위해 준비하고 기다렸던 것처럼 즉시 나타나셔서 놀라운 능력과 영적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신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전할 때 능력이 나타난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빌2:9)이 예수님의 이름이다.
사도 시대에 유대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라“고 했다(행5:40). 그러나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였다“고 했다(행5:41).
그렇다. 예수님에게는 능력이 있다. 우리가 진리를 알고 진리를 붙잡았을 때 능력이 있는 삶을 살게 되고 죄악과 모든 문제로부터 벗어나 자유할 수 있는 것이다.
(빌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