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원고/마가복음
25.예수님을 배척한 사람들
☆ 주님의 머슴
2022. 2. 17. 11:07
<마가복음 묵상(25) - 2022/1/10>
25.예수님을 배척한 사람들
막 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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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6: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6: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6: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인간의 모든 관계는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 만남은 또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는다.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난 후 부모와 만나고, 친구와 만나고, 부부가 만나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변수가 되는지 모른다. 좋은 만남은 인생을 복되게 하지만 잘못된 만남은 인생을 고통과 실패로 끝나게 한다.
인간과의 만남도 이렇게 이 땅에서의 삶을 결정짓는데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어떻겠는가? 우리의 영원한 삶을 좌우하는 것이다. 인간과의 만남은 이 땅에서만 좌우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저 세상에 가서까지 좌우하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만남은 창조주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것이다.
영적인 만족이 없는 인간은 진정한 만족을 느낄 수 없다. 세상의 명예와 지위와 재물에 부요한 사람이라 해도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번민과 갈등에 휩싸일 수 밖에 없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세상적인 지식과 종교적인 지위에서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의 육신적인 자아와 영적이 자아 사이에서 오는 갈등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는 마음으로 선을 행하기를 원했으나 그 결과는 악을 행하고 마는 것을 보며 괴로워했다. 이런 자신의 모습에 좌절을 거듭하든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면서 탄식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이 갈등이 해결되었음을 깨닫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고 감격해 했다. 곤고한 인생길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고 참된 안식을 주시는 분, 우리가 만나야 할 그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것인가?
1) 그리스도가 없는 자에게는 참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가 없는 인생에는 참된 안식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유무형의 짐을 지고 삶을 길을 걸어가며 쉴 곳을 찾아 이곳 저곳을 헤맨다. 그러나 참 안식은 없다. 예수님에게만 참 안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까?
1.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바로 보아야 한다.
사람은 다 약하다. 대단한 사람이 없다. 사람이 강한 것처럼 보여도 얼마나 나약한지 모른다. 그래서 예수님은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 라고 했다. 사람은 겸손히 낮은 자세로 사는 것 뿐이다.
2.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예수님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이었다.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는 영적 귀머거리였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살지만 영적 소경이요, 영적 귀머거리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보고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강퍅한 마음을 가진 세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영적 무관심으로 닫혀진 마음에 진정한 만남은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그를 영접하고 그를 인정해야 한다.
신앙은 결단이다. 행동을 요구한다. 죄인된 몸이지만 그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지어다.” 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님이 자라신 곳, 즉 나사렛에 가셔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처음으로 고향 나사렛에 가신 것으로 나타난다. 1절에 “제자들도 따르니라” 라고 한 것을 보면 열두 제자들과 함께 고향을 방문한 것 같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많은 사람이 듣고 놀랐다”고 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된 것이냐?” “이 사람은 우리가 다 아는 사람이 아니냐? 마리아의 아들이고 목수가 아니냐? 그 형제들도 누이들도 지금 우리와 함께 이 동네에서 살고 있지 않느냐?” 하면서 “예수님을 배척했다” 고 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살았고, 자라는 것을 보았고, 그 집의 식구들도 잘 알고 있으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외적인 면을 너무나도 잘 아니까, 안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다. 믿을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다. 예수님도 제자들 보는 앞에서 권위가 서지도 않고, 체면이 말이 아니다. 그래서 “거기서는 아무 능력도 행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들이 오늘날 우리 주위에도 일어나고 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평가한다. 특히 목사가 너무나 잘 아는 가까운 사람이거나 같은 동네 출신이거나,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거나, 집안 식구라면 아무리 은혜의 말씀이라도 은혜를 받지 못한다. 그의 영력을 보지 못하고, 외모와 육신만 보이기 때문이다.
나사렛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다. 오히려 자신들의 연약함과 죄를 바라보지 않았다. 자신들의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이 직접 찾아 가셨다. 주님이 직접 손수 만나러 가 주셨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의미 없는 만남이 되고 말았다.
여러분, 우리는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길거리에서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스쳐 지나가 버린다. 나하고는 관계 없는 의미 없는 만남일 뿐이다. 이러한 의미 없는 만남은 복잡하기만 하다. 답답하기만 하다. 소통이 없는 만남이다. 짜증만 일으킬 뿐이다.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 만남일 뿐이다. 만약에 복잡하고 북적거리는 길거리에서 너무나 반가운 아는 사람을 만났다 하자, 너무나 만나고 싶은 사람, 기다리는 사람, 소중한 사람을 만났다 하자, 얼마나 기쁠까?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며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를 것이다. 지금까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붙잡고 이야기를 나눌 것이고, 시간이 좀 있으면 옆에 있는 커피숍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 것이고, 아니면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을 수도 있다.
우리는 예수님과의 만남이 일어나는가? 그냥 스쳐 지나갈 뿐인가? 아니면 나사렛 동네 사람들과 비슷한가?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가? 아니면 내 마름에 별로 다가오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내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왜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는가? 메시야이신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직접 찾아가셨는데도 왜 배척했는가?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 보자.
첫째, 그들은 “이 사람은 목수가 아니냐?” 라고 말했다.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경멸하는 말이다. 천대했다. 무시했다. 별것 아니라고 무시한 것이다.
모르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교리를 천박하고, 심오한 진리가 없고, 가볍고 얕은 천박한 교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낳고, 무식한 어부들과 죄인들을 제자로 삼았고, 죄인과 세리와 소외된 사람들과 상대했고, 그리고 가장 저주스러운 십자가에 저주받은 모습으로 비참하게 죽었기 때문에 기독교는 가장 천박한 사람들이나 믿는 종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야 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18-25).
여러분, 기독교를 무시하고 멸시하고 예수를 경멸하는 사람은 더 어리석은 사람이다.
둘째, 그들은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냐? 우리는 그 형제들과 누이들과 함께 살면서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라고 했다.
이것은 “우리가 너무 잘 안다” 하고 무시하는 것이다.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무시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잘 알고, 많이 안다는 것은 좋은 기회요, 남보다 오히려 더 좋은 위치에 오를 수 있고, 좋은 관계가 될 수 있고,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잘못하면 방관하기 쉽고 무관심하기 쉽고 가볍게 취급하기가 쉽다.
우리가 보통 생각 하기로는 환경이 좋고, 권세가 있고, 공부를 많이 해서 유식하고, 부자여서 물질이 풍부하다면 오히려 예수를 더 잘 믿을 것 같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오히려 환경이 어렵고,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이 은혜를 더 많이 받고, 더 열심히 하고 예수를 더 잘 믿는다.
여러분, 예수를 오래 믿은 사람들에게도 이런 경향이 있다. 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인들 가운데도 이런 경향이 있다. “나는 기독교에 대해서 잘 안다” 하면서 신앙생활에 대해서, 기독교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가볍게 취급하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자들은 은혜가 없다. 은혜가 무엇인지 모른다. 예수님에 대해서 과소평가하고, 믿음을 과소평가한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인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기는 하였지만 영접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배척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나사렛 사람들에게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다”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 능력을 행할 수 없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권능을 무시했고,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령 환자가 아무리 훌륭한 의사에게 와 있다 해도 환자 본인이 병 낫기를 거부하거나 의사를 신뢰하지 못하고 불순종한다면 누구도 고침받을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혹 우리 가운데 믿는다 하면서, 기독교인이라 하면서 나사렛 사람들의 사상을 가진 자들이 있지는 않는가? 나사렛 사람들과 같이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가졌다 하면서, 그 믿음이 의미 없는 믿음은 아닌가? 교회는 늘 다니면서 늘 의미 없는 종교생활은 하지 않는가?
*내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인정해야 한다.
더 나아가
*기독교를, 교회를, 기독교의 믿음을 우습게 시시하게 생각하지 말자.
십자가의 도를 멸시하지 말자.
*또 오래 신앙생활 했다고, 많이 안다고, 쉽게 생각하지 말자. 그리고 교만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