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마가복음 묵상(34) - 2022/4/18>
34.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막 7: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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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7: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7: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7: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7: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7: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7: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앞에서 우리가 생각해 본 대로 참으로 부정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 내용 뒤에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이 귀신에게서 놓임을 받는 내용이 나온다. 얼핏 보면 이 내용은 앞의 내용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 같지만 이 기사가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의 정결케 함에 대한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보면 “부정”이라는 주제로 본문 내용을 보면 앞의 내용과 연결된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흔히 부정하다고 여기는 이방인 여인과 대화를 함으로써 예수 스스로가 앞에서 천명한 원칙, 즉 어떤 특정한 사물(음식을 포함해)이나 종족이 부정한 것이 아니며 인간의 마음이 부정한 것이라는 것을 실천적으로 보여 주시는 것이다.
이 본문 내용은 어떻게 보면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의 치유에 초점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측면으로 보면 예수님과 이 여인과의 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저가 생각할 때는 예수님의 치유 기적보다 수로보니게 여인과의 대화에 초점을 더 맞추고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이 본문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연상시킨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부정한 것에 대한 논쟁을 끝내고 장소를 옮겨 두로 지역으로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24절).
예수님은 거기에서 어떤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려 했으나 예수의 소문이 널리 퍼져 자신을 숨기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한 집에 들어가” 이 집은 예수님께 은혜를 입은 어떤 사람의 집일 것이다. 논쟁을 일으키는 유대 땅에서 이방 지역인 두로 지역으로 들어가셨다. 헬라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요, 헬라 문화와 철학이 물든 지역이다. 이런 지역에 논쟁을 일으키는 유대 땅과 다르게 순수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의 사람이 있었다. 100%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는 순수한 믿음을 소유한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본문에서 강조하는 부분은 24절의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이다. 예수님이 자신을 숨기려 한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다는 두 가지 상반된 사실은 마가복음에서 굉장히 강조되는 부분이다. 이것은 복음은 감출 수 없다는 것이다(1:44∼45; 5:43; 9:30 참조).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인이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자마자 달려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는 사건이 발생했다(25절). 이렇게 사람이 다른 사람 앞에 엎드리는 것은 그 사람에게서 어떤 자비를 구하는 모습이다(막1:40, 5:23 참조). 이것을 마가복음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이 여인이 헬라인 곧 이방인이라는 데 있다. 본문에서 이 여인이 헬라인으로서 수로보니게에서 태어난사람이라고 기록한다(26절).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이 여인은 곧바로 귀신들린 자신의 딸에게서 귀신을 내쫓아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한다.
이 여인의 요청이 간절한 반면 이에 대한 예수의 첫 번째 반응은 의외로 냉담하다.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 말씀은 이런 의도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먼저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기회를 얻는 대로 모든 기적을 행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특별히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려고 의도한 것을 하나님의 가족이 아닌 자들에게, 즉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바도 없고 하나님에게 흥미도 가지지 못하는 유대인들에 비하면 마치 개와 같이 부도덕하고 불경건한 자들에게 줄 수 없다.” 는 말이다.
주님은 가끔 신실한 자들, 믿음이 강한 자들, 주님의 마음에 드는 자들을 시험하시기도 하신다. 신앙의 폭을 더 넓히시기 위해서이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예수님이 이방인이 이 여인에게 개라고 하신다. 유대인들을 이방인을 부를 때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부르신 것은 그 여인의 믿음을 자극하여 시험해 보기 위해서이다. 정말 자기 딸을 위한 믿음이 있는지 시험해 보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가끔 교회를 다니기를 원하여 교회에 나와 사람들과 사귀면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본의 아니게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입을 때가 있다. 물론 내가 아직 신앙이 여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 중에 ‘나는 교회에 안 나가요. 과거에 교회에 다녔는데, 누구 때문에, 장로님 때문에, 어느 교인 때문에, 목사님 때문에’ 등등, 상처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교회에서 상처를 받은 것은 교회가 잘못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선 내가 신앙이 여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교회를 나오지 못하게 하는 마귀의 대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교회는 사람이 모인 공동체이기도 해서 여러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온갖 사람이 다 모인다. 한마디로 죄인들이 모인 곳이다. 의인들이 모인 곳이 아니다. 성인군자들이 모인 곳이 아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면서 사람을 뛰어넘어야 한다. 미음이 약하든, 믿음이 좋든, 집사님들을 뛰어넘고, 권사, 장로님들을 뛰어 넘어야 한다. 심지어 목사님까지도 뛰어넘어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께로 나아갈 때 사람들에게 걸려 넘어져 시험에 빠질 때가 많다.
또 우리는 먼저 믿는 자들로서 나중 믿는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말자. 걸림돌 노릇한 자들치고 먼저 되는 자가 없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19:30)
본문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이 여인에게는 굉장히 굴욕적이며 희망을 꺾는 것이었다. 마음에 깊은 상처를 안고 돌아갈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렇지 않았다.
1.이 여인은 고난과 근심 중에 있을 때,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예수님께 나와서 끈질기게 간청하였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오는 것이다. 어렵고 힘들 때 예수 그리스도에게 간청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힘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이다. 그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힘이다. 지식의 힘이라는 것이 안다는 것이 모르는 것은 힘이 아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모르는 것은 실패하게 하고, 손해 보게 한다. 아는 만큼 이익이고, 실패가 없고, 힘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큰 힘이다. 실패하지 않는 원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자만이 그리스도 앞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방인이지만 예수를 배척한 유대인과 달리 이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그를 알았다. 그래서 그 분 앞에 당당히 나올 수 있었다. 그 분에게 실망스럽고 섭섭한 말을 들어도 개의치 않고 굳게 믿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뛰어넘은 것이다.
2.이 여인은 자존심을 버렸다.
사람들은 자존심을 굉장히 소중하게 여긴다. 특히 현대인들은 자존심을 건드리면 죽는 줄로 안다. 좀처럼 참지를 못한다.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폭발한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자기 자존심이 상하면 교회를 버리고 떠나거나 죽기 살기로 대적한다. 오늘날 사탄은 교인들의 자존심을 앞세워 신앙생활을 못하게 한다. 복음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게 한다. 자존심 때문에 예수 믿지 못하게 한다.
“(고후4:3-4) (3)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마음을 혼미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얄팍한 자존심이 아닐까? 예수 잘 믿으려면 그 알량한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 자존심으로 따진다면 예수님만큼 자존심이 상했던 분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이신 분이 인간의 모양으로 오신 것부터, 더 나아가 인간들에게 무시당하고, 나사렛 동네에서 자랐다고 “나사렛에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라는 평판을 받았고,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금식,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 요단강에서 세례, 이 정도는 그렇다 치더라도 십자가 앞두고, 재판 받을 때 무시당함, 침 뱉음 당함, 뺨 때림을 당함, 홍포를 입고, 가시면류관을 쓰고, 갈대로 조롱당하고, 매 맞음을 당하고, 쥐꼬리만큼 권력을 가진 빌라도에게 재판받고, 무시당하고, 십자가에까지 매달려 죽음, 심지어 벌거벗은 채로 십자가에 못 박힘 당한 수치 등등..... 이런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존심을 다 버린 것 때문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자존심 때문에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구원을 버리는 일이 너무 많다.
사람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늘 어둡게 산다. 사람이 늘 긍정적으로 믿으면 늘 소망이 있다.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믿음이 있어야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 믿음이 세상을 이기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