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원고/마가복음
37.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 주님의 머슴
2022. 7. 11. 17:31
<마가복음 묵상(37) - 2022/7/11>
37.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막 8: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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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12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3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오늘 본문에서 등장하는 인물 중에 바리새인들이 있다. 당시의 신앙 결사체 멤버로 가장 경건한 종교적 그룹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들은 성직자 그룹인 제사장들과는 다른 평신도집단으로서, 그릇 된 것과 죄 된 것에서 분리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던 신앙인 집단이었다. 그들의 신앙은 내적 신앙과 바른 신앙 자세보다는 신앙의 외적 형태와 형식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위선적 신앙이었기에 예수님에게 많은 지적을 받았다.
이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표적을 구했다. 여기 11절에서 “힐난하다”라는 말과 “시험하다”라는 말이 합쳐져 이들 바리새인들은 ‘나사렛 사람 예수에 게 뭐 대단한 표적이 있겠는가’ 라는 식으로 의심하고 부정하는 그리고 다 투려는 왜곡된 편견을 가지고 왔다는 것을 보여 준다.
바리새인들이 칠병이어로 사천 명을 먹이신 것과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 이 놀랍고 엄청난 두 사건 다음에 찾아왔다는 점에 주목하자. 그들이 만약에 그 기적의 현장에 없었다면 들은 소문을 믿지 못해 찾아온 것일 테고, 그 자리에 일부라도 있었다면 그럴 리 없다는 불신감으로 재차 확인하려고 찾아온 것일 것이다. 그러나 기적은 있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그랬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에게 또다시 그런 기적을 보이지 않겠다고 하신다. 기독교의 표적은 뭔가 보여 주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표적은 그런 자들에게 보이는 표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였으나 주님은 마음속 깊이 탄식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12절)
주님은 왜 “이 세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는가? 누가복음 18:8에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한탄하셨다. 이 세대는 믿는 자가 심히 적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많아도 참으로 믿는 자가 적다. 참으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표적을 보여 주시지 않는다. 기독교의 표적은 참으로 믿게 하기 위해서이다. 참으로 믿는 자들을 찾기 위해서 표적을 주신다. 그런데 표적을 보기 위해서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표적을 보여 주시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대에 표적을 본 자들이 많다. 다른 말로 표적을 체험한 자들이라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주님의 표적은 주님과 일대일의 관계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여러 사람에게 보란 듯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주님과 일대일의 관계이다.
주님과의 관계를 바로 설정하지 않고, 먼저 표적을 구하는 자들이 오늘날에도 있다. 오래전 목회를 처음 시작하든 전도사 시절에 교회에 처음 나오는 자매 중에 시어머니가 오랜 병에 고생하고 계셨다. 제가 심방해서 기도해 주면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으라고 권면했다. 병 낫기 전에 먼저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아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먼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해야 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 할머니는 병부터 먼저 고쳐주면 믿겠다고 한다. 그러나 내 느낌에 그 할머니는 병을 고침받으면 교회에 나오지 않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는 간곡히 권면했다. 먼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라고 했다. 그러면 저절로 병은 고침받게 된다고 했다. 그 후 몇 번이나 찾아가서 권면하고 기도해 주었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우리는 중요한 것을 놓친다. 소속의 원리가 중요하다.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 죄의 권세와 죽음의 권세, 마귀의 권세에 속해 있는가?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가? 어느 위치에 서 있는가? 이것이 중요하다. 예수에게 속해 있어야 한다. 예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 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의 것’ 이라는 뜻이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3:23)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어야 표적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표적이 없다. 설령 표적을 주어도 믿지 않는다. 믿음이 없는 자는 표적을 표적으로 보지 않는다.
마12장과 16장에 보면 본문과 비슷한 말씀이 두 번 나온다. 서기관과 바리새인 몇 사람이 찾아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이기를 원했다.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12:38-40)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마16:1-4)
예수님이 같은 말씀으로 반복하신 말씀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라고 하셨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3일간 들어가 있었던 것과 주님 자신이 3일간 무덤 속에 들어가 있을 것을 동격으로 보고 말씀하신다. 구약의 요나서의 요나가 불순종함으로 바다에 던져져 물고기 뱃속에 있었는 것은 장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음과 죽음 후의 3일간 무덤에 있을 것과 3일 후에 무덤을 열고 부활하실 것을 미리 예표로 보여주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여러 가지 표적은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믿지 않는 것은 다른 어떤 표적을 보더라도 믿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장 큰 표적 중의 표적은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에서의 부활이다. 이것을 보고도 믿지 않는다면 다른 어떤 표적을 주어도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왜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않는다고 하시는가? 믿음이 없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표적을 주시지 않는다. 아니 표적을 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본문에서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에게서 정말 참된 예수님의 표적을 구하기보다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의 대적자들임을 더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으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하기까지 했다(3:22). 11절에 보면, 그들은 이제 예수님께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요청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표적’이라는 완곡한 표현이다. 그들이 요구한 표적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확신을 줄 만한 표적이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러한 표적을 행하시지 않는다면 이제까지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이적들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무리들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격렬하게 예수를 반대하며 나섰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표적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하셨다(1절). 그들은 표적을 구하는 동기가 잘못되었고, 또한 어떠한 표적이 주어진다 해도 믿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다. 그들은 이미 예수께서 행하신 수많은 표적들을 보았고 들였으나, 영적으로 눈먼 상태에 있었으며 사단의 속박과 지배하에 그대로 머물렀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표적 요청을 거부하셨을 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갚이 탄식하셨다’(1절). 예수님께서 탄식하신 것은 바리새인들의 완악함을 인함이요, 그들을 포함한 당대의 불신자들의 완고함을 인함이었다.
12절의 “이 세대”는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세대이며, 하나님을 대항하는 전 인류의 대표이다. 대적과 비난과 배척을 받으신 우리 주님께서는 몹시 탄식하셨다. 주님의 탄식하심은 그들의 불신앙 때문이요, 불신앙으로 말미암는 그들의 파멸 때문이었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원리를 교훈해 준다.
첫째, 이적 (miracle)은 복음 전파(preaching of Gospel)와 깊은 관계가 있다. 복음 전파와 아무 관계가 없는 이적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적은 복음 전파와 관계될 때에만 그 중요성을 갖는다.
우리는 복음서 어디에서도 복음 증거와 독립되어 있는 이적을 볼 수 없다.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은 과연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는 능력이 있는지를 “시험하기 위해서”(11절) 표적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광야에서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하였던 것과 같은 것이다(1:1-13).
당연히 예수님께서는 사단과 바리새인들의 시험과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시고 힘있게 거절하시고 나아가 그들을 떠나가셨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질 것을 요청하신다. 그 다음에 표적을 주어 믿음을 굳게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예수님은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는 불신자들에게는 어떠한 표적도 나타내 보여주시지 않는다. 그들에게 주시는 표적은 오로지 선지자 요나의 표적뿐이다. ‘요나의 표적’ (the sign of Jonah)으로 말씀하신 예수님의 답변은 본서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마태복음 12:40에 나타나 있다. 거기서 예수님은 요나가 밤낮으로 3일동안 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처럼 인자도 땅속에서 그와같이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이 세대”(1 절)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표적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스스로 비천한 길을 걸으셨다. 고난과 죽음의 길, 즉 무덤에 내려가는 길도 가셨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우리도 그와 같은 길을 걸어가야 한다. 고난과 죽음의 길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분을 신뢰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능력 있는 일들을 행하시지만, 주님을 신뢰하지 않는 자에게는 결코 ‘표적’을 나타내 보이시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