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마가복음 묵상(41) - 2022/10/9>
41.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막 8:3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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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지금의 화장실을 변소, 치칸, 뒷칸으로 불렀다. 지금의 화장실로 불려지게 된 것은 일본이나 서양으로 도입된 이름이고, 우리나라는 변소, 뒷칸으로 불려졌고, 치칸은 중국식이다. 옛날에 뒷칸(변소)에 앉아 있으면 냄새가 지독하다. 그러나 조금 앉아 있다 보면 그 냄새도 잘 못 느낀다. 옷 속에 스며들어 배어있어도 본인은 못 느낀다. 밖에 나오면 옆의 다른 사람이 냄새을 느낀다.
죄도 마찬가지이다. 죄도 처음에는 내 영이 느끼고, 내 의지가 느끼고, 내 몸도 느낀다. 그러나 죄 속에 들어가 앉아 있으면 서서히 못 느낀다. 죄에 무디어져 죄가 죄로 느껴지지 않는다. 죄는 서서히 인간을 사탄 화(化)로 바꾼다. 인간을 전인적(全人的)으로 사탄화되게 해 버린다. 내가 죄 많은 인간, 타락한 인간임을 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이 더 많이 느낀다. ‘저 인간 지저분한 인간이구먼!’ ‘저 인간 말하는 것 보니까, 속이 더럽구먼!’ 다른 이가 더 잘 느낀다.
우리가 아는 대로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을 먹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불순종함으로 선악과를 먹게 된다. 처음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했지만 죽지 않았고, 벌거벗은 것을 아는 정도의 변화만 온 것처럼 느꼈지만, 서서히 인간의 본성이 변질되어져 가고 있음을 몰랐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은 것을 추궁할 때에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 할 생각은 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2절). 하와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3절) 라고 변명했다. 이것은 전형적으로 인간이 심성이 사탄화가 되었다는 증거이다. 회개가 없고 변명하고 핑계하는 전형적인 인간의 모습은 인간의 전인격이 사탄화가 되었다는 증거이다. 훗날 아담이 낳은 두 아들 중에 가인이 동생 아벨을 들로 불러내어 쳐 죽이는 일이 일어난다. 억울하게 죽은 아벨의 피가 땅속에서 하나님께 호소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을 찾으신다. 그리고 물으신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때 가인은 솔직히 고백하고 회개했어야 했다. 그러나 사탄 화로 변한 인간성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변명한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사탄화가 된 인간은 늘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이 상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사탄화 된 인간은 죄가 나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며, 죄를 다스릴 수도 없다.
인간은 의인처럼 보이고, 선한 자로 보이고, 신앙인으로 보이다가도 문득문득 무신론자로, 믿음 없는 자연인으로, 사탄으로 변한다.
우리는 바른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 늘 마음과 입으로 신앙고백이 흘러나와야 한다. 푯대를 예수에게 맞추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과 입으로 바른 신앙고백이 아닌 세상의 말과 죄악의 언어가 나와서는 안된다.
성경에는 언어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오순절의 언어요, 또 하나는 바벨의 언어이다. 오순절의 언어는 사랑의 언어요, 하나 되게 하는 언어요, 성령의 언어요,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언어이다. 그러나 바벨의 언어는 분열의 언어요, 혼돈케 하는 언어요, 미움과 시기의 언어요, 분하게 만들고 폭력을 만드는 언어이다. 무엇이든지 부정적이고 하지 못하게 하는 조작의 언어이다.
오늘 본문에서 왜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하여 꾸짖으시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33절). 라고 하셨을까?
사탄화된 인간성은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인간을 두 가지로 나눈다면 1)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과 2)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으로 나눌 수 있다.
1. 자연인은 하나님의 메시야를 거절한다. 예수가 하나님이 보낸 메시야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십자가를 대적한다. 십자가에 대한 생각을 뿌리친다. 십자가 외에 다른 길을 원한다
2. 자연인은 사탄에게 속해 있다.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않는다.
“사탄”는 ‘대적하는 자’라는 뜻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요8:44)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대적했다. “예수님을 붙잡고 항변했다.”
3. 자연인은 그 마음을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에 둔다. 물질적인 것에 마음을 둔다.
“생각하지 아니하고” 라는 말은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5-7).
그래서 자연인은 물질적인 것, 인간적인 것만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화려한 것, 풍성한 것만 생각한다. 그저 자기 생각대로 좋은 것이면 된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생각한 대로 되어지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십자가가 없다. 십자가를 지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4,35)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8:38)
성도는 자기 목숨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부인하면,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게 된다. 성도는 주님을 생각하며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십자가를 질 수 있어야 한다. 자기를 먼저 생각하고 십자가를 부인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