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원고/마가복음

2.요한 - 복음전도자,선구자

☆ 주님의 머슴 2021. 1. 9. 11:19

<마가복음 묵상>

2.요한 복음 전도자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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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1: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1: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세례요한의 전도가 굉장히 효과를 거둔 것이 사실이다. 온 이스라엘 전역에 세례요한의 소문이 퍼져나갔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를 선지자로 인정했다(14:5). 분봉 왕 헤롯이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백성들이 그를 선지자로 여김으로 그들을 두려워했다고 했다. 세례요한의 외침에 사람들은 떼를 지어 모여 와서 요한의 말을 경청했고,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쳤다. 사람들이 많이 살고 왕래하는 예루살렘 도성이 아니라, 오늘날로 말하면 대도시가 아니라, 광야였다. 광야가 뭔가? 광야는 세상이다. 광야는 인간들의 마음이다. 공허한 상태인 인간의 마음이다. 광야는 많은 소리, 여러 가지 소리가 없다. 광야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한 탐스러운 것도 없다. 오직 외치는 자의 소리만 있을 뿐이다. 마음을 사로잡을만한 다른 것이 없기에 복음만이 들려올 뿐이다. 세미하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을 뿐이다.

성경에는 광야의 사람이 많다. 모세가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을 받았다. 바울은 아라비아광야에서 충전하고 말씀을 받았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외쳤다. 광야를 체험하자.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자. 광야에서 말씀을 축적하자. 그리고 광야를 향하여 복음을 외치자.

 

세례요한은 어떻게 사람들에게 이 같은 충격을 주었을까?

1.요한은 자기에게 온 복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 복음을 위해 실천했다.

나에게 복음이 오면 사명 자가 된다. 그 사명을 위해 산다. 세례요한은 예수를 알았다. 예수를 위해 먼저 길을 닦는 자가 되기를 원했다. 구약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외친 그 예언이 자기를 통해 이루어질 것을 알았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40:3-5)

사람이 복음이 오면 무엇을 하며 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길을 알게 된다. 복음이 등불이요, 빛이다. 그 빛을 가지고, 품고, 빛을 따라 살게 된다.

 

2.요한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알고 있었던 것, 또 사람들의 영혼 깊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을 사람들에게 전했다.

이스라엘 민족은 300년 간 예언의 말씀이 끊어져 있었고, 침묵상태에 있었다.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진정한 말씀을 기다리며 갈망했다. 그런데 요한의 메시지 속에서 그것을 들었다.

옛날 플라톤은 교육이란 새로운 것을 찾아내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는 데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듣는 사람의 자신의 양심에 던져지는 메시지 이상으로 감동을 주고 효과를 주는 것은 없다. 건드리면 톡 터질 것 같은 순간에, 간절함이 있고, 무언가 기다림의 상태에 있는 심령들에게는 말씀이 강력하게 나가와 새겨지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을 듣는 자는 간절함과 애절함, 기다림, 사모함이 있어야 한다.

 

사도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무언가 삶에 쫓기고 있었고, 무언가 해야 했고, 무언가 만나기를 갈망하고 있지 않았을까? 불의를 보면 참을 수 없었고, 참 진리의 길을 가기를 원했을 것이다. 열정과 갈망함이 있었지만, 어느 길이 옳은 길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을 것이며, 조상 적부터 내려오는 율법에 맞지 않는 삶은 이단으로 보았을 것이며, 참 진리의 삶을 추구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신생 이단으로 보고 열정적으로 박해하고, 교회를 대적했을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지나친 열성이 분별력을 잃고 진리에 역행하는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 바울이 아마 그러했지 않았을까?

 

그런 바울(청년 사울)에게 예수님이 찾아 오셨다. 그리고 만나주셨다. 잘못된 방향의 열정을 참된 진리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주셨다. 수도꼭지를 살짝 바른 방향으로 돌려주었더니 힘 있는 복음의 열차가 되어 복음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세례요한은 갈망하고 있는 사람들의 심령 속에, 길을 찾고 있는 심령들 속에 길을 보여 주고 그 길을 가게 했다.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1:16-17).

 

3.요한은 겸손했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그가 겸손했음으로 더 효과가 나타났다.

유대주의자들, 율법주의자들은 너무 교만했다. 자기를 드러내기를 좋아하고 낮은 자들을 무시했다.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6-7).

낙타털 옷과 메뚜기와 석청은 가난한 삶의 모습이요, 서민 축에도 들지 못하는 암 하렛츠 땅의 백성의 삶의 모습이다. 세례요한은 정말 가난한 집안의 출신은 아니었을 것이다. 레위지파의 자손이요, 제사장계열의 가문이다. 그러나 복음을 받은 자로서 복음보다 앞서가며 전하는 자로서 스스로 가난한 삶을 살았다. 그가 머물러 살던 장소, 그가 입은 옷, 그가 먹은 음식은 매우 검소하고 영혼을 죽이는 경박하고 나약한 사치를 배제해 버린 옛 시대의 선배 예언자들을 따르려고 했던 것이다. 구약의 엘리야 선지자와 같이 닮아가려고 노력했음을 삶으로 보여주었다(왕하1:8).

 

옛날에는 전화를 걸려면, 전화국에서 교환원이 전화를 연결시켜 주었다. 전화가 잘 연결되지 않을 때 교환원은 가끔 연결해 드리고 있는 중입니다.” 라고 말한다. 그러다가 연결되어지면 교환원은 사라져 버리고 말하고 싶은 사람과 직접 연결이 되는 것이다. 요한은 무대의 중앙에서 사라지고, 예수와 만나게 해 주며, 예수를 드러나게 한 것이다. 인생의 최고의 희열은 복음을 만나는 것이고, 예수를 만나 체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