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원고/산상복음

4.[산상복음4]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1)

☆ 주님의 머슴 2021. 3. 8. 09:03

주일설교(2015/6/7) - 산상복음 설교(4)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1)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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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역사 이래 사람은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서양과 동양의 복의 개념은 조금씩 다릅니다. 서양의 복의 개념은 정신적인 개념이 더 강합니다. 그러나 동양의 복의 개념은 외적인 것이 더 강합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조상 적부터 복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봄이 오면 무조건 대문과 방문마다 입춘대길(立春大吉)”를 붙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옷, 베개, 이불, 밥그릇, 국그릇, 수저에 복()자를 새겨 넣습니다. 그래도 오천년의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은 참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특히 반상의 법도가 엄격해서 천민들은 더 힘들게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얼마나 가난했으면, 찢어질 정도의 가난이라고 했겠습니까? 가난을 숙명으로 생각하고 가난을 짊어지고 살았습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의 선교역사, 기독교 100년사, 선교사들이 선교활동 일기들을 읽어보면, 외국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 와서 저 함경도에서부터 시작해서 남쪽 경상도, 전라도를 돌아 다녀보니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눈 뜨고 못 볼 지경이었고, 천민들이나 일반백성들은 신을 신고 다니는 사람이 제대로 없고,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제대로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은 주로 미국, 영국, 호주 선교사들이었는데, 그 당시 그들의 삶과 우리나라의 생활이 얼마나 차이가 났겠습니까? 그들의 생활수준에서 우리나라를 보았을 때 얼마나 비참하고 한심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들 보세요. 얼마나 기가 찹니까? 우리나라도 그것보다 더한 시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나라에 130년 전에 기독교가 들어 왔습니다. 복음이 들어 왔습니다. 방방곳곳마다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가르치고 개몽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정신개조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이 나라를 살린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에 나오면 먼저, 정신개조부터 일으켰습니다. 성경을 가르치고, 한글을 가르치고, 양반 상놈이 없다. 인간은 다 평등하다, 반상의 제도에 매여 살지 못하게 가르쳤습니다. 축첩을 못하게 하고, , 담배, 노름을 못하게 하고, 게으름을 물리치게 했습니다. 이 나라는 기독교의 복음이 살렸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인간의 영적, 정신적 개조를 일으킵니다. 인간의 심령은 가만 내버려두면, 세상의 찌꺼기가 계속 달라붙기 때문에 계속 씻어내야 합니다. 죄악을 씻어내고, 사탄적인 습성을 씻어내고, 게으름을 씻어내고, 변질해 가는 사상과 생각을 씻어내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복음의 말씀을 계속 듣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서양은 정신적, 내적 복의 개념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스티븐 코비가 쓴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책에 보면, “성공하려면 내면으로부터 시작하라. 내면으로부터 변화하라.” 고 말합니다. 특히 성격과 성품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격은 외적인 것이고, 성품은 내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내적 성품 중심의 사고가 있고, 외적 성격 중심의 사고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적 성품 중심의 사고에는 언행일치, 겸손, 충성, 절제, 용기, 정의, 인내, 근면, 소박함, 수수함, 황금률(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적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과 같은 덕목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외적 성격 중심의 사고에는 대인 관계를 원활하게 해주는 성격, 대중적 이미지, 태도, 행동, 기법과 기술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중요한 개인 및 대중을 상대할 때 필요한 각종 기법이나 적극적인 사고방식외적 성격 중심의 사고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내적 성품 중심의 사고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외적 성격 중심의 사고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하려면, 내면으로부터 시작하라. 내적 성품 중심의 사고를 길러라 고 말합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내적 성품 중심의 사고는 관심 갖지 않고, 외적 성격 중심의 사고만 기르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내적 성품을 기르면, 외적 성격은 자동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복음은 영적, 정신적 축복을 만들어라는 것입니다. 영적, 정신적 축복을 가지면, 외적이고 육신적인 축복은 저절로 온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산상복음에서 이 팔복은 바로 이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팔복은 이 영적이고, 정신적인 축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3절을 다시 한번 읽으십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이것이 첫 번째 복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입니다. 이 복은 가장 기초가 되는 복입니다. 이 첫 번째 복은 뒤이어 나오는 모든 복의 열쇠가 되는 복입니다. 다른 모든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결과입니다. 팔복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정해 놓은게 아닙니다. 영적 논리적 순서가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해 진다는 것은 속을 비우는 것을 의미하며 나머지 복은 가득 채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먼저 비우지 않으면 채워질 수가 없습니다. 새 것으로 채우려면 지금까지 있던 것을 버려야 합니다. 옛 것을 버리고 새 것을 부어야지 옛 것이 남아 있는데 아무리 새 것을 부어도 새 것이 되지 않습니다. 옛 것을 버리고 새 것을 넣어야 새 것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먼저 끌어내린 후에 세웁니다. 먼저 통회하는 회개가 있어야 채워집니다. 심령이 가난해지면 자동으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복음은 회개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왜 복이 있습니까? 모든 것을 비우고 새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있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하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왜 복이 있습니까? 심령이 가난하면 천국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팔복 중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이 처음에 와야 하는 이유는 심령이 가난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에는 심령이 가난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기독교인과 천국 백성의 기본적인 특징입니다. 팔복은 천국으로부터 시작해서 천국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팔복의 첫 번째 복이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10절에 마지막 복에서도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는 말로 끝납니다. 그래서 팔복은 천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현재적 천국이 옵니다.심령이 가난해야 첫 단계의 천국 문이 열립니다. 현재적 천국의 문이 열려야 나에게 복이 임합니다.

그리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보다 더 완전한 믿음은 없습니다. 그리고 더 완전한 칭의, 즉 의롭다 인정받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 첫 번째 복은 나의 영성이 어느 수준에 있는가? 나의 믿음이 어느 수준에 있는가? 나의 신앙의 수준의 엄중하고 철저한 테스트가 됩니다. 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첫 번째 복이 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물질의 가난, 지식의 가난, 명예의 가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가난은 복이 될 수 없습니다. 육적으로 가난한 자가 천국에 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것이 미덕이 아닙니다. 가난이 무조건 영성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무조건 가난한 자만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가려고 일부러 가난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가난해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깊은 영성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면서 재산을 다 바치라고 하는 것은 이단, 사이비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육적으로 가난했습니다. 그렇다고 육적으로 가난한 것이 복이라고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적으로 가난하신 것은 단지 우리를 부유하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 스스로가 가난해 지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8:9)” 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가난한 종교가 아닙니다.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가서 종일 굶으면서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도는 육적으로 풍부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좋은 옷을 입는 게 복입니까? 누더기를 입는 게 복입니까? 물론 좋은 옷을 입는 게 복입니다. 기독교는 가난을 예찬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것이지, 육적으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육신적으로 가난해 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국가나 개인에게 복을 주셔서 부유하게 하고, 형통하게 하고, 잘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에도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12:2)” 고 약속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은 육적인 복도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육적으로 잘 살아도 심령이 배부르면 그것은 저주입니다. 그것이 불행인 것입니다.

여러분! 왜 오늘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심령이 가난하기 때문에 나오신 것입니다. 심령이 배부른 사람은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복이 있는 자들입니다. 할렐루야!

 

설교 시간에 왜 은혜가 됩니까? 심령이 가난하니까 은혜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니까 은혜가 되는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좋은 날에 가족끼리 놀러가면 얼마나 좋습니까? 산으로, 바닷가로 관광지로 놀러가면 좋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에 나왔습니까? 심령이 가난하기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교회에 옵니다. 심령이 배부른 자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심령이 가난해야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하늘의 복, 신령한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심령이 가난하지 않으면 복이 있는 자가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천국이 열립니다. 중요한 것은 심령의 가난입니다.

 

천국에 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사람의 심령에서 결정됩니다. 심령이 가난하면 천국에 가게 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부자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심령이 가난하지 못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입니다. 천국에서 버림받은 자가 불행한 자입니다. 복을 받지 못하고 버림받은 자가 심령이 배부른 사람입니다.

 

(3:17)에서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 교회의 불행이었습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 가운데 가장 심한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자 교회였고 큰 도시에 있었습니다. 그 도시는 산업이 발달되어 무역 활동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렇게 부유한 교회였기 때문에 스스로 부족함이 없다라고 교만했습니다.

 

또 누가복음 1817절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이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낮아지는 게 기도입니다. 부족하고 잘못된 것을 찾아내어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 바리새인은 잘 하는 것만 하나님 앞에 내 놓았습니다.

 

심령이 배부르면 버림받습니다. 누구라도 심령이 가난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주신 첫째 복은 심령이 가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21:4)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눈이 높은 것, 마음이 교만한 것,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입니다. 눈이 높은 것이 죄입니다. 입이 높은 것이 죄입니다. 높으신 하나님 앞에 스스로 높다고 생각하면 죄입니다.

(4:16)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자기를 자랑하는 자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늘 깨닫고 가난한 심령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심령이 부유한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생활합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심령이 가난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8:13)라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성도는 세상을 향하여는 당당하고 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는 심령이 가난해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라는 말은 세속적인 정신에 지배를 받지 않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적 부귀에 의존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모두가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합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자가 되어 있어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을 더 철저히 의지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가지면 가질수록, 높은 자리에 오르면 오를수록 더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먼저 우리의 영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육신이 건강하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환경에서 부한 삶을 사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육신이 심히 연약했습니다. 늘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하나님은 늘 바울에게 관심을 집중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의 영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영의 가난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가 소심하거나 자신이 없어야 한다거나 용기가 부족하다거나 교제를 싫어하거나 항상 뒤에 머물러 있고, 참견하거나 나서기를 꺼리는 것, 수줍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기의 개성을 억압하거나 숨기고 드러내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과 자기의 개성을 죽이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의도적인 겸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눈꼽만한 지식을 가지고 교만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다. 그래도 그것에 비해 의도적인 겸손도 대단하게 생각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심령의 가난은 만들어진 겸손, 훈련된 겸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오늘 성경이 말하는 심령의 가난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대할 때에 느끼는 자기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철저한 자기의 부족함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심령의 가난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은 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모세, 다윗, 이사야, 베드로, 사도 바울 등, 성경의 인물들은 그렇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로 알고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발견하고,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배설로 여기고 버렸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을 바로 볼 줄 알고, 하나님을 바로 인정합니다. “하나님, 저는 부족합니다. 저는 연약합니다. 저를 도와주소서.” 늘 이런 자세로 삽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하나님이 없는 자들의 특징이 뭡니까? 대단히 교만하다는 겁니다. 자기를 대단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성경을, 교회를, 예수 믿는 성도들을 시시하게 여깁니다. 교만으로 자기 자신을 무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도는 자기의 부족함을 철저히 인식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