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2015/06/28) - 산상복음 설교(7)
온유한 자의 복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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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애통해 합니다. 애통해 하는 자가 온유해 집니다. 팔복은 아무렇게나 이리 저리 흩어 놓은게 아닙니다. 순서가 분명합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애통해 하고, 애통해 해야 온유해 집니다. 오늘도 분명히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을 다른 말로 “온유한 자는 땅을 유업으로 받는다” “온유한 자는 땅을 정복한다” “온유한 자가 돈 번다” 라는 말입니다.
이 “온유”도 심령이 가난한 것과 애통한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에게는 맞지 않습니다. 세상의 이론과는 너무나 달라서 역설적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려면 심령이 가난하면 안 되고, 애통해 하면 안 되고, 온유하면 안 됩니다. 세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해야 하고, 이겨야 합니다. 세상은 힘과 세력과 능력과 공격성이 강하게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정복할 욕심이 있어야 되고, 소유해야겠다는 욕심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자기 권리를 주장해야 되고,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에 대해 최선을 다 해 나타내야 합니다. “너의 세력과 능력과 계획을 나타내면 나타낼 수록 성공한다” 이게 세상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뭐라고 합니다.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라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세상과 다릅니다. 기독교는 신비입니다. 기독교는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시작부터 기독교는 세상과 다릅니다. 기독교인의 삶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기독교인과 세상은 삶의 본질이 다릅니다. 기독교인은 새 사람이요, 새 피조물입니다. 기독교인은 전혀 다른 나라에 속해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과 다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수수께끼 같은 존재입니다.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성경적인 신앙대로 할 것 같으면, 저와 여러분들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신비로운 존재로 보여야 합니다.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 보여야 합니다. 초대교회 때는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신비롭고, 수수께끼 같은 존재들로 비쳐졌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이 산상복음을 말씀 하실 때에 유대인들은 큰 쇼크를 받았을 것입니다. 유대인은 축복관에 있어서 물질적인 축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천국에 대한 생각도 큰 군사적인 힘이 있는 천국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는 그들을 전쟁의 승리로 이끌게 하고, 강대국의 압제로부터 해방되고, 모세와 여호수아와 다윗과 같은 전쟁을 했다하면 무족건 승리하고 주위의 모든 나라들을 지배하는 강한 나라를 만들어줄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 반대로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물질적인 축복관을 가지고 있고, 무족건 강해야 하고, 힘이 있어야 하고, 남을 힘으로 지배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아니야, 아니야, 세상적인 삶은 진리의 길이 아니야, 무족건 강해야만 세상을 정복하고 땅을 차지하는 게 아니야, 그건 진리가 아니야!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하고 정복하는 거야!” 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때나 지금이나 이렇게 살면 인기가 없습니다. 세상은 멸시합니다. 무시합니다. 어떤 청년이 취직하기 위해 면접을 보면서 ‘나는 심령이 가난합니다. 나는 늘 애통합니다. 나는 온유합니다, 나는 의에 주리고 목마릅니다.’ 이러면 면접에서 떨어집니다. 인정을 못 받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영과 심령이 늘 이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듯 나도 모르게 오늘날 우리의 신앙도, 교회도, 유대주의적인 물질관, 세상적인 물질관에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남 보다 강해야 되고, 남 보다 힘이 더 있어야 된다.’ 라는 논리가 앞서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라는 말이 인기가 없습니다.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오늘 제가 하는 이 설교도 별로 재미가 없고 인기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에게 팔복은 인기 있는 말씀이 아니고, 신비로운 말씀이 아닙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을 향하여 이 팔복 설교는 설교하기도 힘들고 듣기도 힘든 설교일지 모릅니다. 교회 안에 이 팔복과 산상복음 같은 설교가 없어진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오늘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남 보다 앞서야 하는 세상인데, 남들을 누르고 이겨야 하는 세상인데, 물질관으로 똘똘 뭉쳐 무장해도 살기 힘든 세상인데, 돈만 많이 있으면 되는 거고, 힘이 있으면 되는 거지, 세상과 맞지 않는 소리를 할 필요가 뭐 있냐? 요즘 같은 세상에 ‘심령이 가난하면 안 된다. 애통하면 안 되고, 온유하면 바보 취급당한다. 그러므로 이런 마음들은 속으로 숨기고 겉으로는 냉냉하고 차갑게 보여야 하고, 힘 있는 것 처럼 보여야 하고, 목에 힘 주고, 어깨에 힘 주고, 당당해야 하고, 기가 살아야 하고, 고개 숙일 필요가 없고, 야꾸 죽을 필요가 없고, 힘없고 가난한 모습을 보여 줄 필요가 없고, 오히려 비까번쩍 있어 보여야 하고, 부자처럼 힘 있는 것처럼 보여야 된다.’
이게 오늘날의 세상의 모습 아닙니까? 그래서 교회도 그렇게 해야 되는 줄 알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성도도 세상을 그렇게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교회는 교회이고, 세상은 세상이고, 신앙생활은 교회에서나 하는 거고 교회 문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세상의 사고를 가지고 똑같이 살아야 되는 줄 압니다.
그런데 그건 아닙니다. 아닌 것은 아닌 겁니다.
만고의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정복한다” 는 선언은 만고의 진리요,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비현실적인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루어지지 않을 이상적인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이상주의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 행한대로 반드시 열매를 거두게 하는 오늘의 종교요, 내일의 종교요, 영원히 사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염려하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면 바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잘사는 길을 찾아 헤매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면 그렇게 살아 볼려고 생각이라도 해 보고, 노력이라도 해 봐야 되는 것입니다. 해 보지도 않고, 생각도 안 해 보니까 안 된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공중 나는 새를 보라” 그러면 공중 나는 새를 보고, “들의 백합화를 보라” 그러면 들의 백합화를 봐야지..... 들의 백합화가 없으며 들꽃이라도 바라보면서 생각이라도 한번 해 봐야지.........,
그러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할 필요가 뭐 있나? 들꽃도 하나님이 저렇게 입히시지 않느냐?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한번 생각이라도 해봐야지.........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 더러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그렇게 된다고 했고, 겨자씨 하나가 땅에 떨어져 그것이 자라서 나물이 되고, 나무가 되고, 더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고, 지나가는 나그네가 쉬어 간다고 했는데, 그러면서 겨자씨가 없으면 참 깨 한 알이라도 들고 자세히 들여다 보면서, ‘이것이 땅에 심어지면 크게 자라서 수많은 씨앗을 맺는구나’ 하면서 ‘나도 이런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져야지’ ‘나도 참깨 같은 믿음을 가져야지’ 이러면서......... 깊히 생각하면서 은혜를 사모하는게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팔복에 있는 말씀들이 내가 깊이 있게 생각하면서 그렇게 해 보려고 애를 써야 하는 복들입니다. 그냥 듣고 흘려버리는 복이 아닙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 라고 하면 온유해서 정말 복된 자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살아 보려고 애를 써 보는 겁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축복해 주신다.’ 그러면 아직 복이 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복을 받은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 그러면 이미 복이 임한 줄로 믿고 온유하게 살려고 애를 써는 겁니다. 할렐루야!
“온유”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prau?"(4239, 프라위스)입니다. 이중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자세이고, 또 하나는 사람을 향한 자세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향한 자세는 사랑과 순종과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를 잘 받아 드리는 것, 어떠한 일이든지 분개하거나 불평하지 않으며 삶이 가져다 주는 모든 일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하나님의 방법이 항상 최선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사람을 향한 자세입니다. 부드러움입니다. 겸손입니다. 낮추는 자세입니다. 잘난체하면 안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은 순종의 자세로 바뀌는 것입니다. 자기의 고집을 버리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이 “온유”라는 단어가 의미를 잃어 버린지 오래입니다. 현대인들의 귀에는 이 단어가 ‘연약한 것, 무기력한 것, 우유부단한 것, 줏대 없는 것, 힘이 하나도 없는 것, 비굴하며 불의에 굴복하는 것, 스스로 일어 설 수 없는 것, 다른 사람을 위해 힘을 설 수 없는 것 등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는 이 단어가 원래 가지고 있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 “온유”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원래의 의미는 대단하게 위대한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이며, 전적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온유의 영이 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온유는 성령으로부터 오는 능력입니다.
“온유”는 사람이 태생적으로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분명한 것은 ‘온유’는 태생적으로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오는 게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기질적으로 온유한 자가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온유’는 성령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팔복 안에 들어 있는 “온유의 복”은 세상에서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태어날 때 기질적으로 가지고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기질적으로 온유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팔복 안에 들어 있는 ‘온유’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이 순진하다거나, 친절하다거나, 순하다거나, 성질이 온순하다거나 조용한 성격을 가진 자가 온유한 자가 아닙니다. 남에게 거칠게 행동하지 않는다고, 말을 거칠게 하지 않는다고, 깍쟁이 처럼 하지 못하고, 자기것을 악착같이 찾아 먹지 못하고 잘 빼앗기는 사람을 온유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앞장 서지 못하고 뒤에 서서 머뭇머뭇 거리는 사람들을 온유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속 마음을 잘 들어내 놓지 않고 숨기고 사는 사람을 온유하다 하지 않습니다.
“온유”는 위대한 능력입니다. 온유는 하나님이 주신 큰 권세입니다. 온유는 위대한 진리의 수호자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진리를 굳게 믿는 까닭에 진리를 위해 목숨까지도 버리는 사람입니다. 온유는 비급하지 않습니다. 온유는 자기만 살려고 위기 앞에 살짝 빠져나가는 비급자가 아닙니다. 순교자들이 온유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결단코 약하지 않았습니다. 강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온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말씀만 붙잡고, 약속을 믿고 가나안땅으로 이주해 가는 그가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브라함이 약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강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온유했습니다. 이삭이 온유했습니다. 이삭이 흉년이 들어 불레셋 사람들이 사는 땅 ‘그랄’ 땅에 들어가 살 때에 그 해에 농사를 지어 거부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그랄 사람들이 시기가 생겨 이삭의 종들이 우물을 파면 빼앗아 가고, 우물을 파면 빼앗아 갑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불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그 땅에서 쫓아냅니다. 그래도 이삭은 불레셋 사람들과 다투지 않습니다. 순순히 그 땅에서 물러납니다. 이게 온유입니다. 이삭이 힘이 없어서 그들과 싸우지 않은 게 아닙니다. 그랄 사람들이 오히려 이삭을 두려워합니다. 이삭이 왜 순순히 물러났습니까?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과 싸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자들과는 혈기 부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온유는 하나님이 없는 자들과는 다투지 않습니다. 내가 힘이 없어서 온유한 게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없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상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기 때문에 온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도 온유했습니다. 특히 모세는 지구상에 모든 사람보다 가장 온유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하고, 심지어 대적해서 돌로 치려고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는 그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자가 온유한 자입니다.
다윗도 온유했습니다. 사울왕이 자기를 죽이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사용했지만, 대항하여 싸우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에 온유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을 두 번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이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도 온유했습니다. 스데반도 온유했습니다. 사도바울도 온유했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얼마나 온유했습니까? 예수님은 직접 자기 스스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11:29) 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약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강했습니다. 강했지만 온유했습니다. 온유는 진리를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온유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 믿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진리를 포기하고 뒤로 물러서는 게 온유가 아닙니다. 믿음을 포기하고 세상에 혼합되어 버리는게 온유가 아닙니다. 온유는 성도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에 그 힘을 사용하지 않고 포기하는 것이지 진리를 버리고 굴복하는 게 온유가 아닙니다.
이 온유는 거듭나지 못한 세상 사람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온유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속세를 떠나 산에 들어가 중이 된 사람들은 자기의 힘으로 온유해 보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온유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다 쉽게 온유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온유는 성령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성품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우리 속에 만들이지는 성격이 온유입니다. 온유는 성령이 직접 만드신 열매입니다. 온유는 성령에 의해서 만들어진 아홉가지 열매 중에 하나입니다(갈5:23).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받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를 주시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믿는 순간 성령이 내 속에 들어와 계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내 속에 들어와 계시는 성령이 나를 온유한 성격의 소유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온유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나는 온유해질 수 없다’ 라고 말하면 안됩니다.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온유해질 수 없다.’ 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속에 성령이 와 계시는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집이기 때문에 우리는 온유한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온유한 자는 함부로 화를 내지 않습니다. 팔복에 속해 있는 “온유”는 “적절할 때에 화를 내지만 적절하지 않을 때는 절대로 화를 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화를 내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매매하고, 돈 바꾸고, 비둘기 팔고,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사람들을 향하여 화를 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화 있을 진저!” 라고 화를 내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엡4장 26절에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화를 내어라 그러나 죄는 짓지 말아라.” 라는 말씀입니다. 화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무기입니다. 그러나 화를 바르게 사용하면 무한한 유익을 줍니다. 반대로 바르게 사용하지 않을 때는 엄청난 피해를 줍니다. 화가 우리 자신을 위하여 생길 때 그것은 항상 잘못된 것입니다. 화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생길 때 그것은 신성한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화가 생기는 것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소외 되었다고, 자기 자신이 손해를 본다고 화를 내는 것은 죄입니다. 교회를 위해 화를 내는 것 같고, 하나님을 위해 화를 내는 것 같지만 실상은 자기 자신이 섭섭해서, 자기 자신이 안 알아 주는 것 같아서,. 자기 자신이 소외 되는 것 같아서 화를 내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내는 화입니다. 온유한 자도 화를 냅니다. 그러나 자기를 위해서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화를 내어도 죄를 짓지 않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경멸, 모욕, 상처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냉랭한 가슴으로 정통주의만 고집하며 손마른 병자를 고치는 것보다 안식일의 율법의 세세한 부분을 더 귀하게 여기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보면서 그는 분노를 나타내었습니다.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동전을 바꾸고, 비둘기를 팔고, 성전 뜰에서 가난한 순례자들로부터 부당한 수익을 취하는 것을 보았을 때 예수님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며 폭발했습니다. 온유한 자는 화를 냅니다. 그러나 자기를 위해서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온유는 성령으로부터 오는 기질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온유한 자에게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라고 했습니다. 시편 37편 11절에 보면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자는 두 가지의 복을 받습니다. 하나는 땅을 차지합니다. 또 하나는 풍부한 화평으로 즐깁니다.
먼저 “땅을 차지한다.” 라는 말은 “땅을 정복한다.” 라는 말입니다. 땅은 사람을 통해서 정복합니다. 사람을 정복하지 못하고, 사람을 얻지 못하면 땅은 정복 당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잃어 버리면 땅도 잃어버립니다. 돈도 하나님이 직접 하늘에서 내려주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통해서 사람이 가져다 줍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은 “돈을 번다” 라는 말도 됩니다. 땅을 차지하고 돈을 벌려면 사람을 정복해야 합니다. 사람을 정복하는 길은 온유해야 합니다. 온유를 다른 말로 “부드러운 카리스마”입니다. 힘이 없고 연약해 지는 게 온유가 아닙니다. 포기 하고 뒤로 물러나는 게 온유가 아닙니다. 온유는 부드러운 힘입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는 사람을 정복합니다. 그래서 온유는 부드러운 능력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의 진정한 능력은 온유입니다. 온유함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20:25-27)
여러분!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고, 온유한 자가 기업을 넓히고, 온유한 자가 돈을 벌고, 온유한 자가 사람을 얻습니다. 온유한 자가 세상에서 성공합니다. ‘나폴레옹’(B. Napoleon 1769 ~ 1821)은 말년에 대서양의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당해서 죽음을 앞두고 “나는 칼과 창으로 세계를 점령하려 했지만 버림받아 이 외로운 섬으로 유배해 왔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전세계를 영원히 다스린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또 한 가지의 축복은 “풍부한 화평”입니다. 온유한 자는 풍부한 화평으로 즐깁니다.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탁하며 자기의 모든 길을 하나님께 맡긴 사람은 이 세상이 절대 줄 수 없는, 그리고 이 세상이 절대로 빼앗아 갈 수 없는 평화를 소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온유한 그리스도인은 풍부한 화평을 가지고 삽니다. 진정한 행복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삽니다. 진정한 행복의 샘물을 마시며 삽니다. 진정한 행복의 궁정을 거닐며 삽니다.
사람은 성품이 좋아야 합니다. 성품은 그 사람의 앞날을 좌우합니다. 온유는 하나님이 주신 성품입니다. 온유한 자가 하나님께 큰 복을 받습니다. 온유한 자는 수명이 길고,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땅을 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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