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2015/07/12) - 산상복음 설교(9)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1)
마태복음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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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진정으로 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오늘 주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이 무엇인지 알고 이것이 나에게 임하면 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진정한 행복도 이 ‘의에 주리고 목마르면’ 행복과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를 것이라“ 고 말씀합니다. ’배부르다‘는 말은 만족한다는 말입니다. 행복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부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이 복이 여러분의 것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경험 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책을 읽던지, 누구에게 말을 듣던지 내가 실재적으로 경험한 것에 대해 읽거나 듣는 것은 굉장히 가슴에 다가오고 느낌이 강합니다. 예를 들어 고통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일상생활에서 어려움이나 질병 등 여러 가지 고통을 심하게 겪은 사람들의 대화나 글을 읽을 때는 그와 같은 어려움을 심하게 겪은 사람들은 그런 어려움을 겪지 않은 사람들이 듣는 것보다 훨씬 더 강도가 강하게 느끼고, 내가 겪는 것처럼 아픔을 느낍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도 실질적으로 사랑을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과 정말 사랑 때문에 가슴 아파해 본 경험이 있고 사랑 때문에 힘들어 했던 사람이 느끼는 사랑의 감정은 전혀 다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열 살 되는 아이에게, 스무 살 되는 청년에게, 중년의 나이에 접어 든 사람에게,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선 사람에게 느끼는 것이 각각 다릅니다. 이렇게 경험을 말하는 단어들은 이렇게 그 처지와 환경에 따라 느끼는 감정이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갈급함을 느끼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이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에 살았던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과 오늘날 풍요로운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이 느끼는 감정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의 일반 노동자들이 받는 하루의 임금이 80원이었습니다. 이 80원짜리 일 자리 마져도 잘 없었습니다. 매일 매일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너무나 차이가 있습니다. 80원 짜리 일자리도 가끔 한번씩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경제형편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 그 자체에 젖어 사는 겁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며 사는 겁니다.
목마름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쏟아져 나오는 오늘 현대인들에게 목마름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은 오늘의 아프리카의 우간다나 에디오피아 처럼 물을 구하기 위해 머리에 항아리를 이고, 어깨에 가죽부대를 메고, 하루 종일 걸어가서 물을 구해오는 시대입니다. 아무도 물을 풍성하게 사용하며 마음대로 마실 수 있는 그런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은 시내와 우물 밖에 없습니다. 엄청난 거리를 물 없이 걸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우물을 발견한다든가, 물이 흐르는 곳을 발견한다는 것은 감동 그 자체요, 죽고 사는 생명과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래 바람이 몰아치고, 그 모래들이 호흡을 할 때마다 입 속으로 들어가고, 그런 환경에서 물조차 마음대로 구할 수 없는 광야에서 그들이 오직 바라고 원하는 소망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루의 임금 80원짜리 일거리도 제대로 구하지 못하고 굶주려야 하고, 물 마져도 마음대로 마셔보지 못하는 환경에서 오직 바라는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오직 배고픔이 해결되고.... 목마름이 해결되는 것이 소원 중에 소원일 것입니다.
오늘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라는 말은 배고픈 사람이 음식을 찾는 것처럼, 목마른 자가 물을 찾는 것처럼 의를 찾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굶어 죽어 가는 사람이 음식을 갈구하는 것처럼, 목말라 죽어 가는 사람이 물을 갈망하는 것처럼, 너희들은 의를 추구하는가? 의에 목말라 하고 있는가?”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의 도전이요, 요구입니다.
(시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63: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 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사55: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구약시대에는 물도 돈 주고 사 먹어야 했고, 물이 너무 귀하기 때문에 물 대신 포도주와 젖을 사 먹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의에 갈급해 하고, 하나님을 갈급해 하고, 영생을 갈급해 하고, 주님의 위로가 갈급한 사람들”은 주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공짜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네 속에 진정으로 주님을 갈급해 하는가?” 입니다. ”진정으로 영생을 갈급해 하는가?“입니다. 문제는 뭡니까? 갈급함입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갈급해 합니까?
여러분!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필요한 것을 갈급해 해 보았습니까? 돈이 없으면, 정말 가난하면 정말 하나님 앞에 떼를 쓰면서 부르짖으면서 갈급해 보았습니까? 갈급해 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6:31-33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의”보다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복이 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해야지 “복에 주리고 목마르지 말아라”는 말입니다. “돈에 먼저 주리고 목 말라 하지 마라.” “행복에 주리고 목마르지 말아라” 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보이는 복이나 행복에 먼저 목말라 하지 말라...... !!!” ‘세상의 행복과 복은 의를 먼저 구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있는 고통은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그 고통을 해결하려면 반드시 그 고통의 원인을 찾아 해결하면 됩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그 고통 자체를 없애려고 애를 씁니다. 환자가 무서운 병에 걸려 통증이 심한데, 통증의 원인을 찾아 해결해야 되는데, 계속 그 통증만 없게 하려고 진통제만 사용하면 결국 목숨도 위태로워지고, 병도 고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술집으로 가고, 나이트클럽으로 가고, 쾌락으로 빠져 들어 갑니다. 돈만 있으면 다 된다고 생각하고 온갖 방법으로 돈을 먼저 찾습니다. 그것으로 고통이 해결 되는 줄 압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는 복 자체에 목말라 하면서 복을 찾아 헤매면 안 됩니다. 행복을 위해서 행복 자체를 목말라 하며, 행복을 찾아 헤매면 안 됩니다. 행복과 복에 주리고 목말라 하면서 복을 좇아 다니는 사람은 복된 자가 될 수 없습니다.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돈을 목말라 하면서 돈을 좇아 다니는 사람은 돈을 벌지 못합니다. 세상 것에 목 말라 하지 마세요. 행복 자체에 목 말라하지 마세요. 잠깐 부하게 될 수는 있습니다. 마약, 몰핀으로 잠깐 고통을 없앨 수는 있습니다. 완전히 고통, 허무함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행복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십시오.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가 모든 복을 차지합니다. 우리가 목 말라야 할 것은 “의”입니다.
은혜 좀 받아 보겠다고 이 교회 저 교회, 이 기도원, 저 기도원을 방황하면서 기웃거리지 마세요. 복 받아 보겠다고 여기 기웃, 저기 기웃, 안수 받아 보겠다고 이상한 곳으로 기웃거리고 다니지 마세요. 그러다가 이단에게 걸려들고, 사단에게 붙잡힙니다. 체험해 보겠다고 별의별 온갖 이상한 곳으로 다니면서 안수 받고, 성령 세례 받겠다고 온갖 이상한 집회 참석하고,,,, 대체로 이런 사람들이 이단에 넘어가고, 귀신에 붙잡혀 살아가고, 신앙이 변질됩니다.
우리 먼저 의에 주리고 목 말라야 합니다. 우리가 탐구하고, 구하고, 주리고 목말라야 할 것은 의입니다. 할렐루야!
찬양 ----> 마음이 상한 자를 (F, 153)
1.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는 주님, 하늘 아버지 날 주관 하소서.
주의 길로 인도하사 자유케 하소서. 새 일을 행하사 부흥케 하소서.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성령의 기름 부으소서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내 잔을 채워 주소서.
2.성령으로 채우사 주 보게 하소서, 주의 임재 속에 은혜 알게 하소서.
주의 뜻대로 살아 가리 세상 끝 날까지, 나를 빚으시고 새 날 열어 주소서.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성령의 기름 부으소서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내 잔을 채워 주소서.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왜 실패합니까? 그 실패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의 일에 배고파 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성공에 목말라 하고, 육의 목마름이 우리를 실패하게 합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육적으로 더 잘 살아보려고 교회를 끊고 세상으로 나간 사람은 마귀의 덫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먼저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가 복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목마름은 다 있습니다. 선하게 살고 싶은 마음, 착하게 살고 싶은 마음, 교회에 나오고 싶은 마음, 기도하고 싶은 마음, 좋은 일 하고 싶은 마음, 약간의 이런 마음들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목마름은 의에 주리고 목마름은 아닙니다. 나도 새벽기도 좀 나가 봤으면, 교회를 위해서 봉사를 좀 해 봤으면, 주일학교 교사를 좀 해 봤으면, 나도 헌금을 좀 많이 해 봤으면, 이런 마음은 누구나 다 가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일 뿐이지.....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목마름은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음식을 요구하듯이, 목이 말라 물을 구하는 것처럼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 ‘의’가 뭐냐 하는 겁니다. 여기서 의는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의롭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의는 단순한 도덕적인 의가 아니고, 단순한 옳은 삶이 아니고, 그것보다 훨씬 더 차원 높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대한 욕구가 강한 것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 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내 힘으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뿐인 것, 생각뿐인 것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게 아닙니다. 내 노력으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뿐이라는 겁니다. 생각 뿐이라는 겁니다. 이게 인간의 고민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입장에서는 심령이 가난할 수 밖에 없고, 애통해 할 수 밖에 없고, 온유할 수 밖에 없고, 의에 주리고 목마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목말라하면서 애통해 할 때 주님이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성령이 역사 하셔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져 가고, 우리에게 배부름으로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빗나가지 마십시다. 우리는 사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 자격은 안 되지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져보고 싶어서 간절함, 사모함, 하나님과의 관계의 목마름이 있을 때, 하나님은 함께해 주시고, 우리를 배부르게 만족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더 가까이 갈려고, 더 가까운 관계에 들어가 볼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찬양 -----> 주께 가까이(A,285)
“주께 가까이 날 이끄소서 간절히 주님만을 원합니다.
채워 주소서 주의 사랑을 진정한 찬양 드릴 수 있도록
주께 가까이 날 이끄소서 간절히 주님만을 원합니다.
채워 주소서 주의 사랑을 진정한 찬양 드릴 수 있도록
목마른 나의 영혼 주를 부르니 나의 맘 만져 주소서
주님만을 원합니다. 더 원합니다. 나의 맘 만져 주소서.”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이것은 늘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면서 사모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놓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기도를 끊이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은혜 받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왜 좋습니까? 교회에 나오면 왜 좋습니까? 사모하는 심령이 생기고,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굶주림과 목마름에는 육적인 굶주림과 목마름이 있고 영적인 굶주림과 목마름이 있습니다.
사람은 육신으로만 되어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은 세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① 영 ② 혼 ③ 육 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영과 혼과 육이 다 굶주리고 목마른 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굶주림과 목마름을 채우느냐에 따라 건강하냐, 병들었느냐를 진단하는 것입니다.
① 영 ---> 영이 굶주리고 목마른 것이 ‘의에 주리고 목 마른 것’입니다. 영이 굶주리고 갈증을 느끼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영이 굶주리고 목마르면 기도하고 싶고, 말씀을 사모하게 되고, 하나님을 더 그리워하고, 영적인 부분이 더 애민해집니다. 의에 주리고 목 말라하게 됩니다. 육의 것을 좇아가던 삶에서 회개하고 돌이킵니다. 기도의 제목과 삶의 목적이 바꾸어집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기를 사모합니다. 의를 위해서 힘쓰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임을 믿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삶의 목적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삶의 목적이 하나님 나라에 걸고 삽니다. 그래서 공부를 해도 하나님을 위해서, 돈을 벌어도 하나님을 위해서, 결혼을 해도 하나님을 위해서, 자식을 낳고 키우고 공부시키고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② 혼 ---> 혼도 굶주림과 갈증을 느낍니다. 지식의 굶주림과 갈증입니다. 무언가 더 배우고자하는 갈증입니다. 학문에 대한 갈증입니다. 윤리에 대한 갈증입니다. 차원이 높은 문화생활에 대한 갈증입니다. 교양에 대한 갈증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외국의 언어를 배우기를 원하고, 공부를 더 하고 싶고, 꽃꽂이를 배우고 싶고, 붓글씨를 배우고 싶고, 컴퓨터를 배우고 싶고............ 이런 것으로 정신과 마음의 공허함을 채우고 싶습니다. 무엇이든 남에게 뒤지고 싶지 않아서 배움에 대한 갈증, 문화생활에 대한 갈증......... 이런 것들이 혼(정신, 마음)의 갈증입니다.
③ 육 ---> 육신의 굶주림, 갈증이 있습니다. 육신의 굶주림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영과 혼과 육의 갈증을 무엇으로 채우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무엇으로 채우느냐에 따라 병이 들기도 하고 건강하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육신이 건강해 지려면, 좋은 음식, 오염되지 않은 음식을 먹으면 됩니다. 사람은 영과 혼과 육신이 하나로 되어 있기 때문에 밖으로부터 오염된 음식, 오염된 사상, 생각, 학문, 오염된 악한 영들이 들어 옴으로 사람이 병이 드는 것입니다. 오늘날 육신의 병들이 사람이 먹지 말아야 하는 것들을 먹어서 생기는 병들이 많습니다.
혼(마음, 정신)도 잘못된 생각, 잘못된 사상, 타락된 문화를 접하면 병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마음이 공허하거나, 허전하면 문화생활 즐긴다고 하면서 잘못된 곳으로 가는 겁니다. 그리고는 정신적으로, 마음적으로 타락된 곳으로 빠지는 겁니다. 빠징꼬에 빠지고, 나이트클럽으로 빠지고, 춤바람으로 빠지고, 온갖 퇴폐, 타락의 문화생활로 빠지는 겁니다. 이것이 사람을 병들 게 하고, 죽이는 겁니다.
영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된 영에 붙잡히거나, 악한 영, 귀신, 사탄에 붙잡혀 사는 것입니다. 미신, 우상, 이런데 붙잡히면 망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흥하는 것 같고, 잘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다 망하는 것입니다. 특히 공사주의 영은 가장 악하고 무서운 영입니다. 김준곤 목사님의 말씀을 빌리면 공산주의에 물든 자는 다시는 회복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공산주의의 악한 영이 배후에서 조종하는 겁니다. 그래서 공산주의는 가장 강력한 “적그리스도”입니다. 공산주의에 붙어 있는 좌경세력들은 모두가 적그리스도의 세력들이요, 협력자들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오염되지 않은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오염되지 않은 사상과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문화생활 한다고 다 건전한 문화생활이 아닙니다. 문화라고 해서 다 좋은 문화만 있는 게 아닙니다. 교육 이라고 다 좋은 교육만 있는 게 아닙니다. 정신도 좋은 정신, 좋은 생각만 있는 게 아닙니다. 영도 좋은 영만 있는 게 아닙니다. 나쁜 영, 악한 영도 있습니다. 어느 영에 붙잡히느냐, 어떤 사상 어떤 정신에 붙잡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음식도 어떤 음식을 먹느냐에 따라서 건강이 좋아지고 나빠지는 겁니다. 술, 담배, 보신탕 먹는다고 건강한 게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먼저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버리는 자는 잘 될 수 없습니다. 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입니다. 모든 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면 배부르게 됩니다. 진정한 배부름은 의에 주리고 목마름에서 시작됩니다. 진정한 만족, 진정한 축복, 진정한 행복, 진정한 배부름은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자에게 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목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주님의 약속입니다. 할렐루야! 이 약속의 축복이 여러분 것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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