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묵상⑫>
12. 내가 레위입니다.
막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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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북 전쟁 때의 일이다. 북군 병사들이 전우의 시체를 메고 매장할 곳을 찾다가 천주교의 한 신부에게 와서는 교회의 묘지에 묻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 죽은 병사가 영세를 받지 않은 사람이라 거절당하자 우선 교회 묘지 밖에 가매장했다가 후에 찾아가겠노라고 부탁했다. 얼마 후 그들이 다시 찾아와 그 시체를 파가려고 보니 그 묘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래서 신부를 찾아가 물었더니, 신부는 그날 밤 밤새도록 고민하다가 다음날 교회 묘지 울타리를 가매장한 묘 밖으로 넓게 둘러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병사의 시체는 교회 묘지 안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우리는 본래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자격이 없었다. 교회에 속해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본래 그리스도 밖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었다.
이것을 에베소서 2장 11절 이하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 때”와 “이제”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다르다. “그 때”와 “이제”는 천국과 지옥 차이만큼이나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느냐, 이것만큼 차이나는 것이 없고, 중요한 것이 없다. 그래서 “생각하라.”고 한다. “그 때”와 “이제”를 늘 생각하라는 것이다. 힘들 때도 생각하고, 힘들 때도 생각하고, 슬플 때도 생각하고, 고난당할 때도 생각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본래 자격이 없는 자였다. 지금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실상은 자격이 없는 자였다. 여기서 우리는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은혜를 발견하게 된다. 은혜를 발견하지 못하면 깨닫지를 못한다. 은혜를 발견해야 한다. 은혜를 모르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은혜가 없으니, 감사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감사가 없으면 평강이 없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주는 평안은 은혜와 감사가 나란히 와야 한다. “그 때”와 “이제”를 깨닫는 은혜가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고 믿는 자들은 예수님이 직접 부르셔서 예수님의 영역 안에 있게 해 주셨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한다. 구원 받은 자들은 예수님의 울타리 안에 있는 자들이다. “(시16:5-6)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우리는 주님이 둘러 주신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죄인을 찾아오시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자격 없는 세리인 레위를 찾아오셔서 부르시는 모습이다.
예수님은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기 위해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부르신 후에 이번에는 세관에 앉아서 세금을 거두고 있는 레위를 부르셨다. “나를 따르라.” 레위는 즉시 따랐다.
그 날 레위는 예수님께 부름 받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격하고 감사해서 예수님을 특별히 초대해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아마, 레위는 이제 예수를 따르게 되어서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을 작별해야 함으로 송별의 뜻이 더 컸을 것이다. 선지자로서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르기로 결심하고 송별하는 것과 같다(왕상19:21).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불러 주신 것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그리스도를 따르는 기념으로서의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이 때 때마침 예수님이 제자들과 더불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보고 비판하는 “바리새인들의 서기관들”이 있었다. “바리새인들의 서기관”이라는 말은 바리새인들 중에 율법을 연구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을 일명 서기관 또는 율법학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이 엿보고 있다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비판했다. 엿보거나 탐색하는 자들은 말씀을 듣지 않는다. 비판하기 위한 꼬투리만을 찾는다. 지금도 설교를 듣는 자들 중에는 탐색하는 자들도 있다. 비판하기 위한 꼬투리만 찾는다. 이들은 설교를 듣지 않는다. 이들이 무슨 은혜를 받겠는가?
이것을 들은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고 하신다.
이것은 대단한 진리이다. 예수님은 우주 만물에서 사탄의 세계와 하나님의 세계로 나누어 보았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세계와 사탄의 세계로 나누어 보았다. 사탄의 세계에서는 항상 하나님의 세계를 오염시켜 사탄세계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언젠가는 이 우주 만물 모두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가 온다. “(고전15: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사람도 건강한 자(의인)와 병든 자(죄인)로 보았다. 의사가 필요한 자와 의사가 필요치 않는 자로 보았다. 여기서 치료하시는 의사는 예수님 자신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의인들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자들을 비꼬고 있다. 여기서 병든 자는 누군가? ‘내가 아프다. 내가 병이 있다.’라고 인정하여 스스로 의사를 찾고자 하는 자들이다. 환자가 의사를 찾는 것은 ‘내가 아프다. 내가 환자이다. 나는 병이 있다’ 라는 인식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아픈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의사를 찾지 않는다. 그러면 예수님이 진짜 의인이라고 인정하시는 자들은 누군가? 자기가 환자임을 인식하고 의사를 찾는 자들이 의인인 것이다. 이들에게 예수는 찾아가시는 것이다.
내구 누구인가? 자기를 아는 자는 의사이신 예수님을 찾게 된다. 그런 내가 바로 레위이다. 이 세상에서 레위 같은 자가 되어야 예수를 필요로 한다. 내가 누구인가? 예수를 필요로 하는 죄인인가? 예수가 필요로 하지 않는 의인인가? 의사가 필요한 환자인가? 아니면 의사가 필요 없는 건강하다고 자부하는 자인가? 우리는 다 레위여야 한다.
13절부터 한 절씩 읽으면서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자.
(13절)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예수님께서 왜 “다시 바닷가에” 나가셨는가? 여기서 “다시”는 앞에서 바닷가에 거니시다가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만나시고 제자로 부르신 것을 말한다. 그리고 또 다시 바닷가를 거니시다가 사람들을 만나 가르치신다. 그 당시 랍비들은 사람들과 함께 걸으면서 진리를 가르치기도 했다. 아마 예수님은 바닷가를 거니시며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바닷가를 거니셨을까?
1)구원 얻을 자를 찾기 위해서이다. - 말씀을 전해 보면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말씀을 받는 자가 있다. 이는 누구나 말씀을 전해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일어보면, 바울이 빌립보에서 루디아라는 여자를 만난다. 루디아라는 여자는 바울을 처음 만났다. 그런데도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받아 드렸다. “(행16: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2)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 - 바닷가라고 하니까 그냥 일반적인 바닷가가 아니다. 모래알이 반짝이고, 주위 환경이 아름다워 산책하는 조용한 바닷가가 아니다. 어부들이 그물을 깊고, 말리는 곳이다. 어부들이 잡은 고기를 판매하는 곳이다. 많은 물자가 왔다 갔다 하는 곳이다. 부둣가일 것이다. 세관이 있는 곳이라면, 상업이 번창하는 곳이다. 예수님은 일꾼을 찾으신다. 제자를 찾으신다.
우리가 축구 경기나, 야구 경기를 보면 필드에서 뛰는 사람을 선수라고 하고, 관중석에 앉아 구경하는 사람을 관중이라고 부른다. 돈을 내고 관중석에 앉아서 응원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욕을 하기도 한다. 아유를 퍼붓기도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 이 모양이다. 교회를 보면 몇 몇 사람, 정해진 몇 몇 사람만 뛴다. 섬긴다. 그러나 대부분은 관중석에 앉아 잘한다. 못한다 하면서 비판하거나, 야유를 퍼붓는다. 예수님은 지금도 필드에서 뛰는 선수를 찾으신다. “나를 따르라.” 하시는 것은 제자를 삼기 위해서이다. 성도는 모두 제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왜 많은 무리가 바닷가로 몰려 왔을까?
1) 거기에 예수가 계셨기 때문이다. - 예수가 계신 곳에는 사람들이 미리 알고 몰렸다.
2) 거기에 순수한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재미를 찾는 곳이 아니다. 행복을 찾는 곳이 아니다. 복을 찾는 곳이 아니다. 말씀을 찾는 곳이요, 말씀을 받는 곳이다. 말씀이 내 심령 속에 새겨지면 삶의 재미가 생기고, 행복이 생기고, 복이 들어오게 된다.
3) 거기에 구원의 능력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회인 것이다. 지금 본문의 바닷가가 교회인 것이다. 예수님이 계시고, 순수한 말씀이 있고, 구원의 능력이 있는 곳, 이곳이 교회이다.
14절을 보자.
(14절)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레위는 세리였다. 세리는 유대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다. 세리는 창녀와 같이 취급했다. 세리와 창녀는 유대 사회에서 버림받은 죄인 중에 죄인이었다. 세리는 반역자요, 죄인이기 때문에 거지도 상종하지 않았다. 심지어 나병환자도 멸시했다. 유대 사회는 직업에는 귀천이 없었다. 무슨 직업이든지 하나씩은 반드시 가져야 했다. 직업이 없는 것을 경멸했다. 그래서 무슨 직업이든 귀하게 여겼다. 랍비들은 반드시 직업이 있어야 했다. 사도 바울도 직업이 있었다. 천막을 만들고 고치는 직업이었다. 예수님도 직업이 있었다. 목수였다. 그 당시는 수공업을 가장 귀하게 여겼다. 제자들도 직업이 있었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만은 멸시를 받았다.
세리는 세관에 앉아서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거두어서 로마에 바치는 직업이었다. 그리고 규정보다 더 많이 세금을 거두어서 착복해서 자기 재산을 늘려 갔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사실을 알면서도 세리인 레위를 제자로 불렀다. 후에 ‘레위’라는 이름을 ‘마태’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주셨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혹 레위라고 불렀지만, 자신은 ‘마태’라고 이름을 사용했다. ‘마태’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선물” 이라는 의미이다. 가장 큰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사람이 마태이다. 후에 레위는 신약성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을 기록했다. 그야말로 예수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아 예수를 위해 살았던 사람이다.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 진정한 사람의 모습은 진정한 삶, 진정한 신앙을 가지는 것이다. 오늘 나는 누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으며 살아가는가?
15-16절을 보자.
(15-16절)“(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세리인 레위가 감격과 감사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밥을 같이 먹으면 한 식구가 되는 거다. 친구, 동료가 되는 거다.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기 친구들을 많이 불렀다. 주로 유대사회에서는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낙인찍힌 자들이다. “죄인들”은 주로 율 법을 모르거나 잘 지키지 못하는 자들이다. 유대사회에는 사람들에게 소외되고 인간 취급받지 못하는 멸시받는 자들이다.
“집에 앉아 잡수실 때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함께 앉았으니....”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이것은 의식의 전환이 필요한 일이다. 그 당시의 사고방식으로는 충격적인 일이다. 우리가 예수를 바로 이해하려면 의식의 전환, 나의 관정관념을 깨뜨려야 한다. 예수를, 복음을 내 고정관념, 내 생각의 틀 속에서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
(사55: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마11: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17절을 보자.
(17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예수님이 필요한 자는 병든 자, 죄인들이다. “건강한 자” 그리고 “의인”은 바리새인들을 말한다. 예수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반대로 “병든 자” 또는 “죄인”은 세리나 죄인을 말한다. 예수가 꼭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자들이다. ‘나는 병든 자이기 때문에 의사한테 꼭 가야 봐야 한다. 나는 의사 꼭 필요하다.“ 라고 인식하는 자이다.
기독교가 꼭 필요한 이유, 교회가 꼭 필요한 이유는 병든 자를 건강한 자로 만드는 것,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예수를 만나지 않고는 건강하게 되지 않고, 의인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인사할 때 악수를 한다. 악수가 언제부터 생겼을까? 악수는 원시인들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사냥에는 동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접촉할 때 오른손을 펴 보였다. 오른손에 무기를 들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즉 빈손을 보이는 것은 친구와 동지가 되자는 의사였고, 빈손과 빈손을 서로 잡는 것은 친구가 되었다. 동지가 되었다는 증거이다. 만약에 빈손이 아니고 무언가 들고 있다면 악수도 할 수 없고 친구가 될 수도 없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빈손, 빈 마음이다. 우리는 빈손 들고 십자가 앞에 나가야 한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펴 놀을 때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받는다. 오늘도 우리 세리였던 레위처럼 되자. 그리고 “나를 따르라.” 는 음성에 응답하자. “주여, 내가 레위입니다.”
“♬두 손 들고 찬양합니다. 다시 오실 왕, 여호와께, 오직 주 만이 나를 다스리네. 나 주님 만을 섬기리 허된 마음 버리고 성령이여 내 영혼 충만하게 하소서. 주님만 앞에 내 생명 들리다.♬”(E.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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