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원고/마가복음

23.예수님의 권세를 붙잡은 사람

☆ 주님의 머슴 2021. 12. 9. 22:17

<마가복음 묵상(23)>2021/11/08

23.예수님의 권세를 붙잡은 사람

5:21-24,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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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어떻게 해야 예수님과 그분의 능력을 붙잡을 수 있겠는가? 오늘 본문은 특별히 좌절하고 절망한 사람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본문은 절망적인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예수님께 나아가 그분의 도움을 얻을 수가 있는지 그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예수님과 그분의 능력을 붙잡는 한 가지 방법은 믿음뿐이다. 믿음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아는가?

마가복음 11:22-24에 보면, 한번은 무화과나무 지나가시다가 시장하셔서 먹을 것이 없는가 해서 무화과나무를 쳐다보셨다. 그런데 잎만 무성할 뿐 무화과나무에는 열매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면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 그런데 그 나무가 말라 버리고 말았다. 아침에 제자들이 그 나무 옆을 지나가다가 보니까 그 나무가 뿌리부터 마른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보고 있던 베드로가 선생님, 보십시오.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라고 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 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물론 예수님은 무화과나무가 열매가 있는 척하면서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하게 자랑하고 있는 그 위선과 교만을 책망하시는 것이다. 무화과나무는 잎이 나오기 전에 열매부터 먼저 맺히는데, 잎이 무성하면 열매가 많이 맺혀 있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다. 이것은 무화과의 때도 아닌데 남에게 그럴듯하게 보이려고 열매 있는 척하면서 잎만 무성한 위선, 교만, 자랑을 저주하시는 것이다. 무화과는 유대인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열매 없는 율법주의자, 행함이 없고 교만하고 위선이 가득한 유대인을 향한 저주일 수도 있다. 예수님은 이 무화과나무를 통하여 현장교육으로 제자들에게 믿음과 기도에 대해 가르치고 싶어 하셨던 것이다. 이렇게 기도도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줄로 믿고 확신을 가진 믿음을 강조하시는 것이다.

 

또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 즉 죄인이 구원에 이르는 것도 믿음으로 된다. 갈라디아서 216절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또 히브리서 11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또 히브리서 113절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6절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33-38절을 보면, 믿음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가 있다. 믿음은 견디어 내게 하고 세상을 이기게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요일 5:4에는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는 것이다.

믿음의 힘이 이렇게 강하다.

 

사람이 믿음으로 나올 때 예수님은 항상 깊은 관심을 가지신다. 우리가 복음서를 보면 믿음이 있는 자만 병을 고침받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의 반응을 볼 수 있다. 회당장이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 올때에 예수님은 무조건 그의 집으로 따라 가셨다. 지체하지 않으셨다.

 

믿음은 두려워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믿음은 두려움과 절망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는 모습을 보라.

믿음은 울거나 통곡하지 않는다. -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하나님께 바칠 때, 모세가 느봇산에서 바라만 보고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을 때를 보라.

 

오늘 본문에서도 울고 통곡하고 있는 자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하신다. 믿음은 비웃거나 회의적이지 않다. 믿음 없는 자들은 울고, 비웃는다(38,40). 믿음은 오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순종의 태도 뿐입니다.

 

그런데 확신에 찬 믿음이 승화되면 행동으로 나타난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믿음이 강하게 되려면 행동으로 옮겨져야 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복음의 비밀을 알고 싶으면 성경을 많이 읽고 묵상해야 된다. 기도 많이 하고 싶으면 새벽기도를 나와야 된다. 신앙을 성장시키고 싶으면 섬겨야 된다. 더 잘 믿고 싶으면 교회를 열심히 출석해야 한다. 마음만 잘 믿어 보겠다는 생각만 해서는 안된다. 실천해야 한다. 생각으로만 믿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적극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삶을 살고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필사적으로 예수님을 찾는 태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권세를 붙잡는 것이다.

 

믿음의 바탕 위에 예수님의 권세를 붙잡을 수 있는 4가지 태도가 있다. 오늘 본문의 회당장 야이로의 신앙과 태도를 보면서 한번 생각해 보자.

 

첫째는, 자기 부정적 태도이다. 회당장 야이로는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고 몸소 예수님께 나왔다.

 

야이로는 이스라엘에서는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인 회당장이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66:2)

 

잘난 체하는 사람, 교만한 사람, 자기가 뭔가 대단하다고 믿는 사람, ‘나는 나를 믿는다라고 큰소리치는 사람은 절대 은혜를 못 받는다. 주님 앞에 나오는 자는 자기를 부정해야 한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다. 자기가 병이 있는 환자라고 인정하는 자에게만 의사가 필요하다. 예수님의 우리의 의사이시다. 내가 환자라고 인정하는 자만 예수님을 찾게 된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2:17)

 

둘째는, 겸손한 태도이다.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께 엎드려 많이 간구했다.(22-23)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사람들이 많다. 에워싸 밀정도로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이 보는 그 앞에서 엎드렸다. 그것도 유대인으로서 회당장인데... 정말 겸손한 태도이다. 오늘 사람들은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가? 쥐꼬리 만한 권력이 있어도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고, 낮아지려고 하지 않는다. 목에 기부스를 하고 힘을 준다. 교회 안에서도 조금만 기분 나쁘면 교회를 그만 둔다. 다른 교회로 가버린다. 자기를 조금이라도 안 알아 주면 기분 나빠 한다.

 

- 회당장 야이로는 자신의 모든 자존심과 위엄을 버렸다.

-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의 모든 편견과 반대를 제쳐 두었다.

- 자신의 안정된 직업과 명성, 그리고 권위를 생각하지 않았다.

 

셋째는, 간구하는 태도이다.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많이 간구했다”(22)

(58: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넷째는, 기대하고 믿는 태도이다.

자기의 딸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사경을 헤매고 있다. 이 사람의 큰 믿음을 보라.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23)

주님께서 오셔서 제 딸에게 손을 얹으시면 구원을 받아 살겠습니다.“ 강열한 기대와 믿음이다.

 

그런데 집으로 가는 중에 엄청난 큰 사건이 생겼다. 갑자기 12년을 혈루병을 앓는 여인이 나타나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었다. 빨리 집으로 가야 하는데 내 어린 딸이 죽어가고 있는데“(23), 일각(一刻)이 여삼추(如三秋)인데, 지금 시간이 없는데, 갑자기 이상한 여자가 나타나 시간을 끌고 있다. 예수님도 그렇지 모른 체 하고 지나가시면 좋겠는데,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하신다. 여인을 찾으신다.

 

시간은 점점 흘러 미칠것만 같다. 야이로는 속이 얼마나 탔을까? 35절에 보면 여인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당신의 딸이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한다(36). 이제 딸이 죽어 버렸는데 믿기는 뭘 믿노!

 

여기에서 야이로의 믿음과 우리의 차이점을 볼 수 있다. 아마 우리 같으면 12년 동안 혈루병 앓은 여인을 원망하고 미워했을 것이다. 아니 예수님을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생명에 지장이 없는 혈루병 여인은 나중에 고쳐 주셔도 늦지 않는데, 생명이 위독한 자기 딸부터 고쳐 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급한 불부터 먼저 끄시고 급하지 않는 것은 나중에 하셔도 되잖아....

 

우리 같으면 온갖 생각, 온갖 불만을 다 했을 것이다. 성경은 거룩해서 그런가, 신사적이어서 그런가, 야이로의 속 마음을 말하지 않고 있다. 아마 성경이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이 그만큼 컸다. 대단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성경이 아니, 주님은 우리들에게 회당장 야이로와 같은 믿음을 가져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을 키우라는 것이다.

 

믿음의 결과는 엄청나다. 우리의 믿음을 키우자. 예수님의 권세를 붙잡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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