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묵상(22)>2021/09/08
22. 거라사의 광인
막 5:1-20
================================================================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은 바라 예수님이 호수 건너편 거라사 지방에서 무덤에서(그 당시 그 지역의 무덤은 석회암 동굴)에서 살면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괴롭히는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장면이다.
저는 오늘 이 본문을 통해 우리가 사는 사회가 군대 귀신 들린 자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본다. 이 귀신의 모습과 정체를 볼 줄 알고, 악한 사탄의 장난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악한 세력이나 마귀의 세력도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꼼짝도 못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믿는 성도들을 호심탐탐 노리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은 마귀의 요시찰 인물이다. 마귀들이 우리를 넘어뜨리려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을 지배하는 정도가 다 다르듯이 마귀가 사람들을 지배하는 정도도 다 다르다. 마귀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약간만 사로잡혀 있는 사람도 있다. 문제는 완전히 사로잡혀 있던, 약간만 사로잡혀 있던 자신들은 모른다는 것이다. 내가 마귀에게 붙잡혀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것 만큼 서글픈 것이 없다. 내가 마귀에게 붙잡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만 하면 언젠가는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이 있다.
- 세상에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다. 하나님의 영이 없기 때문에 악한 영이 쉽게 접근하고 마음대로 조종한다.
마귀에게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은 분명히 보면 표가 난다. 겉은 인간의 모습이지만 사실은 짐승보다도 더 못하다. 오늘 본문 5절에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3절에는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라고 했다. 살아 있다고 다 살아 있는게 아니고, 사람이라고 다 사람의 행실을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살면서 무덤에 갇혀 살아가는 인생이 참 많다. 이 무덤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다시 설명하겠다.
요즘 미국에서는 대중가수들부터 시작해서 연예인들이 다는 아니겠지만, 대부분이 마약에 중독되어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음악을 잘 하고, 노래를 잘 부르는 인기 있는 가수가 되기 위해 마약을 조금 복용한 것이 끝에 가서는 노래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들고, 견딜 수 없어서 끝내는 권총으로 자살하고, 버스에서 뛰어 내리고, 노래를 부르다가 높은 무대에서 뛰어 내리고, 전부 다가 마약 중독자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신문에 보니까 목이 너무 마르고 갈증이 나서 가게에서 물을 한 컵 얻어 마셨는데, 거기에 마약을 타서 먹게 해서 마약 중독자로 만들어 자기 발로 그 가게를 찾아오게 해서 마약을 팔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렇게 마귀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약간만 사로잡혀 있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무심코 보아서는 분별할 수 없다. 사실 하나님의 영이 거하지 않는 사람은 작게나마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에게는 악한 영이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쉽게 활동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했다(막16:9).
- 예수님은 한 귀신에게 사로잡혔다가 일곱 귀신에게 다시 사로잡혀 그 상태가 더 심하게 된 사람에 관해 말씀하시기도 했다(눅11:26).
-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군대 귀신에게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여러분, 사람이 완전히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건, 약간만 사로잡혀 있건, 마귀의 노예가 되어 사로잡힌 것은 마찬가지이다. 죄도 큰 죄든, 작은 죄든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은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완전히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어도 예수님은 그를 구원하실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 이 사람이 큰 구원을 경험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모든 사람에게, 심지어 가장 난폭하고 사악한 사람에게도 놀라운 소망이 있다.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놀라운 소망이 있게 된다. 이것을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다. “군대 귀신” - 레기온, 로마의 한 여단 규모의 군대, 대략 6,000명 정도의 군대 – 이 군대 귀신도 예수님은 단숨에 물리치셨다.
사실 마귀는 무섭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친다. 한 사람의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 사상, 영까지 망쳐 버린다. 본문에 보면 이 사람은 무덤에 거처한다.
“(3)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인간의 비참한 모습이다. 한 인간이 마귀 때문에 무너지려면 이렇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마귀는 어두움을 좋아한다. 빛을 싫어한다. 요한복음 1장에서도 “말씀이 이 땅에 오매 어두움이 싫어했다” 고 했다. 마귀는 어두움을 좋아한다. 그래서 마귀는 어두운 밤에 많이 활동하는 것 같다. 요즘 사람들이 밤만 되면 변질된다. 낮에는 신사, 숙녀로, 지성인으로, 현대인으로 멀쩡하게 업무보며 활동하다가도 밤만 되면, 발동을 한다. 밤거리를 방황하고, 술집을 전전하고, 색욕을 찾아 헤맨다. 낮에는 가만히 있다가 밤에는 나타나서 활동한다.
예수님이 배를 타고 거라사 지방에 건너갔을 때는 폭풍우가 치고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었다. 배는 해변에서 끌려 올려져 있었다. 해변 주위에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석회암 동굴들이 많이 있었다. 여기에다가 시신을 넣고 무덤으로 사용했다. 귀신 들린 이 거라사인은 무덤에 들어가 살았다. 아마 낮에는 가만히 있다가 밤에는 나타나서 배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괴롭힌 것 같다.
예수님도 밤에 해변에 도착했다. 귀신 들린 사람이 난폭하게 나타났다. (사람이 밤을 좋아하면 마귀에게 빠지고 죄를 짓게 된다. 사람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잠을 자야 한다) 사람이 귀신에게 붙잡히는 잠을 자지 않는다. 밤을 좋아한다. 낮에는 자든가 가만히 있다가 밤에만 돌아 다닌다.
오늘 이 본문 말씀을 가지고 드라마를 보듯이 다섯 가지의 장면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자.
첫째 장면은, 소망 없이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다.
그에게는 예수님이 없었다. 비참한 상태 그대로의 모습이다. 우리가 본문의 이 비참한 사람의 모습을 통해서 귀신에게 사로잡힌 자의 모습을 분간해 낼 수 있다.
1) 그 사람 속에는 더럽고 악한 영이 있었다. 그의 몸속에는 악한 영의 세력이 거하고 있었다. 그는 영적이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이 지배하지 않는 인간을 대표한다. 육의 일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다.
엡 2:22에는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고 했고, 고전 3:16에는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라고 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 속에 성령이 거하신다는 뜻이다. 성령이 우리를 거처 삼고 거하시니 우리가 성령의 전인 것이다. 그런데 마귀의 영이 거하는 집이 되어 있으면 마귀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지금 본문의 이 사람은 마귀의 영이 거하고 있으니, 마귀의 사람인 것이다.
육신에 사로잡힌 사람은 마귀의 사람이요,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다.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5:19-21).
2)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서 살았다. 어두운 곳, 가장 부정하고 더럽고 추한 곳, 이런 곳을 좋아 한다. “자기 행위가 악함으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다”(요3:19).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한다.”(요3:20)
3) 그 사람은 생명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다. 생명을 받지 못한다. 죽은 자와 같다. 빛을 싫어하니 생명이 없고, 생명이 없으니 말씀을 먹지 못한다. 말씀과 단절되어 있으니 말씀을 더 듣기 싫다. 그래서 영이 죽은 자다. 어둠에만 계속 눌려 산다. 성도들로부터 멀어져 있고, 교회로부터 멀어져 있다. 그래서 계속 죽은 자들에게로 끌려 간다. 죽은 자들 속에 있게 되는 것이다.
4) 어느 누구도 도움을 주려 해도 도움을 받지 않는다. 고집이 세고, 주위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가 없다. 또 난폭하고 광적이고 폭력적인 성질을 가졌다.
즉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1:29-31).
5) 그 사람은 실제로 벌거 벗었고, 모든 품위와 합당하고 의로운 행위를 벗어 던진 자였다. -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할 사람이다.
6) 오직 다른 사람에게 피해만 주는 사람이다.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 자이다. (롬3:14-17)
둘째 장면은, 필사적으로 예수님께 대항하는 장면이다(6-7절).
벌써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았다. 잔뜩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예수님을 멀리서 보았다. 아마도 예수님이 타신 배가 해변에 다가서고 있을 때부터 알았다. 아니면 배를 타고 건너오고 있을 때부터 알고, 큰 풍랑을 보내어 오지 못하게 방해했다고 봐야 한다. 우리의 원수 마귀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안다. 우리 인간은 어리석어서 예수님을 모르고 배척하는 것이지, 마귀는 너무나도 예수님을 잘 안다. 너무나도 잘 알면서 인간을 속이기 위해서 예수님을 대적한다.
세 번째 장면은, 예수님의 권세에 의해서 기적적으로 깨끗하게 된 사람을 보여준다.(8-13절)
예수님의 권세의 의하지 않고는 회복될 수 없고, 고칠 수 없고, 변화 받을 수 없다. 즉 생명을 얻고 살 수 있는 길은 없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네 번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로부터 떠나시기를 원하며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의 모습이다(14-17절).
이 세상에는 어디에서든 예수님을 싫어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리 좋은 말씀, 위대한 큰 일, 기적을 행한다 하더라도 말씀을 받지 않고, 복음을 짓밟는 사람들이 있다.
다섯 번째 장면은, 깨끗하게 되어 예수님으로부터 사명을 부여 받ㅇ는 사람의 모습이다(19-20절).
깨끗하게 된 이 사람은 고침받은 후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고 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기에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전파했다고 했다.
이 “데가볼리 – 데카폴리스” 라는 말은 ‘열 개의 도시’라는 말이다. ‘데카-열 개, 폴리스 – 도시’ 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데가볼리는 열 개의 도시로 구성되어 있는 지방이다. 열 개의 도시 이름을 보면, 스키도폴리스, 펠라, 디온, 거라사, 빌라델비아, 가다라, 라바나, 가나다, 히포스, 다메섹 등이다.
후에 이 도시들은 기독교 선교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중심도시가 된다. 많은 교부들이 배출되었다. 특히 다메섹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살았던 도시이다. 사도 바울이 처음에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가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다메섹 직가라는 곳에 있는 아나니아를 통해서 세례받고, 성령 체험하고, 새롭게 되는 사건이 사도행전에 기록이 되어 있다.
이 데가볼리 지역은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지역이었고, 로마와 그리스인들이 많이 이주해 살았다. 헬라의 문화가 꽃 피었던 곳이다. 그래서 후에 그리스 전역에 선교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오늘날 이 시대에도, 그리고 오늘을 사는 성도들 주위에 사탄들이 호심탐탐 노리면 넘어뜨리려고 하고, 사탄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사탄의 요시찰 인물이 제대로 잘 믿는 성도들이다. 우리는 사탄의 대적을 뛰어 넘어야 한다.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힘으로 하는 것이다. 말씀을 무기로 하여 성령의 도움으로 사탄의 궤계를 이기는 것이다.
지중해 시대에 두 개의 강대국이 있었다. 하나는 로마제국이고, 또 하나는 로마보다는 작지만 단단했던 카르타고 제국이었다. 어느날 카르타고가 로마까지 쳐들어와 로마가 함락 위기에 있었다. 그때 로마의 유명한 장군 ‘스키피오’가 병사들을 이끌고 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거꾸로 쳐들어 갔다. 가는 곳마다 보급로를 차단하면서 결국 카르타고제국을 정복했다. 그런데 불타는 카르타고를 보면서 스키피오 장군은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대신 울고 있었다. 부하들이 의아해서 기뻐해야 할 장군이 우는 이유를 물었다.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비록 적이지만 강국 카르타고가 있었음으로 로마가 존재해 왔는데, 이제 카르타고가 무너짐으로 결국 로마도 멸망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정말 그 후 로마는 대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부패해서 서서히 무너져 갔다.
한국교회도 서서히 마귀의 밥이 되어 가고, 타락해 가고, 변질해 가고 있다고 한다. 박해와 고난, 환난과 위협이 없어져 가고, 또 물질을 숭배하고, 성도들이 나태해져 가고 있다고 한다. 이 코로나 시대를 보내며 서서히 교회 스스로 타협해 가며, 환경에 순응하면서 믿음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군사가 아니고, 패잔병처럼 믿음의 나약함을 드러내고 이기주의와 편리주의에 맞추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는 알레스카에서 싱싱하게 살아 있는 연어를 운반해 오기 위해서 연어를 운반해 올 때 작은 상어를 같이 넣어서 운반해 온다고 한다. 작은 상어를 같이 넣으면 연어들이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친다고 한다. 그래서 고기가 싱싱하다고 한다.
마귀의 대적이 있으므로 더욱더 하나님 중심으로 살게 되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더욱더 강해지는 것이다. 성경이라도 더 보게 되고, 기도라도 더 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실 때까지 택한 백성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서 이끌기 위해서 마귀의 세력을 그냥 둘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이 땅에 오시면 악한 세력을 징벌할 것이다. 이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하고 아무리 거라사 광인 같은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권세로 이기는 승리가 있기를 바란다.
'설교 원고 > 마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24.예수님의 능력 (0) | 2021.12.09 |
---|---|
23.예수님의 권세를 붙잡은 사람 (0) | 2021.12.09 |
21.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분 (0) | 2021.07.26 |
20. 진정한 가족관계 (0) | 2021.06.26 |
19. 성령을 거스려 행하는 자들 (0) | 2021.0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