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원고/마가복음

19. 성령을 거스려 행하는 자들

☆ 주님의 머슴 2021. 6. 14. 10:37

<마가복음 묵상(19)>

19. 성령을 거스려 행하는 자들

3: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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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3:29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3:30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성령은 우리의 선생님이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이라고 했다. 우리는 성령이 함께하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제일 큰 선물은 성령이다. 성령은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 우리를 가르쳐 주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오셨다(14:17,26). 성령이 우리의 인생을 인도해 주신다.

 

우리 인간은 배워야 한다. 인간은 밖으로부터 공급받아야 한다. 지식을 공급받고, 정보를 공급받고, 음식을 공급받고, 공기를 공급받고, 모든 것을 공급받아야 한다.

 

인간은 배워야 한다. 인간은 어려서부터 배워야 한다. 사람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태어난다. 부모가 제일 큰 선생님이다. 그 다음 조금 더 크면 학교 선생님이 제일 큰 선생님이다. 그래서 인간은 배우면서 산다. 모르는 것은 물어 가면서 산다. 모르는 것은 아는 사람에게 물어야 하고, 아니면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서 찾아 배워야 한다. 서울에 가서 길을 모르면 서울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어야 한다. 부끄러워서 묻지 않으면 자기만 고생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물으면서, 배우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지식만 배우는 것이다. 지식은 단순한 여러 가지 배움중에 하나일 뿐이다. 지식 외에도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우리 인간은 전인적(全人的)으로 배워야 할 것이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전 생애에서 삶의 방향, 방법, 자세, 정신세계까지, 영육 간의 모든 부분에 배워야 하는 것이다. 배우지 않으면 그만큼 모르고 그냥 살아가 보는 것이 된다. 남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나도 그냥 남들처럼 흉내 내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확신을 가지고 내 인생의 방향을 알고, 확신을 가지고 내 인생의 길을 자신 있게 사는 자가 별로 없다.

 

그래서 엄격하게 따진다면, 인간의 전 생애를 볼 때 이 세상에는 참 선생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설령 참 선생이 있다 하더라도 만날 수가 없다. 아니 만날 수 있다 해도 몹시 어렵다.

 

그러나 인생을 끝까지 책임지시고, 가르치시고, 인도해 주시는 분이 계시니, 그 분이 바로 보혜사 성령님이시다. 보혜사라는 말은 보호하시고, 은혜 주시고, 가르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오직 성령님만이 우리의 인생을 잘 아시고 이끄신다. 성령님만이 인생을 끝까지 요람에서 무덤까지 전적으로 돌보시고 가르치시고, 책임지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속에 성령이 와야 한다. 우리는 성령과 함께해야 한다. 성령님을 나의 동반자로 살아가는 자는 모든 것에 문제가 없고, 문제가 생겨도 극복하고 이긴다.

 

성령이 내 속에 있는 자와 성령이 내 속에 없는 자의 삶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세상에서 대부분의 삶은 성령이 없는 삶이다. 이들은 마귀에게 사로잡혀 이끌려 다니는 삶이고, 자기도 자기를 마음대로 못 하는 삶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령이 있는 삶이다. 성령에게 이끌려 사는 삶이다.

 

요즘 지위고하, 돈이 많아 풍요한 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비관해서 자살하고, 조그마한 어려움 앞에 자살하고, 자기의 자존심이나 명예가 손상 되었다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자살한다. 오래전에는 그룹의 회장도 자살하더니, 전직 대통령도 자살했다. 최근에는 서울시장도 자살했다. 우리나라가 OECD 국가에서 자살률 1위라고 한다. 언제부턴가 나라가 자살의 영이 덮여 있는 것 같다. 자살은 가장 큰 수치다. 인간을 말살 시키는 가장 악랄한 마귀의 수법이다. 그런데 그 자살을 미화하거나 아름다운 한 방법으로 분위기를 반전 시킨다. 이것이 사탄의 방법이다.

 

그러나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런 악한 죄에 사로잡히지도 않지만, 그런 자살에 휩쓸리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이 진정한 삶을 사는가? 진정한 삶의 확신 속에 목표점을 향해 살아가는가? 한두 번 후회의 삶을 살지 않을 수는 없지만, 연속해서 후회의 삶을 살지 않는 자들이 누군가? 성령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자.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 보려면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령을 받지 않고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진정한 인간으로 삶을 살 수 없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으로 돌아가 보자. 이 말씀은 참으로 무서운 말씀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3:28-29).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이유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기적을 행하는 것은 바알세불이 지폈으며, 바알세불과 연합하여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라고 비방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 온 서기관들이니 그 명성이 지방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었을 것이다. 지방의 서기관들보다는 예루살렘의 서기관들이 더 권위가 있고, 더 실력이 있다고 믿었기에 더 신뢰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여기에 대한 설명으로 귀신의 왕이라고 하지 않고, ‘사탄이라고 정정해서 정확하게 설명하신다. 사탄은 대단히 교활해서 그의 동료, 소유를 자발적으로 포기하지 않는다.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23-26). 사탄은 자기들끼리 분쟁을 일으켜 싸우지 않는다. 흑암의 세력들은 얼마나 잘 뭉치는지 모른다. 오늘날의 교회가 분열되어 싸우고, 나누어지고, 서로 미워하고, 비방하지만, 사탄의 무리는 그들의 왕국을 세움에 있어서 절대로 분열이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말을 믿고 동조하려는 자들에게 부드럽고 우호적으로 다정하게 사탄의 속성에 대해 설명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강력하여 사탄을 제압하는 일이다. 사탄을 제압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 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27).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사탄을 강한 자가 결박하듯이, 이 일을 하러 온 자가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성령이 뒤에서 밀어주시는 것이기에 기적이 일어나고, 병마가 물러가고, 귀신이 떠나는 것이다. 이 성령이 하시는 일을 명색이 서기관, 즉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친다는 서기관이 귀신의 왕의 힘을 빌려 한다고 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히는 일인가!

 

이것을 예수님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라고 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28-29).

 

한마디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도 있음을 알자.

(요일5: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6:4-6)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12:31-3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 “용서받을 수 없는 죄”, 다 같은 의미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이다.

 

성령은 크게 두 가지의 일을 하신다. 하나는 회개시켜 거듭나게 하는 일과 또 하나는 성령의 능력세례를 부어주어 능력을 행하게 한다. 그리고 보편적으로 성령님은 하나님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계시해 주시기도 하고, 사람들이 진리를 보고 듣고 했을 때 그것을 사람들에게 깨닫고 이해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읽을 때 이해하지 못하거나 깨닫지 못하는 것은 성령이 눈을 열어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1. 성령은 하나님의 진리가 인간 생활속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이 그것을 인식할 수 있게 해 준다.

 

가령 이렇게 생각해 보자.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어떠한 기능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활용을 거부한다면 그 사람은 드디어 그 기능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만일 사람이 어두움 속에서 너무 오래 동안 산다면 그는 그만 시력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걷지 않고 늘 누워서 있다면 그는 걷는 힘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한쪽 팔을 사용하지 않고 꽁꽁 묶어 놓는다면 마침내 그 한쪽 팔을 사용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만일 성령의 인도를 거부한다면 마침내 그가 진리를 보았고, 체험했다고 하더라도 진리를 받아드릴 수가 없고, 인정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또 만일 그 사람에게 능력 있는 은사를 주었다고 하더라도 그 은사를 무시하고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은사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2. 어찌하여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가?

다른 모든 죄는 인간적이지만 그러나 이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마귀적이기 때문이다”(벵겔) 라고 했다.

 

어찌하여 그런가? 우리가 복음을 처음 맞이하게 되면 마음에 찔림을 당한다. 내 마음에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과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그 결과로 참 마음으로부터의 회개가 일어나게 되고, 그리고 이 회개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용서의 조건이 된다.

 

일본의 유명한 목회자였던 이시이 도오기목사님이 처음 성경을 읽었을 때의 마음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멈추었다. 나는 마치 큰 못에 심장을 찔린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불러야 좋을지, 아니면 그것을 그리스도의 동정이라고 불러야 좋을지, 무엇이라 불러야 좋을지 몰랐다. 오직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믿고 있던 나의 완고한 마음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여러분, 사람이 성령의 암시를 끊임없이 거부한다면, 그는 예수 안에서의 아름다움을 느끼지도 못하고, 발견하지도 못한다. 설령 예수님을 만났다 하더라도 그것을 전혀 느끼지도 못한다. 영적인 감각이 완전히 없어져 버린다. 죄의식도 느끼지 못하고, 죄의식이 없으니 회개할 수도 없고, 회개가 없으니 용서는 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기 직전 예수님이 일깨워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를 못했던 것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 때,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4:5-7) 라고 일깨워 주었다. 그러나 가인은 그것을 무시해 버렸다.

 

타락한 천사 루시퍼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다. 어느날 교회에 목사님이 예배 중에 교인들 가운데에 당당하고 멋진 청년을 보았다. 예배가 끝난 후 그 청년은 고백하기 위해 남았다. 그는 굉장히 많은 무시무시한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그 고백을 들은 목사님의 머리카락이 거꾸로 설 정도로 소름끼치는 죄의 고백이었다. 목사님은 당신은 그런 죄를 짓기 위해 오랫동안 살아온 것이 틀림없다.” 라고 말했다. 청년이 말하기를 나는 루시퍼요. 나는 태초에 하늘에서 떨어진 자요.” 라고 말했다. 목사님은 다시 말했다. “그래도 잘못을 회개하면 되니, 회개한다고 말하시오. 당신 같은 사람도 용서 받을 수 있어요.” 라고 했다. 청년은 순간 목사님을 쳐다보더니 등을 돌리고 큰 걸음으로 사라졌다. 그는 잘못하였다고 말하지도 않고, 또 말하지도 못했다.

 

용서에는 유일한 조건이 있다. 그것은 회개이다. 그러나 아무나 회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회개가 쉬운 것이 아니다. 회개를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다. 회개는 몹시 어렵고, 힘들다. 회개는 성령의 조명을 받은 자만이 할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사람이 성령의 인도를 거듭거듭 거부했기 때문에 선을 보아도 그것을 인식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또는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없고, 죄에 대한 자각이 없고, 회개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설령 예수님을 만났다고 해도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인식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오히려 성령에 대해 거슬려 대항하게 대는 것이다.

 

사람이 예수 안에서 깨닫는 일이 있는 한, 그리고 사람이 죄를 떠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죄를 미워하는 한, 그는 비록 수렁이나 진창 속에 삐졌다 하더라도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 성령과 함께 해야 한다. 이 어려운 시대에 성령의 역사 없이는 삶이 더 힘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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