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2018/3/11)-요한계시록(53)
구원받은 자들의 노래(2)
계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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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젠가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불타는 유리 바닷가에서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올라간 자들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입니다. “짐승과 우상과 짐승의 수 666을 이긴 자들”만이 부를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았는 자들입니다.
구약의 출애굽 사건은 신약에 들어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 인류가 사탄, 마귀로부터 해방되어 구원 받을 것을 예표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는 사탄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애굽의 노예생활은 인류가 사탄과 죄악으로 매여 종살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애굽의 바로가 히브리인들이 남자 아이를 낳으면 다 죽이는 것은 요한계시록 12장의 붉은 용이 여자가 낳은 남자 아이를 삼키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가 히브리인들을 말살하려고 하는 정책을 쓴 것은 오늘날 사탄이 다양한 방법으로 교회를 말살하고 없애버리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인 요한계시록 15장의 짐승과 그의 우상과 짐승의 수 666을 이기고 승리한 자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 불타는 유리바닷가에서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출애굽기 15장의 홍해를 건너 후 자기들을 추격해 와서 죽이려고 했던 그 애굽 군대가 다 물에 빠져 죽고, 시체가 물에 떠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향하여 승리의 노래를 불렀던 것과 같은 의미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라고 같이 붙여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출애굽 해 나올 때, 홍해에서 구원 받은 그것이 바로 신약시대의 마지막 때의 성도들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적그리스도의 박해로부터 구원받고, 이 세상을 통치하던 적그리스도의 세력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불타게 될 것을 미리 당겨서 보여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게 참고 견디고 이기고 또 이겨서 하나님 보좌 앞, 불타는 유리바닷가에서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야 됨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출애굽기 15장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출애굽기 15장의 모세의 노래는 자기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의로우심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애굽을 심판하신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높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여호와를 찬양하라‘로 노래를 마칩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계시록 15장 3절과 4절이 정확하게 그 노래를 요약하여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에서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그 모세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는지를 바로 그 노래의 앞장인 14장에서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우리 함께 한번 읽으십시다.
(출14:26-30) “(2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들의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 하시니
(27)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28)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29)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행하였고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더라
(30)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가 갈라지고 자신들의 대적인 애굽 사람들이 그 홍해에 다 빠져 죽게 된 그 심판의 자리에서, 자신들은 안전하게 구원을 받았습니다. 물이 양쪽으로 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군대들은 홍해의 물이 다시 합쳐지면 물에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홍해 바닷가에 즐비하게 널려있는 애굽 사람들의 시체를 보고 이 모세의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로 그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그 홍해 바닷가의 이스라엘이 바로 우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해 그 홍해 바닷가의 사건을 보고 경험 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우리의 대적들은 이미 결박을 당했고 그들은 가시적으로도 멸망해 버릴 것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간이라는 제한된 공간 속에서도 유리 바닷가의 찬양을 “지금“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 여기 계신 여러분들 중에도 지금 여러분 앞에 엄청난 홍해가 가로 막혀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 군대가 똑같이 홍해 앞에 섰던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때때로 홍해 앞에 당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 홍해가 저주와 심판의 바다가 되지만 여러분, 우리에게는 그 홍해가 구원의 바다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 계시록에서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홍해 바다 앞에서 울부짖었던 것처럼 우리의 앞길에 놓여 있는 그 홍해를 장애물로만 여깁니다. ‘난 이제 죽었구나, 왜 내 자식은 저렇게 정신을 못 차릴까, 왜 내 생활은 점점 더 가난해 질까, 왜 나의 병은 이렇게 더 위중해질까, 왜 우리의 가정은 점점더 문제가 생길까’ 그 모든 것들이 우리 인생의 장애물처럼 보이지요? 홍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홍해에 여러분을 빠뜨려 죽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앞장을 서시고 그 홍해를 건너게 하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우리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그 홍해를 반드시 건너야 합니다. --->“홍해같은 환란이 (A♭,388)“
♬“홍해 같은 환난이 나를 덮고 에워도
요단 같은 시험에 깊이 빠질지라도
불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신 전능자
하나님 아버지를 내 진정 의지하리.“
그 홍해를 다 건너고 났을 때 이스라엘에게 그 홍해가 여전히 장애물이었나요? 아닙니다. 그들이 홍해를 다 건너고 난 뒤에는 그 장애물이었던 홍해가 바로 이스라엘의 ‘찬양의 이유’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저 홍해에다가 우리를 다 빠뜨려 죽이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그 홍해는 우리의 대적들, 우리 안에 들어있는 옛 사람, 옛 성품, 이런 것들을 죽이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우리는 그 홍해를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경이로우심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배우게 되고 그 분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의 홍해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배려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우리에게 인생에 홍해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홍해로 가게 되었습니까?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지 않고 그냥 종으로 계속 살았다면 굳이 홍해라는 장애물을 맞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자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모두 다 그렇게 홍해 앞에 서야 하고, 그 홍해를 반드시 건너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자리는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잘 이겨내십시오. 아니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맞다 면 이겨내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4절을 보시면 그 찬양의 내용 중에 “두려우신 하나님” 이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홍해를 건넌,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그 분은 두려우신 하나님” 이라고 찬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을 한번 읽으십시다.
(계15: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고 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그 하나님을 정말 두려워하십니까? 아니죠?
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누구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 상대방의 힘과 권위를 인정하는 데서 나오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그 상대방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상대방이 정말 권위와 힘이 없거나 아니면 그 상대방에 대해서 누구인지 전혀 모를 때 두려움을 못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정말 권위가 없으신 분이십니까? 권세가 없으신 분이세요?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까? 그 분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겁 없이 막 사시는 것입니다. 여전히 내가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앉아서 그 분을 부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막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나보다 높은 상위 권위가 없으면 사람은 스스로 절제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바로 죄의 속성입니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의 인생에 여러분을 지키고 보호해 주고 이끌어 줄 상위 권위자가 없었다면 여러분이 지금 어떻게 되어 있을 것 같으세요? 이가 하나라도 제대로 남아있을까요? 학교는 제대로 졸업하셨을까요? 여러분의 부모님이나 여러분을 돌봐 주신 어떤 상위 권위자가 여러분에게 ‘아침에 일어나면 이 닦아라, 늦잠 자지 말고 학교는 꼭 가야한다, 거짓말하지 말라, 남의 것 훔치지 말라’ 그 분들이 이렇게 우리를 이끌어 주시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 대부분은 감옥에 가 있거나 벌써 전염병에 걸려서 다 죽었을 겁니다. 아이들을 보세요, 처음부터 스스로 이 닦는 것 봤습니까? 세수하고, 샤워하는 것 봤습니까? 이런 걸 그렇게 하기 싫어할 수가 없어요, 부모가 어르고 달래고 패면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고 조언하고 하지 않으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절대 이 안 닦을 겁니다. 방 청소해라. 책 정리해라. 엄마가 잔소리 안하면 방 청소 안 하고 책 정리 안 하잖아요. 엄마가 무서우니까 할 수 없이 한단 말이예요. 엄마가 안 무서우면 엄마 말 안 듣는 거죠. 엄마를 우습게 아는 거죠?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서 그 상위 권위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늘 최고 권위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대로 막 사는 것입니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그게 속성화 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상위권위자가 있어야 합니다.
(고후5:9-11)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11)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
정말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두려워서라도 막 못 산다는 것입니다. 두려워서라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두려움은 단순히 우리가 그 분을 ‘무서워한다.‘라는 말은 아닙니다. 나의 상대방이 너무 크고 존귀하고 엄위하셔서 그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을 ’포베오- fobevw (무서워하다. 두려워하다. 존경하다. 경외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알고, 두려운 마음으로, 경외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반대로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왜 죄를 짓습니까? “내가 나의 경쟁상대로 놓고 있는 어떤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더 나아지고, 행복해 지고, 그로 말미암아 잘난 척도 좀 하고 싶고, 부러움을 사고 싶고, 인정도 받고 싶은 의도“ 대부분이 그런 의도지요? 한 마디로 사람들에게 잘난 척 하고 싶어서 죄를 짓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죄인들은 내가 다른 이들보다 더 나은 자리에서 나를 자랑하고 싶어서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도 사기를 치고 거짓말을 하고 위선을 떠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잘나 보이고 싶다는 것은 결국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말과 정확히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느라 하나님의 시선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살전2:4)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갈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왜 오늘 날 교회의 강대상에서 선포되어지는 말씀들이 이렇게 힘이 없어졌는지 아십니까? 어느 때인가 부터 목사님들이 사람들을 두려워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헌금해서 자기 월급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월급을 주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즘은 목회할 교회가 없고, 갈 곳이 없으니까, 쫓겨날까 싶어서 교인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그들이 지옥엘 가건 말건 그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복 받는다, 부자 된다, 당신들 지금 잘 하고 있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해 주면서 사람들에게 비위를 맞추며 붙들어 두려는 시도들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앉아있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되니까 설교의 내용도 점점 제한을 받게 됩니다. 이혼한 사람들이 많은 교회에서는 이혼에 관한 설교를 못 합니다. 합법적이지 않은 방법을 동원해서 탈세나 하고, 권모술수를 동원해서 많은 돈을 벌어 교회에 큰돈을 헌금하는 장로가 있는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삶에 관해 설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설교자들이 점점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왜요? 그런 설교를 하면 그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표적 설교’라고 들고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목사님이 날 들으라고 일부러 나를 표적으로 삼고 표적 설교를 했다’ 이렇게 분한 마음을 품고 혹시 교회를 나가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목사의 모든 설교는 ‘표적 설교’여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를 표적으로 삼고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제 설교를 들으시고 ‘오늘 우리 목사님이 날 들으라고 일부러 이런 설교를 했구나.’하고 분한 마음이 드셨다면 여러분은 설교를 잘 들으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제 설교를 듣고 매주 찔리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매주 ‘저 목사는 왜 매주 나만 갖고 그래’ 라는 마음이 드셔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머무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시고 하나님께로 여러분의 발길을 돌리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당당히 살아 낼 수가 없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여러분을 영원히 지옥에서 태워 버리실 수 있는 천지의 주재 만국의 왕 우리 하나님을 두려워하십시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마10:28)
따라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나오지 않고 있다면, 그분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으시다면 여러분은 혹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은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왜 우리를 구원시켜 주셨습니까? 이 땅에서 잘 먹고 살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성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목에 힘 주고 교만하게 살아라고 우리를 구원 시켜 주신 것입니까? 구원의 목적은 분명히 이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뭐예요? 왜 우리를 구원 시켜 주셨을까요? 그 귀하고 값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희생시켜 왜 우리를 구원시켜 주셨지요?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고, 너무나 존귀하신 분이라서 경외함으로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하여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롬5:1-2)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과거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현재입니다).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미래입니다.)”
이렇게 구원에는 세 시제가 있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라는 것은 이미 신분이 바뀌고,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언제요? 이미 과거에, 그래서 구원을 받은 우리는 반드시 현재의 노력과 미래의 변화, 미래의 소망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전체 세 시제를 모두 합하여 우리는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우리는 현재에 손발을 움직여 경건을 훈련하고 미래의 소망을 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목표지점은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심히 오늘을 분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게 기독교입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것을 요구 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으신 펄벅 여사의 ‘대지’‘Good earth’ 라는 책이 있습니다. 오래된 책이지요? 제가 고등학생 때 열심히 읽었습니다.
펄벅의 대지에 나오는 주인공 왕룽은 아주 가난하지만 순진하고 열심이 있는 농부였습니다. 올란이라는 못 생긴 아내와 결혼을 하게 되지만 그 아내가 워낙 성실하고 착해서 왕룽은 부모님을 모시고 만족한 삶을 삽니다.
그러던 중에 계속 흉년이 들어서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거기서 혁명을 맞게 되고, 혁명이 일어나면 으레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 집을 털지요? 그 와중에 왕룽의 아내 올란도 부자 집에서 보석을 줍게 됩니다. 거지처럼 동냥을 해서 먹고살던 왕룽의 집은 갑자기 부자가 됩니다.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서 땅을 사들이고 대 지주가 됩니다.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움켜쥐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이 부자가 되자 순진한 농부 왕룽이 제일 먼저 한 것이 기생집 출입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해 죽을 고생을 다한 자기 아내를 두고 어떤 젊은 기생을 첩으로 데리고 삽니다. 결국 그 돈 때문에 왕룽은 귀한 아내를 잃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들도 전부 고리대금업자나 한량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왕룽이 죽자, 그 아들이 치열한 유산다툼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 666을 이기고 벗어났다” 라는 말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다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최종 종점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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