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원고/요한계시록

2018,6,24[요한계시록63]오늘 나는 어떤 인생을 삽니까?

☆ 주님의 머슴 2018. 7. 1. 14:53

주일설교(2018/6/24)-요한계시록(63)

오늘 나는 어떤 인생을 삽니까?

18:9-24

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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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바벨론 도시는 두 가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철저한 종교적인 성격의 도시입니다(13:14-15). 또 하나는 경제적인 성격의 도시입니다(13:16-17). 이것은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시대에는 적그리스도를 우상화 합니다. 곳곳에 동상을 세우고, 섬기게 하고, 절하게 합니다. 철저히 복종하게 합니다. 아주 철저히 종교화된 도시입니다. 지금 이 지구상에 그런 모델을 찾으라면 북한일 겁니다. 역사 이래 이런 나라들이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이 그랬고, 공산혁명을 일으킨 후, 소련의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의한 스타린 철권정치, 독일의 히틀러, 루마니아의 차우체스크, 이탈리아의 뭇소리니 등등, 그 외에도 비슷한 독재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북한은 주체사상이라는 것을 가지고, 철저히 우상화된 종교적인 나라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이렇게 적그리스도를 숭배하는 철저한 종교적인 시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또 하나가 철저한 경제적인 성격의 도시인데, 666으로 경제활동을 하게 해서 모두가 경제원리, 돈의 힘으로 사는 시대입니다.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세력은 666이라는 짐승의 표로 경제통합을 이루어 경제적 힘으로 다스리는 시대입니다. ‘돈이 최고다’ ‘경제 제일주의’ ‘경제가 최고다라고 하면서, 모든 사람들을 경제라는 위력 앞에 아무 반항도 못하게 하고, 666이라는 매매수단인 짐승 표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런 정치제도 앞에서는 기독교가 가장 많이 피해를 봅니다. 핍박과 환난이 일어나고, 순교자가 많이 나오고, 그리고 배교자, 믿음이 약화되거나 포기하는 자들이 많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변질시키고, 믿음을 변질시키는 것이 우상숭배와 물질만능주의, 즉 돈의 위력입니다.

 

그래서 17장은 마지막 때의 종교적인 세력으로서의 바벨론의 멸망을 말하는 것이고, 18장은 경제적 세력으로서의 바벨론의 멸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그 힘과 권세와 우상과 경제로 대표되는 화려한 바벨론은 귀신의 처소,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출현하여 활동하는 시대는 적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온 세상이 바벨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대 시대 마다 큰 힘의 논리로 다스려지고, 우상이 판치고, 돈이 최고야 라고 하면서 경제적인 논리로 다스려지는 시대의 세상이 다 바벨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제적인 논리에 속지 말고, 힘의 논리에 속지 말고, 세상 쾌락의 논리에 속지 말고, 무신론적이고 우상적인 세상의 문화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17, 18장을 통해서 마지막 때에 음녀 바벨론의 멸망해 가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바벨론은 권력의 등에 타고, 사람들을 다스리는 힘입니다. 음녀 바벨론은 금과 진주와 보석과 자주 빛 옷과 붉은 옷으로 세상에게 힘과 쾌락과 행복을 약속하며 미혹합니다. 그리고 손에 금 잔을 가지고 그 속에 채워져 있는 가증한 물건, 음행의 더러운 우상으로 인간을 유혹하고 용과 짐승을 섬기도록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유익을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유익을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삶을 황폐하게 하고, 인간의 영혼을 파괴시키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금 잔 속에 온갖 가증하고 더러운 것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문화로, 우상숭배로, 쾌락으로 취하게 하여 짐승을 따르게 하고 순응하게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시면 음녀 바벨론이 멸망하게 되자 그 음녀의 금 잔에 취해 살던 세상 사람들이 통곡을 합니다. 그 통곡하는 사람들을 성경이 어떻게 묘사를 하고 있는지 보세요.

 

먼저 9절을 보시면 땅의 왕들이 통곡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땅의 왕들이란 음녀 바벨론의 미혹에 넘어가서 힘을 추구하던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음녀의 도움으로 권세를 얻고, 음녀가 나누어 주는 그 권력으로 자기 나라를 다스리고 부귀영화를 누렸던 자들입니다. 그들이 누리던 권세와 힘이 음녀 바벨론이 멸망하자 한 시간에모두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영원할 줄 알았던 세상 권세와 힘이 삽시간에 사라져 버리자 세상 왕들은 그 허탈감을 이기지 못하고 통곡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0절을 보시면 그들이 통곡을 하면서 두려워 떨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8:10) “그 고통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한 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음녀 바벨론이 고문당하는 것을 보면서 무서워서 외치는 외침입니다. 여기서 고통이라고 번역이 된 basanismov"(바사니스모스)’고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무서워하여fovbo"(포보스)두려워 떨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희희낙락하며 권세를 누리던 땅의 왕들이 음녀가 고문당하는 것을 보고 두려워 떨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정말 지옥이 어떤 곳인지 아시나요? 아니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을 믿으세요?

 

(9:43-49)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자칭 고상한 기독교인들이 지옥이 있긴 어디 있어, 사랑의 하나님이 지옥같이 무시무시한 곳을 만드셨을 것 같아? 그건 다 우리보고 착하게 살라고 겁주기 위해서, 만들어 낸 이야기일 뿐이야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닙니다. 지옥은 분명 존재합니다. 지옥에서 활활 타는 불은 성령의 불입니다. 성령의 불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은혜의 불이요, 안식의 불이 되지만 죄인들에게는 무시무시한 심판의 불이 되는 것입니다.

 

지옥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죄에 대한 반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죄와 공존하실 수 없으시고 절대 죄인을 용서하실 수 없으신 거룩하고 순결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와 악은 하나님 앞에서 타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힘과 권세를 누리던 세상 왕들이 음녀 바벨론이 고문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며 두려움으로 떨고 있다는 것은 그들도 똑같은 고문에 처해질 것임을 알기 때문에 두려워 떨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것은 다른 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절대 그 세상 왕들이 추구하는 힘의 원리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세상 권세 잡은 자들이 만들어 낸 시대정신이라고 것입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게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아주 근본적인 세 가지 질문을 갖고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 첫째가 ‘what is man?’ 두 번째가 ‘what is our problem?’ 세 번째가 ‘what can we do about it?’입니다. 모든 인간은 그 질문에 대한 각자의 관점을 경험을 통해 무의식에 저장하게 되고 그것이 그 사람의 세계관이 됩니다. 그리고 그 세계관들이 어떤 공동체나 나라의 사회와 문화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을 시대정신입니다. 그러니까 시대정신이라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안타깝게도 죄인입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기 때문에 스스로 힘을 쌓아서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는 바벨탑의 논리, 바벨탑의 사상이나 그런 강박관념을 나면서부터 갖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해 버리는 사람들은 그렇게 힘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되고, 힘을 추구하는 세상 사람들은 거의 모두 획일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어떻게 해서든지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한다.’ 그러한 죄인들의 획일적인 세계관이 모여 그들의 사회와 문화에 지속적으로 강하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시대정신을 낳지요. 그게 뭡니까? ‘물질주의와 성공주의입니다. 그 것을 신학에서는 자연주의고도 부릅니다. 자연주의라는 것은 초월적인 영역과 초월적인 존재의 실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이며 만물의 근본은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물질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세상이 전부인 자연주의자들은 당연히 이 세상에서의 부와 명예와 힘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연주의, 성공주의, 물질주의라는 세상의 시대정신이 교회 안에도 침투해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약화되어 버리고, 믿음이 있다고 하는데도 세속적인 시대정신과 물질만능주의가 기독교의 믿음과 복음에 뒤섞여 짬뽕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변질된 기독교, 변질된 복음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이 순교하면서, 환난과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서 지켜 왔던 그 믿음이 지금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지기를 싫어하고, 십자가 없는 기독교인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교회 안에서, 예배당 안에서 계속해서 그러한 바벨론의 힘의 원리를 추구한다면 우리도 언젠가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땅의 왕들”, “땅의 상인들과 같이 되어 버리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17-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벧전4:17-18)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심판은 교회 안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부터 알곡과 쭉정이를 골라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47-50절에 보면, 천국 비유 말씀 가운데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13:47-50) “(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예수님이 천국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바다에 나가 그물을 쳐서 고기를 가득 잡아서 물가로 끌어내어서 좋은 고기는 그릇에 담고 나쁜 고기는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시기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골라 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물은 교회를 말합니다. 바다는 세상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들입니다. 그물 안에 가득 잡혀 있는 고기를 물가로 끌어내어, 세상 밖으로 끌어내어 좋은 고기는 담고 나쁜 고기는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일 먼저 교회로부터 심판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두 번째로 통곡을 하는 사람들이 땅의 상인들입니다.

(18:11,15) “(11)땅의 상인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들의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15)바벨론으로 말미암아 치부한 이 상품의 상인들이 그의 고통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땅의 상인들도 똑같이 그들이 가지고 있던 가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림으로 통곡을 합니다. 그리고 그들도 음녀 바벨론이 당하는 고문을 바라보면서 두려워 떨고 울고 애통합니다. 역시 그들도 그 고문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땅의 상인들이란, 단순히 장사하는 사람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 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도 그 멸망의 불길 속으로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통곡을 하는 자들이 배 부리는 자들입니다. “모든 선장,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원들, 그리고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입니다. 배를 부리는 자들은 바벨론 세력의 사치품을 실어 나르던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치의 세력인 바벨론에 빌붙어 세상의 원리로 살던 사람들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18:17-19) “(17)그러한 부가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 모든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인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 (18)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외쳐 이르되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냐 하며 (19)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고 애통하여 외쳐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으로 인하여 치부하였더니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

 

바벨론의 미혹에 빠져 세상 것들을 추구하며 살던 자들은 모두 이렇게 바벨론과 함께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사람들이 힘이라고 여겼던 권세와 부가 순식간에,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음녀 바벨론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약속하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마치 삽시간에 커져 버리는 고무풍선 같은 것이지요. 한순간에 하고 터져버리는 그런 허무한 것들입니다.

 

그러한 바벨론의 세력과 정반대의 삶의 원리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밟히고, 무시당합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자로 취급당합니다. 돈 벌고, 돈 모으는데 목적을 두고 살고, 높은 곳에 올라가고, 힘을 쌓고, 남을 죽이고, 손해를 끼쳐서 나의 배를 불리고, 남을 비방하고 깎아내리고 내가 그 자리에 올라가야 하는, 이 논리, 이 삶이 바로 바벨론식 논리요, 바벨론식 삶인 것입니다. 이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고 있는 세상 바벨론에 맞서 신앙으로 살고, 말씀으로 살고, 은혜로 살고, 복음으로 사니까, 바보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논리가 벌써 교회 안에, 기독교 세계관에도 침투되어 들어 와서 이 바벨론식 논리가 통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지역에, 우리 반야월 지역 같으면 이 반야월 지역에 수 백 억을 투자해서 큰 대형교회를 짓고, 시설도 좋게 편리하게, 교육 환경도 좋게 해서 지으면, 그 주위에 중소형 교회, 개척교회는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가 작은 교회가 다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어떤 설교를 하든, 어떤 교리를 가르치든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돈을 많이 투자해서 시설만 좋으면 됩니다. 이게 바벨론식 논리입니다.

 

본문20절을 보십시오.

(18:20) “(20)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 하더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24절에 보면, 음녀 바벨론의 세력 속에서 성도들이 신앙을 지키느라 많이 죽어 갔습니다.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그 성 중에서 발견되었느니라 하더라.” 성도들이 많이 희생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발견되었다라는 헬라어 euJrivskw(휴리스코)찾다(find),발견하다(discover), 드러나다라는 뜻입니다. 세상이 모르게,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동안에 선지자, 성도들이 많이 핍박 받으며, “순교했다. 피를 흘렸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고난당하고 핍박당하고, 순교한 성도들에게 승리의 오른손을 들어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계6:9-11의 응답입니다.

(6:9-11)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11)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이 말씀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 땅에서 당하는 것 같고, 손해 보는 것 같고, 죽는 것 같고, 고난, 환난으로 사는 것 같지만, 그들은 곧 통곡하게 될 것이고 오직 우리만이 그 통곡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이 땅에서 거룩하게 살고, 복음 붙잡고 살고, 믿음으로 살기를 힘쓰느라 잠깐 동안 죽음을 맛보게 되지만 음녀 바벨론의 세력은 그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영원한 죽음으로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21절부터는 이 환상이 철저한 파괴의 장면으로 바뀝니다.

(18:21-23) “(21) 이에 한 힘 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이르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22) 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23)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비치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인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로 말미암아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바벨론이 바다에 던져져 다시는 보이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이 구절은 예레미야서에서 예언한 말씀이 성취됨을 말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51:60-64) “(60)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닥칠 모든 재난 곧 바벨론에 대하여 기록한 이 모든 말씀을 한 책에 기록하고

(61) 스라야에게 말하기를 너는 바벨론에 이르거든 삼가 이 모든 말씀을 읽고

(62)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이 곳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땅을 멸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거기에 살지 못하게 하고 영원한 폐허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라 하니라

(63) 너는 이 책 읽기를 다한 후에 책에 돌을 매어 유브라데 강 속에 던지며

(64) 말하기를 바벨론이 나의 재난 때문에 이같이 몰락하여 다시 일어서지 못하리니 그들이 피폐하리라 하라 하니라 예레미야의 말이 이에 끝나니라.”

 

예레미야가 바벨론에게 임할 모든 재앙의 내용을 한 책에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대의 군대 장관 스라야에게 그 것을 줍니다. 그리고 유브라데 강 속에 그 것을 던지며 말하기를 바벨론이 나의 재앙 내림을 인하여 이같이 침몰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니 그들이 피패하리라.” 라고 말하게 시킵니다. 그 일이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실재적으로도 한 순식간에우리 눈앞에 펼쳐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22절을 보시면 그 때가 되면 인간들이 자신들만을 위로하려고 만들어 놓은 온갖 풍류를 위한 즐기는 도구와,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제도, 그리고 자신들의 야망의 실현으로 일구어 놓은 음악도, 산업도, 빛도, 사람도, 생명도없어져 버립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그 모든 화려함이 다 허망하게 사라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 그리스도인들만이 영원히 그 아름다운 땅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 이외의 모든 것들은 17절 말씀대로 한 시간” “한 순간에 그냥 사라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냥 지내다가 사라져 버리는 사람이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하나님과 영원히 거하는 천국의 시민으로 사시겠습니까? 영원한 나라에 들어 가셔야지요. 그러면 오늘을 준비하십시오. 신앙생활은 영원을 준비하는 생활인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