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원고/산상복음

17.[산상복음17]기뻐하고 즐거워하라.

☆ 주님의 머슴 2021. 3. 12. 11:20

주일설교(2015/09/06) - 산상설교(17)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마태복음 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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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의 단계>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 <천국>

화평케 하는 자 <하나님의 아들>

마음이 청결한 자 <하나님을 봄>

긍휼히 여기는 자 <긍휼히 여김 받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배부름,만족>

온유한 자 <땅을 기업으로 받음>

애통하는 자 <위로를 받음>

심령이 가난한 자 <천국>

 

 

팔복은 천국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천국을 소유하지 못한 자는 팔복이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첫 번째 천국은 천국 안에 이제 발을 들여 놓은 것을 말합니다. 이제 시작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천국을 소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의 천국은 천국의 완성을 말합니다. 천국의 모든 보화를 소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연인(거듭나지 못한 자)은 팔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거듭나서 천국 안으로 들어 온 자들만이 팔복을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처음 믿어 심령이 가난하게 된 자가 얻는 천국과 여덟 번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가 얻는 천국은 다릅니다.

 

팔복은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는 복입니다. 팔복은 예수를 믿고 천국을 소유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예수를 믿고 천국을 소유한 성도가 처음 가지는 마음이 심령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마음을 가진 자가 애통이 일어납니다. 죄에 대한 애통이 일어납니다. 하나님 몰랐던 것에 대한 애통이 일어납니다. 진작 일찍 예수 믿지 못한 것에 대한 애통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애통하고 회개한 자가 온유해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자기 자신의 존재가 대단한 존재로 여겼는데, 교만하게 자기 자신이 최고인줄 알았는데, 예수를 알고 난 후 심령이 가난해지면 죄에 대한 애통이 일어나고 회개가 일어나면 자기의 부족함과 가장 보잘것 없는 죄인인줄 알기에 온유해 집니다. 그래서 예수 믿지 않는 자는 다 교만하고 온유하지 않습니다. 예수 발견해야만 온유해 지는 것입니다. 온유해지면 더 의에 대하여 갈급하게 되고, 목말라집니다. 더 깊이 은혜 속으로 들어가고 싶고, 영적 세계의 신비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더 갈급해 집니다. 성경말씀에 더 갈급해지고, 영적세계의 깊이에 더 갈급해 지는 겁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다른 사람을 볼 때도 가만히 못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처럼 되었으면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불쌍하게 보입니다. 다 안타깝게 여깁니다. 자기처럼 예수 만나기를 소원합니다. 다른 사람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애절하게 밀려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바울이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기가 예수 믿게 된 동기를 간증하게 됩니다. 그 때 아그립바왕이 바울 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 되게 하려 하는도다.” 이 때 바울이 말합니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합니다.” 지금 바울의 심정이 바로 이런 긍휼히 여기는 애절한 마음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마음이 청결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세상 물질에 욕심이 없고, 세상의 욕심에 관심이 없고, 하나님께만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마음이 청결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화평케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하지 못한 자가 어떻게 남을 화평케 합니까? 화평케 하는 자는 마음이 청결한 자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그 마음에 기쁨과 평강과 안식이 가득 차 있습니다. 자기 속에 평강이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화평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평케 하는 자가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더 깊이 있는 신앙으로, 더 깊이 있는 축복의 세계로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는 것입니다. 결국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 능력이 생기는 수준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최고의 수준은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수준입니다. 순교자는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가 순교자입니다. 신앙의 최고의 단계가 순교의 신앙이요,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능력이 있는 수준입니다. 오늘날에도 최고의 신앙의 단계에 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순교의 정신으로 삽니다.

여러분! 순교도 무족건 죽는다고 다 순교가 아닙니다. 주를 위해서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야만 순교가 되는 게 아닙니다. 순교도 죽는 순교가 있고, 산 순교가 있습니다. 산 순교는 순교의 정신으로 사는 겁니다. 순교의 정신으로 주를 섬기고, 순교의 정신으로 교회를 섬기고, 순교의 정신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의 최고 수준은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 하였느니라”(5:11-12) 이것이 최고수준의 신앙입니다. 이것이 최고수준의 복입니다.

 

박해이라는 말은 아무 때나 사용하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박해의를 위해서 고난당하고 핍박을 받을 때박해를 받는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 때문에 비난당하고, 욕 얻어 먹고, 터무니 없는 악한 거짓말로 대적할 때..... 이게 바로 박해라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박해는 폭력적인 것일 수도 있고, 체포되어 감옥이나 집단 수용소에 던져질 수도 있고, 또 박해는 총살형으로, 또는 어떤 살해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박해는 직장을 잃는 형태로도 나타날 수도 있고, 조롱과 경멸과 조소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박해는 수군거림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박해를 받는 자들의 고난당하는 방법은 끝없이 많습니다. 박해는 온갖 방법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박해를 당할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박해를 당할 때에 1)그들은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2)그들은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3)그들은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 그들은 어떤 일에 대해서도 불끈 화를 내거나 울화통을 터뜨리거나 격렬하게 감정을 표출하지 않았습니다. 4)그들은 분개하지 않았습니다. 5)그들은 기가 꺾이지도 않았습니다. - 그들은 낙담을 하거나 불행을 느끼지도 않았습니다. “어째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 어째서 내가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나?” 하는 회의를 품지도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박해가 온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우리는 우리의 선배들의 믿음에서 배울 수가 있고,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사도행전 540 이하에 보면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했습니다.

사도행전1625절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에 그들은 한탄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고, 기도하고 찬송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박해를 당할 때 너희에게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고 했습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을 때 왜 복이 됩니까? 왜 박해가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일입니까?

 

그 첫 번째 이유는 기독교인이 주님을 위해서 받는 박해는 내가 누구이며, 어떤 신분인가를 증명해 준다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내가 박해 받는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는 증거요,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15:18-19)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그리고 내가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과거의 선지자들과 같은 수준에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박해하였다는 말은 박해를 받는 것은 선지자들과 같기 때문이다라는 말입니다. 선지자들과 동격이라는 뜻입니다. 선지자와 같다는 뜻입니다. 선지자의 반열에 올랐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박해는 내 신분 확인의 증명입니다. 내 신분을 확증하는 게 박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박해 받을 때 사단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사단, 고맙다. 너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선지자와 동격이라는 증거를 제공하고 있구나, 고맙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를 위해서 박해를 받지 않을 텐데........”

 

그 두 번째 이유는,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라고 했습니다.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크다라는 말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천국에서 보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박해는 여러분에게 붙어있는 천국행 티켓이라는 것입니다. 티켓뿐만 아니고, 천국에서 큰 보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후4:17-18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일시적인 가벼운 환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큰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일시적인 환난은 우리에게 영원하고 큰 영광을 가져 온다고 합니다. 보상이 반드시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보상을 바라보고 신앙생활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보상을 바라보고 신앙생활하는 것은 옳은 신앙생활이 아니다.’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여러 곳에서 신앙의 보상을 바라고 신앙생활하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몇 가지를 들면, 히브리서122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을 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바라보고)”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참으신 것은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을 보십시다. 딤후47-8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님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이것은 바울의 강한 상 받을 것에 대한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성도는 반드시 상 받을 것을 바라보고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반드시 보상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상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거기에 많이 맞은 종들과 덜 맞은 종들의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신비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보상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그리고 분명히 보상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 갔을 때 분명히 보상이 있습니다. 오늘 12절에서도 분명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찬송가(433)

1.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 주께로 날마다 더 가까이

저 하늘나라 나 올라가 구주의 품 안에 늘 안기어

영생의 복 받기 원합니다.

 

4. 이 세상 내가 살 동안에 주께로 날마다 더 가까이

저 뵈는 천국 나 들어가 한 없는 복락을 다 얻도록

풍성한 은혜를 주옵소서.

 

기독교인은 항상 종말을 생각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보이는 것들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더 바라 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모세가 어째서 바로의 공주의 자식으로 자라서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애굽에서 계속 머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까?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날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11:25-26) 했습니다.

 

우리가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해야하는 이유가 뭡니까? 하늘에서 큰 보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신앙입니다. 오늘날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설교하고, 이렇게 예수 믿으면 고리타분한 신앙이라고 비꼽니다. 어느 시대인데 옛날 사람들처럼 고리타분한 생각을 하면서 보상심리를 가지고 예수 믿느냐고 비방합니다. 이제는 시대가 시대인 만큼 고상한 예수를 만나야 되고, 고상한 신앙생활을 해야 되고, 고상한 믿음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천국, 지옥이나 논하고, 천국이 있니, 지옥이 있니 하면서 천국, 지옥 이야기나 하고, 천국에서 상급을 받는다는 생각이나 하고, 그런 저급한 신앙생활, 그런 믿음은 옛날 무식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믿던 신앙이지 이제는 그런 믿음의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무식하게 예수 믿는 것입니다. 내 지혜로, 세상 지식으로 예수 믿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주신 방법으로, 성경이 말씀하는 방법으로 무식하게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진리는 안 바뀝니다. 옛날에는 천국이 그렇게 중요했는데, 이제는 안 중요합니까? 이제는 천국이 필요 없는 것입니까?

 

여러분 ! 여러분은 얼마나 자주 천국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까? 천국 생각을 하면서 얼마나 기뻐합니까? 천국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합니까? 천국 이야기 하면 부끄럽습니까? 지옥 이야기 하면 부끄럽습니까? 우리는 천국 생각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늘 천국의 큰 상, 큰 보상을 생각하면서, 하늘의 상 받을 것을 생각하며 천국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세 번째 이유는 주님의 고난과 연합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고난과의 연합입니다. 내 속에 고난의 영이 임한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이 십자가와 부활 아닙니까?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연합될 때,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오는 고난, 박해,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박해가 오는 것 때문에 내 마음에 전혀 불편함이 없고, 전혀 억울함이 없고, 오히려 기쁨이 내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주님의 고난과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핍박 받을 때에 왜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까?

첫째는, 우리의 신분이 확실히 하나님께 속해있고, 옛날의 선지자와 같은 동격의 신분을 소유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우리에게 하늘의 상이 크게 때문입니다. 반드시 천국의 상이 큽니다. 천국의 상도 차이가 있습니다. 큰 상이 있고, 적은 상이 있습니다. 핍박이 있는 자들에게 큰 상이 있습니다. 큰 상을 기대하십시다. 큰 상을 기대하면 신앙생활을 하십시다.

셋째는 주님의 고난과 연합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다 두 손 높이 올리시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순교의 정신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 팔복이 나의 복이 되게 하시고, 나도 이제 팔복의 단계로 들어가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 의를 박해를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고, 하늘의 상을 바라보며 달려 가게 하옵소서.

찬송가 ----> “환난과 핍박 중에도” (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