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2015/09/20) - 산상설교(19)
세상의 빛
마5: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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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위대합니다. 기독교는 진실합니다. 기독교는 신비입니다. 기독교의 출발은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기독교의 신비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지 않으면 기독교의 신비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빛을 받아야 합니다. 이 하늘의 빛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도 신비입니다. 성경의 출처도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도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지 않으면 그 신비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보좌의 빛을 받은 자만이 성경의 비밀을 깨닫고 그 말씀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고, 미래에도 일어날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앞으로 마지막 때에 나타날 하나님의 재앙과 그 영광도 다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이 우주의 모든 생명의 근원은 보좌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심판도 보좌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의 눈을 열고서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고, 말씀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서 빛을 만나고, 하나님의 신비를 깨닫고, 말씀을 받아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난 주일에 배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라는 말씀보다 더 적극적이고,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간 성도의 신분을 압축시킨 말씀입니다. 오늘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는 이 말씀보다 우리 기독교인의 신분과 위치와 본질을 더 정확하게 압축시켜서 말씀한 곳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정확하게 압축시켜 표현하고 말씀할 수는 없습니다. 정말 기독교인은 세상의 빛입니다. 그리고 빛의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빛이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빛을 보냈습니까? 왜 나에게 빛이 와야 합니까? 오늘은 이 빛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인간은 사실 빛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빛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앞에 모여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선언하시는 이 “너희는” 이라는 이 사람들은 그 당시로 보았을 때 그렇게 뛰어나거나 대단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는 전혀 하찮은 사람들입니다. 왜 이런 사람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만이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빛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들에게 빛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이라는 말은 우리를 두고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특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에 돈 있고, 권력 있고, 귀인의 반열에 들어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세상에서 별 볼일 없는 평평한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런 자들을 향하여서 빛이라고 하십니까? 그들이 예수님의 빛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은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본성이 죄인이고, 이기적이고, 모든 생각이 자기 중심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인간적이고 극히 인간적인 본성으로는 빛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성경은 예수님이 빛이라고 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오직 예수님만이 빛이십니다. 엄격하게 따지면 예수님이 본문의 말씀을 바꾸어서 “내가 세상의 빛이다” 라고 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에 빛이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빛을 주신 것입니다. “참 빛 곡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1:9),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했습니다. “어두운 가운데 빛이 있으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4:6). 예수님이 빛이십니다. 예수님의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습니다. 그래서 내 속에 빛이 온 것입니다.
이 말을 합쳐 보십시오. “내가 세상에 빛이다” “너희가 세상에 빛이다” 이 말을 합쳐보십시오. 그러면 “나와 너희가 세상에 빛이다” 라는 말이 됩니다. 기독교인이 “세상의 빛”인 까닭은 “세상의 빛”이 되신 예수님과의 관계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이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예수님의 빛을 비추는 세상의 빛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그리고 에베소 5장 8절에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우리 기독교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빛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빛의 전달자, 빛을 비추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신비롭게 연합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신비로운 빛을 가진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 속에 빛이 와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기를 돌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나는 빛입니다. 주님의 빛을 받아 비추는 자입니다. 그래서 벧후1장 4절에서 기독교인을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빛입니다. 예수님의 빛을 받아 비추는 자입니다.
둘째는, 빛이 하는 일입니다. 빛은 어두움과 어두움 속에 있는 것들을 노출시키는 일입니다.
캄캄한 방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 다음 갑자가 전등 빛이 켜졌다고 합시다. 또는 어두운 시골길을 달리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를 상상해 보십시오. 빛이 비취면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납니다. 빛이 나타나기까지는 어두움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빛이 나타나지 않으면 어두움 속에 있으면서도 어두움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이 세상 속으로 오시니까,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아 자들에게 빛이 비추었도다” 말씀합니다. 이 세상 속으로 예수님이 오시니까 나타나는 첫 번째 현상이 그가 세상의 어두움을 노출시켰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있는 곳에는 어두움을 노출시키는 현상이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빛입니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빛이 비추어져 어두움이 드러납니다. 중생하지 못하고 죄의 상태에 있는 자들은 눈부신 빛 앞에서는 자기들의 부끄러움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빛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이것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기독교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인은 빛의 기능을 합니다. 기독교인은 하나의 삶의 표준을 제공합니다. 세상과 또 다른 삶의 표준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빛의 삶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을 “산 위에 있는 동네” 라고 말하고, “등경 위에 있는 등불”이라고 말씀합니다. 숨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밝히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세상에 밝히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그들과 다른 표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삶의 표준이 다르기 때문에 세상이 미워하고 박해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우리 예수님을 적대적으로 대한 것도 이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스승이요, 신앙생활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예수님을 그처럼 미워하고 박해했습니까? 그 이유는 주님이 절대적으로 순결하고 거룩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에 그들을 대적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았고, 정죄하지도 않았지만, 예수님에게서 비추는 빛 때문에 자기들의 더러운 모습이 드러나게 되니까 예수님을 미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까닭은 그분이 “세상의 빛”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빛은 그들 속에 숨어 있던 어두움을 드러내고, 어두움 속에 있는 것들을 찾아내고 드러내었습니다.
오늘 우리를 향하여 “너희도 세상의 빛이다” “너희만이 세상의 빛이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기독교인은 세상에 빛을 비추어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은 자입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내 속의 빛을 비추십시다. 할렐루야!
셋째는, 빛은 어두움을 노출시킬 뿐만 아니라 빛은 어두움에서 벗어나는 오직 하나 뿐인 길을 보여주고 제공합니다.
기독교인이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은 어두움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길을 세상에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는 모든 문제는 타락하고 사악하고 오염된 본성의 문제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인간의 타락함과 인간의 사악함이 인간의 힘으로 해결됩니까?
신문에 보니까 한국 GM 자동차에서 노사분규가 일어났을 때, 노조에서 야구방망이를 들고 사무실로 들어와서 사무실 집기들을 다 때려 부수었다는 겁니다. 이것을 보고 미국의 GM회사의 간부가 너무 너무 놀라서 충격을 받고, 미국 본사에 보고를 했는데, 미국본사에서 큰 충격에 빠졌다는 겁니다. 미국의 법이나 생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사에서는 엄청난 손해를 보지만 심각하게 한국 GM를 철수할 것인가를 고민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강성 노조, 머리에 붉은 띠를 매고 무서운 무기, 즉 쇠파이프 같은 무기를 들고 파업하는 모습, 어느 나라에서도 없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인간 속에 있는 이 악함, 현재 지구상에 나타나는 온갖 살인, 불의, 거짓, 악함의 절정이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악해지면 끝없이 악해지는 모습, 이것이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이것이 지식으로, 교육으로, 정치적으로 법으로 해결이 되고 있습니까? 아무리 법을 만들고, 사형선고를 내려도 사람들이 저지르는 악한 짓들은 점점더 도를 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사람이 거듭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사람 속에 진정한 소망을 품게 하고, 또 다른 삶의 형태가 있음을 깨닫고 발견하게 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빛입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많은 빛이 아닙니다. 작은 빛만 있어도 됩니다. 작은 빛이 심령에 비치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빛을 사랑하고 어두움을 미워하는 본성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본성은 어두움을 사랑하고 빛을 미워합니다. 이것이 바꾸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이것을 말해 주고 드러내 주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빛을 소개하고 말해 줍니다. 기독교는 빛의 길을 소개하고 그 길을 가는 방법을 소개해 줍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이 길을 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여전히 본성으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인간은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악한 것을 더 좋아하고 행하게 됩니다. 사람은 나쁘다고 알고 있는 것을 행하기 전에 그에게 경고를 발하는 양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악을 일삼습니다. 그것을 후회할런지는 몰라도 그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입니까? 사람은 악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문제되는 것은 그의 머리에 있지 않고 그의 본성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 19절 이하에서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기독교인은 빛을 받아 드리지 않고 거부하는 자들에게 빛을 비추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의 원인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이탈해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해답은 기독교인들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만이 이 세상에 빛을 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고 깨끗해 보이고, 멋진 신세계처럼 보이지만, 어두움이 꽈악 덮여 있습니다. 마치 죽음의 독가스가 온통 뒤덮여 죽음의 독가스를 마시면서 어디론가 끌려가는 것처럼, 이 세상은 맥없이 눌려 살고, 맥없이 운명에 맡기고 밀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을 향하여, “정신을 차리라. 신선한 공기를 마시라. 끌려만 가지 말고, 새 빛을 받으라” 고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기독교인들에게 “너희만이 이 세상에 빛이다” “너희만이 그 빛을 비출 수 있다” “네 속에 있는 빛을 밝혀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인들만이 하나님께 가는 길을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만이 생명이 무엇이며, 빛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만이 그 길을 가르쳐 줄 수 있고, 그 빛을 줄 수 있습니다. 그 길은, 그 빛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 이름하는 한분, 한 인격을 아는 일이요, 만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하려고’, ’하늘에서 땅으로‘ 오셨습니다. 그 분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빛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고 배우는 복음을 떠나서는 세상에서 빛이 없습니다. 세상은 교회를 보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삶을 보면서 무엇이 다른지를 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는지를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인위적인 도움과 쾌락을 의지하지 않고도 균형 잡혀 있고, 안정적이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사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속으로 “당신이 지니고 있는 그 특별한 것이 무엇이냐? 당신이 그렇게 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냐? 당신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살 수 있는가?” 라고 궁금해 하고, 묻고 싶은 마음을 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15-16)
우리는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 사람에게 새 성품과 새 생명을 주시며,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 라고 말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만이 빛이요, 예수님으로부터 빛을 받은 우리가 곧 빛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빛의 자녀로 살며, 빛의 자녀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빛 되신 주 어둠 가운데 (E,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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