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2015/09/27) - 산상복음(20)
등경 위의 삶을 살자(1)
마5: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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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원래 인간은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 극도의 이기적인 삶을 삽니다. 자기만을 먼저 생각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죄인의 본성입니다. 이 세상에 온갖 어려운 문제들이 어디서 옵니까? 세계 1,2차 대전도 무엇 때문에 생겼습니까? 이 지구상의 구석 구석에 전쟁과 폭력과 인권이 말살되고, 인신매매, 난리와 난리, 소문의 소문을 듣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모두가 인간의 극도의 이기심 때문입니다. 인간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이 이기심이 밖으로 분출해 나올 때,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의 본성을 가진 인간들을 향하여 “너희가 세상의 빛이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왜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빛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4:6)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60:1)
우리 성도는 예수님께 빛을 받았습니다.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 하실 때, “너희”라는 이 무리들은 다 예수님께 빛을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빛을 주셨기 때문에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 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빛을 주셨는데, 우리는 그 빛을 받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빛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1:9)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빛은 주신 분이 더 잘 아십니다. 우리에게 빛을 비추셨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받은 그 빛으로 세상에 비추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
빛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빛은 비추는 특징이 있습니다. 빛은 그냥 비추는 것입니다. 멀리 멀리까지 비추는 것입니다. 숨길 수 없습니다. 빛은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 위에 있는 동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등경 위에 있는 등불” 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등경 위에 있는 등불”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마5:15)
“등경 위에 있다”는 말은 반대로 “등경 아래에 있는 인생”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빛을 주신 것은 내가 등경 위에 인생으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빛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등불은 불을 켜면 반드시 등경 위로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말 아래에서는 세상의 빛이 될 수 없다. 반드시 등경 위에 올라가야 만 세상에 빛이 될 수 있다)
여기서 등불은 기독교인입니다. 바로 나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등경 위의 등불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내 스스로는 등경 위에 올라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등경 위에 올리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있어야 등경 위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두 가지의 삶의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는 등경 위의 인생이 있고, 또 하나는 등경 아래의 인생입니다.
첫째, 등경 위의 삶을 생각해 보십시다.
등경 위에 올리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등불이 자기 스스로 등경 위로 올라 갈 수 없습니다. 등경 위의 삶을 사는 자들은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음을 압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 사람들은 다 등경 위의 삶을 살았습니다. 내 능력, 내 힘을 앞세우지 않았습니다. 내 지혜, 내 지식, 내 경험을 앞세우지 않았습니다. 인간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앞으로도 인류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집니다. 등경 위에 올리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으로 올리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등경 위에 올리십니까? “집 안 모든 사람들에게 비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집 안”은 내 삶의 자리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그 곳, 내가 살고 있는 그 시대를 말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그 장소, 그 곳, 그 시대에 하나님은 나의 삶을 위로 올려서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호롱불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에서 중학교에 들어갈 때쯤 되어서 호야라는게 생겼습니다. 램프라고도 하고 남포등이라고도 했습니다. 낮에는 방구석진 곳에 놔두었다가 밤에 불을 켜면 방 중앙에 갖다 놓습니다. 이렇게 빛이 밝으면 하나님은 중심에 세웁니다. 하나님이 빛을 주시면서 등경 위에 올려서 중심에 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안 모든 사람들에게 비추라는 것이다.
할렐루야!
둘째는 말 아래 있는 삶입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은 불을 켜서 사용하다가 사용하지 않을 때는 등불을 등경 위에서 내려 말 같은 그릇으로 덮어 둡니다.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라는 말은 등불을 켜면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추기 위해서 등경 위에 올려놓지 등경 아래 말 같은 것으로 덮어 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이 무엇인지 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이 드신 어른들은 아실 겁니다. 말은 쌀, 보리 같은 곡식의 양을 재는 도구입니다. 곡식을 재는 도구 중에 되박이 있고, 말이 있습니다. 한 되는 보통 밥그릇, 즉 밥 식기로 열 식기가 한 되입니다. 그리고 한 말은 10되가 한 말입니다. 그리고 한 가마니는 10말이 한 가마니가 됩니다.)
“말 아래 둔다”는 말은 ‘말 안에 가두어 놓는다.’ ‘말로 덮어 놓는다.’는 뜻입니다.
옛날에는 기름이 귀했기 때문에 등불을 사용하지 않는 낮에는 등경이 넘어져 기름이 쏟아질 수 있으니까 등경 위에 올려놓지 않고 아래로 내려놓고 말 같은 그릇으로 덮어 놓습니다.
말 아래 갇혀 있는 인생을 말합니다. 제한된 인생입니다.
불이 켜져 있어도 말로 덮어 놓으면 서서히 불이 꺼져 버리고 맙니다.
어둠이 덮습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포기, 주저앉아 버린 인생입니다.
삶이 답답하고 숨 막히는 인생입니다.
여러분, 예수 없는 인생은 말 아래 갇혀 있는 인생입니다. 빛이 없기 때문에, 빛을 비추지 못하기 때문에, 방 구석진 곳으로 밀어내고, 말로 덮어 버립니다.
그래서 욥기5장14절에 하나님이 없고 교만하고 교활한 자들에게 “그들은 낮에도 어두움을 만나고 대낮에도 더듬기를 밤과 같이 하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문제가 뭐냐하면, 내가 어둠에 갇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빛이 와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
환경의 말에 갇혀 있습니다.
가난의 말에 갇혀 있습니다.
질병의 말에 갇혀 있습니다.
가정의 말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둠에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는 것이 더 불쌍한 것입니다.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요12:35)
세 번째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등경 위로 올라 갈 수 있을까요?
불이 켜지면 등경 위에 올리는 것입니다. 주인이 호롱불에 불이 켜지면, 말 아래 두지 않습니다. 등경 위로 올리는 것입니다. 내 능력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끌어 올리시는 것입니다. 나에게 빛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등 자체를 보고 올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다 등입니다. 고급 등이 있고, 아름답게 만든 등도 있고, 금으로 만든 등도 있고, 은으로 만든 등도 있고, 동으로 만든 등, 철로 만든 등도 있고, 흙으로 만든 등도 있습니다. 등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늘 등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불은 켜지지 않으면서 등을 잘 다듬고, 등을 꾸미기에 바쁩니다. 등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등은 아무렇게 생겨도 불이 켜져야 합니다. 불이 켜지지 않는 등은 겉이 화려하고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재료로 만들었다 하더라도 의미 없습니다. 불이 켜지지 않는 등은 빛을 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다 등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다 등입니다. 하얀 사기로 만든 호롱입니다.
여러분, 등은 볼품이 없어도 불이 켜지면 등경 위에 올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등에 불이 켜지려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기름과 심지가 있어야 합니다. 이 둘은 항상 함께 붙어 다닙니다. 이 둘은 절대 필요합니다. 이 둘이 없으면 빛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열 처녀 비유에서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고,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않아서 신랑이 올 때에 등불이 꺼져 감으로 불을 켜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기름이 절대 중요합니다. 기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기름이 뭡니까? 기름은 주님의 생명입니다. 기름은 성령입니다. 주님의 영, 주님의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인 것은 빛이신 주님이 들어오셔서 우리를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빛 되신 성령이 내 속에 오셔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속에 기름을 주시면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첫 번째로 늘 물어야할 질문은 “내가 이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는가?”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는가?” 라는 질문과 같은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심지입니다.
등불을 밝게 유지하려면 기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심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있는 심지도 평소에 손질을 잘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요즘 전기로 살기 때문에 심지의 중요함을 모릅니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은 심지를 날마다 손질했습니다. 심지에 일단 연기가 나면 검은 연기만 나오지 불빛을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심지에 검은 연기가 나지 않도록 늘 손질을 해야 합니다.
심지가 뭡니까? 주일성수, 예배, 기도, 순종, 헌신, 십일조, 이런 것이 심지입니다. 우리의 신앙, 우리의 신앙생활을 늘 점검해야 합니다.
심지와 기름이 만나면 불이 붙습니다. 불이 붙어 빛을 내면 등경 위에 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성도들을 등경 위의 인생으로 올리고 싶어 합니다.
“13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14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신28:13-14)
이 세상에는 등경 위에 올려져 있는 자가 있고, 말 아래에 있는 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등경 위에서 중심에 서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 아래 갇힌 자가 되시 맙시다.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사는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하나님이 우리를 등경 위에 올리실 때에는 어떻게 해서 올리시는지는 다음 주일에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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