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2016/1/17) - 산상복음(27)
간음하지 말라는 의미=기독교인과 간음
마5: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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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는 다시 산상복음을 설교하겠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산상복음에서 십계명에 있는 말씀의 두 번째 실례가 됩니다. 첫 번째의 것은 21절에 있는 육 계명인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이고, 오늘은 십계명의 칠 계명인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여자를 봐도 마음속에 음욕을 품고 보면 안되는 겁니다. 제가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앞에 앉아 있는 나이든 아저씨가 내 옆에 앉아있는 어떤 여자를 보는 눈초리가 아주 느끼~~하게 음풍이 부는 눈초리로 보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 눈초리로 여자를 보면 안되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더라도 사람 속을 알 수 없으니, 오늘 예수님은 그 마음속의 생각을 ‘너가 더 잘 안다’ 라고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남자들은 이쁜 여자들이나 늘씬하게 생긴 여자들이 지나가면 쳐다보게 되는 데, 그럼 쳐다본다고 다 음욕을 품은 것이냐? 그렇게 묻는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저도 정답을 말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여자들은 키 크고 멋지고 잘 생긴 남자가 지나가면 안 쳐다 보는가? 그럼 그것도 죄인가? 여기에 대해서도 정답을 모르겠습니다.
히브리서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했고, 히브리서3장 1절에는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라고 했는 것을 보면, 우리가 예수님만 생각하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면, 아무리 늘씬하고 이쁘고 멋지게 보인다고 해도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간음을 금한 계명을 단순히 육체적 간음행위의 차원에서만 한정시켰습니다. 육체적으로 간음한 것만 간음죄에 해당한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육체적 간음보다 더 무서운 게 마음의 죄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십계명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십계명의 해석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해석해서 드러난 행위만을 강조하지만, 예수님은 그 십계명의 문자 뒤에 있는 영적인 것, 마음의 죄까지도 들추어내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계명의 계명을 겉으로는 범하지 않았어도, 벌써 마음속에 이것들을 가볍게 취급하고, 마음으로 범했다면 벌써 십계명을 지키지 않은 것과 같다 라는 것입니다.
오늘 산상복음 전체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더 중요하다’ 라는 것입니다. 산상복음의 핵심되는 말씀은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산상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마음에 대한 모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부터 시작해서 8복을 지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형제에게 노하지 마라. 형제에게 욕하지 말라. 마음에 속에 음욕을 품지 말라’ 이 모든 말씀이 모두 마음과 관계있는 말씀들입니다. 그래서 산상복음은 마음의 깊은 곳에 있는 죄의 본성, 죄의 사악성을 들추어내고 있는 말씀이고, ‘너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너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간음하지 말라” 라는 십계명의 제칠 계명을 말하면서,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그리고는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 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간음에 대해서 말하면서 왜 ‘너의 오른 눈을 빼라. 너의 오른 손을 찍어 버려라’ 고 말씀하시는가? 간음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오른쪽 눈, 오른쪽 손”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간음죄만을 위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죄의 핵심, 죄의 사악성, 죄의 뿌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죄의 근본 뿌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성질, 죄의 사악성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 몸 속에 있는 병으로 말하면 겉으로 드러난 죄는 징조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징조가 아니라 몸 속에 자라고 있는 질병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징조가 아니고 몸 속에 숨어 있는 질병이기 때문입니다. 질병은 한참동안 몸속에 숨어 있다가 때가 되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통증이 오든가, 호흡이 거칠어지든가, 몸 빼빼 말라가든가, 징조는 크게 다양한 모습으로 옵니다. 죄의 뿌리는 하나입니다. 내 속 깊은 곳에 있는 죄의 본성, 죄의 뿌리는 하나입니다. 그러나 밖으로 나타나는 죄악은 다양한 것입니다. 죄의 징조는 여러 모양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온갖 죄는 인간 속에 숨어 있는 죄악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간음도 겉으로 드러난 다양한 죄의 징조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면 간음이 뭡니까? 간음이 왜 생기는 것입니까? 간음을 없애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 성경에서 말하는 간음은 우상숭배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성경이 기록되던 그 당시 시대에는 이스라엘 주위의 가나안 땅에는 이방인의 신전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과 연결되어 있는 모든 문화를 다 차단하기를 원했습니다. 가나안의 우상적인 문화들을 끌여 들어 섬기는 것을 하나님은 제일 싫어했습니다. 가나안의 종교나 문화가 이스라엘 속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율법과 예배를 통하여서 분별하고 차단하기를 원했습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성결한 생활, 거룩한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마음을 다 우상과 세상문화에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국가에는 가나안 신전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이런 신전에는 여사제들이 신전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물론 남자 사제들도 있었습니다. 신전에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은 신에게 제물을 드리고는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 드리는 행위가 남자들은 여사제와, 여자들은 남자사제와 벌거벗고 그들의 신이 보는 앞에서 성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희열을 느끼면, 그들의 신들도 희열을 느끼고 기뻐한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이 기뻐해서 자손을 번창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의 신들은 모두가 풍요의 신, 자손을 번성하게 하는 신, 전쟁의 신, 햇빛의 신, 바람의 신, 비의 신 – 한 마디로 풍요의 신들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제사하러 가는 사람들이 제사보다는 잿밥에 더 관심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신전에 제사하러 가면서 마음속에는 벌써 사제들과 성행위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벌써 성관계를 마음에 품고 신전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간음죄에 대한 말씀 속에는 우리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들추어내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율법은 죄를 알게 해 주고, 깨닫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롬3장 20절에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롬7장 7절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간음하지 말라.......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라는 이 말씀 속에는 간음보다 그 뒤에 숨어 있는 죄의 본성, 마음 속의 죄, 죄의 뿌리, 죄악의 생각을 들추어내는 말씀인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크기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죄의 문제를 말할 때, 유일한 방법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인식할 수 있게 하는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이 미약하다는 것을 느끼십니까? 여러분은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해야할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함을 느끼고 계십니까?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의 시금석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것을 믿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를 사랑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습니다. 성도들에 대한 전기를 읽어보면 그들은 점점 갈 수 록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 커 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째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지 못합니까? 우리는 어째서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뜨거운 감사와 사랑의 마음이 없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신 이유, 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막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괴로워 외칠 때에도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까? 요지부동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된다는 말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죽으시면 안된다고 돌이켜 말리는 그들을 향하여 “사탄아, 물러가라. 너희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시면서 끝까지 얼굴을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면서 예루살렘으로 향해 갔습니까? 어째서 그가 원하시기만 하면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들에게 명하여 자기를 보호할 수 있었건만, 그가 그렇게 하시지 않는 것은 그가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함이라고 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바로 인간의 죄의 문제 때문인 것입니다.
과연 죄가 아니면 예수님이 성육신(聖肉身)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가 이처럼 깊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죄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 하늘에서 이 세상에 오시고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만 처리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죄의 처리 문제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문제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 죄의 문제와 하나님의 사랑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간음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간음의 문제는 우상숭배와 깊은 관계가 있고,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의 깊이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겉으로 드러난 윤리적인 간음의 형태보다 그 속에 숨어 있는 마음의 죄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십자가를 통하여 죽으시면서 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게 나를 덮어 올 때 내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죄악을 누룰 수 있고, 극복하고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과의 깊은 관계의 의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모든 의(義)는 내 개인의 윤리적인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기준의 의(義), 인간의 기준에서 만들어진 윤리적인 의(義)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관계에서 오는 의(義)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의는 의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아무 관계없는 의는 인간이 만든 윤리일 뿐입니다.
오늘 분문은 앞에서도 말했는 것과 같이 겉으로 드러난 간음의 문제만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마음속에 깊이 숨어 있는 죄의 뿌리, 죄의 사악함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간음문제만이 아니고 인간 속에 있는 죄의 사악성을 드러내어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연결해서 29, 30절에서 죄를 단호히 끊으라는 의미로 “네 오른 쪽 눈을 빼고, 네 오른 쪽 손을 찍어 버려라”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죄의 뿌리를 해결하지 않으면 오른 쪽 눈을 빼고, 오른 쪽 손을 짜른다 하더라도 또 다른 왼쪽 눈과 왼쪽 손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또 빼고 짤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손이 없고, 두 눈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인간은 여전히 그 마음속에 숨어 있는 죄의 뿌리는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예수님은 간음의 문제를 들추어내기보다 “너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올바른 관계의 의(義)를 가지고 있느냐?”하고 우리의 마음을 들추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과의 깊은 관계의 의(義)로 맺어져 있다면, 내 속에 깊은 곳에 사악한 죄가 숨어 있을 수도 없고, 이런 간음의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성결하고 거룩하다고 해도, 예수님과 관계없는 의(義)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관계없는 의는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만든 의(義)입니다. 결국 자기를 위한 의는 결국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존귀하게 만들려고 할 뿐입니다. 그런 의는 이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으면 의롭게 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눈 때문에, 남을 의식해야 하기 때문에 의로워지려고 할뿐입니다.
예수님과 관계에서 오는 의(義)는 십자가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생각하면 내가 만든 의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의는 내가 만든 의가 아닙니다. 나의 영광을 끌어 올려 극대화시키기 위한 의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의는 항상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킵니다”(고전9:27)
간음은 왜 일어납니까? 내 욕심입니다. 내 정욕 때문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 이기심입니다. 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든 죄는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의 관계의 의(義) 앞에는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아무리 소중하고 귀해도 예수님과의 관계의 의(義)보다 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한 “오른 쪽 눈, 오른 쪽 손”은 그 당시 사람들은 왼쪽보다 오른쪽을 더 소중하게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만일 너희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 중에 어떤 의미에서 죄의 원인이 되는 모든 것, 예수님과의 관계의 의(義)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제거해 버려라.’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혹 내 속에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우상숭배가 있습니까? 오늘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죄 사함 받게 해 주신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얼마나 크게 인식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의 관계의 의(義),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해 주신 십자가, 희생의 의(義)를 얼마나 귀하게 여깁니까? 이러한 귀한 은혜가 약할 때 우리 속에 간음 죄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하나님보다 더 귀한 것이 내 속에 숨어 있을 때, 이것이 바로 간음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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